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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35화 (236/310)

235화. 신과 악마 (2)

좌아악!

주변이 잠식당한다. 거대한 용의 뼈가 다가옴과 함께, 시야와 인지가 흐려졌다.

구구구구구!

급속도로 가까워지던 고룡 쉐이크는, 어느 순간 허공에 멈춰 서서 부서진 어둠나무의 잔해를 살폈다. 그러고는 기묘한 포효를 내질렀다.

-끼에에에에엑!

흡사 철판을 쇠 날로 긁어 내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귀청을 찔렀다.

“크…….”

하지만 그런 것보다, 마나의 체감이 억눌려지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웠다.

마법사는 마나를 느끼는 자.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오감 외에 여섯 번째 감각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각을 가진다. 바로 마나에 대한 감각이었다.

시각으로 표현하자면, 해가 쨍쨍한 푸른 하늘이 시꺼멓고 기분 나쁜 어둠으로 흐려지는 걸 보는 기분이다. 촉각으로 표현하자면, 갑자기 맹렬한 따가움과 가려움이 엄습해 오는 느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휘청거리는 마법사를 흑객이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지가 않군. 사실.”

쿨럭쿨럭!

이상한 잔기침에 사로잡히는 마법사.

흑객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아직도 상당히 거리를 둔 고룡, 허공에 정지한 뼈 무더기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차라리 가깝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반격을 하고 틈을 내 볼 텐데, 뼈다귀 주제에 제법 지능이 있는 놈이다. 분명 뇌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갔을 터인데도.

“시공이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웨이 포탈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교관 석필이 보고해 오자, 마법사는 힘없이 끄덕였다.

“시공이 일그러지다뇨?”

“아, 모든 마법은 제3력, 시간과 공간과 중력하에 발현되는 법이니까. 전송이나 이동의 마법은 특히 그게 더 심하고.”

흑객이 따라 되묻는 말에 마법사가 끄덕였다.

시간은 반직선으로 흐른다. 반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까닭은, 한쪽으로만 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꽃이 시든 것을, 거꾸로 다시 피어나게 할 수 없다. 불타 버린 종이를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공간 이동은 물건을 내던지는 것과 같네. 여기서 저기로 휙 하고 던지면, 몇 초 후에 우리가 거기 나타나게 되지. 거기에 기법이나 자질, 숙련도가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돼.”

“모양이라시면…….”

“어떤 이는 비수, 어떤 이는 원판, 어떤 이는 회선표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게. 그런 걸 던지면 어찌 될 것 같은가?”

흑객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던지는 물건이 비수라면, 공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일직선으로 날아갈 것이다.

원판이라면 던져지는 동안 회전을 받아, 휘우듬한 곡선을 그릴 것이고, 회선표라면 거세고 격한 용틀임을 하며 갈지자로 날아갈 터.

“비수가 가장 좋은 것이군요?”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예일 뿐이야. 중간에 장애물이 있다면 어떻겠나?”

“…회선표가 더 나을 수 있겠군요.”

똑같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나는 까닭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재질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이는 재능이라고 표현한다. 어쩌면 마법 능력 자체가 저런 식으로 ‘모양’이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여기서 가정을 한 번 더 해서, 내던지는 모든 물건이 철(鐵)로 된 것이고. 저기 저놈, 고룡 쉐이크가 거대한 자석이라고 생각해 보게.”

“…그렇군요.”

꽤 명쾌한 비유라, 마법에 문외한인 흑객도 바로 알아들었다.

내던지는 물건이 철구든, 비수든, 회선표든.

그 궤적의 허공에 거대한 자석이 매달려 있다면, 갑자기 날아가는 방향이 비틀어질 수밖에 없다.

가볍게는 영 엉뚱한 곳에 나타날 것이고, 심하게는 아예 휙 하고 잡아당겨져서 자석에 달라붙을 터.

“그리고 자력은 중력과 비슷한 종류네. 클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지. 그런 의미에서… 저놈은 참 골치 아픈 상대야.”

대개의 물리 현상은, 크기가 큰 만큼 힘 또한 커진다. 한낱 짐승도 덩치 큰 놈은 힘도 더 좋은 법이다.

