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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36화 (237/310)

236화. 신과 악마 (3)

끄르륵. 끄르르륵.

교관 문강은 괴롭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목 안에 밤송이 수십 개가 굴러 다니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혹은 흐르는 침을 삼킬 때마다, 밤송이들은 덜컥덜컥대며 기도를, 혹은 식도를 마구 찔러댔다.

그게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지만, 그조차 코를 고는 듯 조악하게 들릴 뿐이었다.

끄르륵. 끄르르륵.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문강은 어릿어릿해지는 정신의 마지막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기억났다. 친우였던 사현영 교관. 그의 온몸에 달라붙은 새카만 파리 떼. 그걸 털어내던 중에 몇 마리가 그의 손에, 목에 달라붙었고…….

유장위 대협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도와주지 않았다.

‘빌어먹을.’

끄르륵. 끄르르륵…….

딱히 탓할 생각은 없었다. 뭔지도 모를 위험에 목숨을 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당장 자신도 사현영 교관이 벌레 떼에게 휩싸인 걸 보고, 어설피 도우려다 이 꼴이 되고 말았으니까. 다만… 다만.

그 묘할 정도로 차가운 눈.

그게 좀 기분이 상했다. 뭐랄까, 쓸모없는 패를 치우는 걸 보는 무감각? 혹은 속 시원함? 그런 눈빛.

…그래도 화경에 오른 몸인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다니.

다른 것 없이 그게 속상했다. 제대로 된 쓸모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이것보다는 좀 더 볼품 있게 죽고 싶었다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무인의 삶을 선택한 이상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약간의 의미 정도는 있어야 미련 없이 눈 감을 수 있지 않은가.

아아. 그래도 이것도 이제 곧 끝이겠지.

끄르륵. 끄르르륵…….

문강은 혼탁한 시야 저편에서 시뻘건 등불 같은 두 눈이 비치는 것을 보고 직감했다.

이제 이렇게 죽는 거라고.

사신(邪神)이 불쑥 다가와 자신의 넋을 뽑아 갈 때가 결국 왔다고. 그는 막연히 수긍하며 내심 끄덕였다.

누구나 언제고 찾아올 때가 자신에겐 지금일 뿐이라고.

-교관 문강, 살고 싶은가?

‘……?’

그래서 찌르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내심 갸웃거렸다.

뭐지? 이건?

저승사자가 아닌가? 내 목숨을 거두러 온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의문을 가질 무렵, 목소리가 재차 물어왔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묻겠다. 교관 문강.

-이대로 죽겠는가? 아니면 살겠는가?

‘…….’

문강은 통증으로 흐릿한 머리로 생각했다.

이건 혹시 그런 것일까? 까마득한 옛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괴담 같은 것.

죽음을 맞이하는 이에게, ‘너 다시 살고 싶으냐?’ 라고 물어온다는, 저승의 심판관이 있다는 옛날이야기.

그리고.

‘그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더라?’

나이 드신 할머니가 했던 말이 가물가물했다. 무리도 아니다. 얼추 50년 다 되어 가는 기억이니까. 하물며 지금 이런 몸으로…….

-세 번째. 이제 마지막이다. 교관 문강.

-죽겠는가, 아니면 살겠는가. 다시 묻지 않겠다. 대답은?

‘…….’

그게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던가. 갑자기 의식이 또렷해진 문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끄르륵. 끄르르륵…….

그렇다고 비록 제대로 된 말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알아들을 것 같았다. 저 불길한 붉은 등불 같은 눈. 그건 보통의 존재가 보일 수 없는 것이니까.

과연. 그런 문강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좋아. 그럼 네게 새 삶을 주겠다. 하나, 알아 두어야 한다.

-이제부터 너는 인간을 버리게 될 것이다. 한없는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릴 것이고, 너를 아는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하며 저주하게 될 것이다.

‘…….’

상관없다. 그런 건.

이대로라면 자신은 그저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 갈 뿐이니까. 마지막에 드리워진 동아줄을 거부할 만큼 형편이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때로는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하나 약속하지. 최대한 네 자유의지, 네 의사를 존중하겠다. 나 또한 너와 같은 입장이니 이는 너를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

그래도 생각보다는 후하시군. 거기까지 챙겨 주시다니.

문강은 정체 모를 저승사자에게 약간 감읍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흐릿해지는 의식으로 채근했다.

빨리……. 어서…….

고통은 아무래도 좋지만, 이대로라면 곧 끝이 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존재가 너무 여유를 부려서 문강 자신의 목숨이 다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셋을 세겠다. 그동안 네 인간이었던 삶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도록. 그럼.

셋? 너무 짧지 않은가?

간사한 것이 인간이라고, 당장이라도 끝내 달라고 채근한 것이 언제인지.

그래도 한평생, 얼추 오십을 살아온 삶을 단 숫자 셋을 셀 시간 동안 마무리하라는 것은 너무 짧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