그런데 고룡 쉐이크는 좀 다른 의미에서 참 피곤한 존재였다. 녀석은 힘도 힘이지만, 크기가 지나치게 컸다.

어둠나무가 파괴되자 모습을 드러낸 놈은… 작은 성채만 한 크기였다. 아니. 작은 게 아니라 그냥 성 하나와 맞먹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는 약 3백 장(900미터)에 가까웠고, 양 날개를 펼친 좌우는, 5백 장(1.5킬로미터)에 가깝다.

“이미 선행자들의 정보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가능한 것인가…….”

생명체가 킬로미터 단위의 크기에 육박하다니.

어쩌면 언데드라 가능한 크기일지도 모른다. 살아 숨 쉬는 존재였다면, 저런 거대한 체구를 유지하기도 불가능했을 테니.

“수석 교관님. 어떻게… 공격이라도 해 볼까요?”

“…의미가 있겠나?”

초조해진 것일까, 매소봉 교관이 묻는 말에 마법사가 회의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인의 무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검기나 검강은 무엇이든 잘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절단기였다.

하지만, 고룡 쉐이크는 너무 거대했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 있다고 해도, 개미가 코끼리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들 그게 어디 타격이나 갈까?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렇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으으윽… 크으윽…….”

매소봉이 눈짓하는 쪽.

거기에는 내외상으로 중태에 빠진 두 화경의 고수가 있었다.

포션으로 겨우 상태 악화를 느리게 했을 뿐, 이대로는 저 둘을 잃고 만다.

실로 낭패였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전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룡 쉐이크, 저 거대한 놈에게 달려들자니 그건 단어 그대로 ‘자살’에 가까운 일이 될 테고.

“그래… 할 수 없지. 학관생 흑객, 자네는 여기서 이탈하게.”

“…교관님?”

“달리 방법이 없어. 근접 전투가 가능한 무술 교관들은 전투 불능. 마법사인 우리들은 저놈이 흑마력… 그런 걸 뿌리는 것 때문에 이동이 불가하네. 하나, 자네라면…….”

까닥.

마법사가 허공 저편, 이제 제법 무리를 지어 뭉쳐 있는 박쥐 떼를 턱짓했다.

“자네 혼자만이라면 여기서 어떻게든 몸을 뺄 수 있겠지?”

“…….”

결국 눈치챘는가. 흑객이 착잡한 얼굴로 침묵했다.

하기야 이미 여러 번, 단순한 학관생 이상의 능력을 보인 그였다. 거기에 저 수많은 박쥐들은 어떻게든 정체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흡혈귀.

그들의 사역마로서, 박쥐는 너무도 잘 알려진 존재였으니까. 마법사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가게. 가서 주둔지에 이 상황을 보고하도록. 운이 좋으면 지원이 올 때까지 우리도 무사할지 몰라. 저놈은 덩치도 덩치지만, 제법 신중한 것 같으니…….”

마법사가 애써 말을 돌린다. 가정법으로 말을 하면서도, 그는 ‘지원군을 데리고 와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다. 저런 거대한 놈을 상대로 구출대가 꾸려질 리가 없다는 것을.

지금 그가 흑객에게 주둔지로 탈출하라는 것은… 사실 그만이라도 살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좀 의외로군요. 왜 꺼림칙한 어둠의 존재를 달고 다니냐고 책망이나 질책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하. 지금 상황에서?”

껄껄껄!

마법사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고는 곧,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자네는 본인이 엄청난 괴물인 줄 아는 모양인데, 별로 그렇지 않네. 어쩌다 그것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죽을 위기였었지 않나?”

“……!”

“그렇지? 당연히 안 그랬겠나. 자네 같은 경우는 의외로 꽤 흔하다네. 애초에 천무학관은 인간도 아닌 분을 학과장으로 모시고 있네. 그분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힘은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거든?”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존중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못 버텨. 지가 알아서 나가든가. 아니면 때려치우든가. 하고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게 흡혈귀라도요?”

“흡혈귀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거야. 적어도 자네는 충동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건 또 어떻게…….”

“학과장님이 부르셨지 않나?”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마법사.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흑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정화시켜 버리지 않은 걸 보면, 자네는 현상 유지는 된다는 말이겠지.”

“…그게 그렇게 됩니까?”

“마도에 몸을 담고 있다 보면 마법사는 여러 신비를 보고, 그게 현실임을 인정해야 하지. 기어코 금술(禁術)에 손을 대고 마는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나?”

죽기 싫어서, 혹은 이제껏 이룬 경지가 아까워서.

아니면 후계자에게 의발을 전수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인간이 불사의 법에 손을 대는 경우는 많다.

특히나 마법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생불멸한 존재가 될 수 있기에, 특히나 유혹이 상존하는 경우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글쎄요…….”

좋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생각만 막연히 하고 있던 흑객은 곧 얼굴이 굳어버렸다.

“리치왕의 수하가 되어 버렸네.”

“……!”

“무얼. 마법사가 언데드가 되면 그게 리치지. 그런데 언데드는 원래 상위종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에 복종하거든. 그리고 이 땅에는 어떤 리치든,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고위급 리치가 둘이나 있어.”

메피스토, 그리고 리치왕.

이 둘은 언데드의 최정점에 다다른 존재다. 중원에 이들의 존재가 있는 이상, 언데드로 영생불사를 추구해 봐야, 마법사는 자유의지를 잃고 그냥 꼭두각시로 전락할 뿐.

물론 흡혈귀도 따지고 보면 언데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피를 빨며 남의 생명을 갈취하고, 심지어 전염까지 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

“흡혈귀는 리치왕의 명령을 받지 않지. 그러니 인류 연합의 기치에 속할 수 있는 존재야. 물론… 순수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몬스터도 길들일 수 있으면 길들이려고 하는 차에, 이지가 멀쩡한 존재라면 일부러 척질 필요가 없다.

대놓고 권장할 수야 없지만 굳이 적으로 돌릴 바에야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으니까.

이런저런 복잡한 정치(?)적 사정을 말해 주고, 마법사가 멍한 얼굴의 흑객에게 한숨 쉬었다.

“그러니… 그런 것일세. 더 자세한 것은 학과장님이나, 제운비 수석 교두께 듣게. 일단 자네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보스 몬스터의 정보를 알리러 가고.”

“…….”

“아, 뭐 하나? 계속 이렇게 있을 건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교관님.”

마법사의 질책에 흑객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적전지 이탈을 권했다. 하지만 흑객은 지금 상황에서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놓고 권할 수야 없지만.

“죽을 위기에 처했기에 금주에 손을 대는 거라면… 나름 정상참작이 되는 겁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게, 학관생 흑객. 그건 사도(邪道)야.”

눈치챈 것일까. 교관은 엄한 얼굴로 척! 팔을 벌려 막아섰다.

그가 흑객을 마주해 등지고 선 뒤에 있는 것은… 중태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그마치 화경의 고수 둘.

지금 당장은 전력이 되지 않지만, 흑객이 손을 쓴다면 즉각 도움이 될, 강력한 고수 둘이 쓰러져 있었다.

“그 누구든! 본인의 자유의지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종속 계약은 금지일세!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행위는 안 돼! 알겠나? 사도라고, 사도!”

“…….”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자네… 미쳤나? 물러서! 어서 물러서라고!”

마법사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르르륵…….

흑객은 이제껏 숨기고 있던 마성을 더는 감추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핏빛이 서렸고, 날카롭게 솟아오른 송곳니는 입술 밖으로 주욱 드러나 있었다.

“사, 사도! 사도라고! 금술이고 금주란 말일세!”

“아니요…….”

마법사의 옷깃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공격 마법을 날리려는 그에게 흑객은 간단히 부정했다.

“사도가 아니라 마도(魔道)입니다. 저는 마교도이니까.”

“무슨…….”

퍽!

정 대놓고 권할 수야 없다면.

강제로라도 시킬 뿐. 그 책임은 우리가 진다.

마법사의 목을 후려갈기고, 흑객은 이를 드러냈다.

크크크크크! 크으으으---!

화경의 고수, 오랜만에 정기 어린 귀한 피를 마시게 된 흡혈귀가 대놓고 기쁜 목 울림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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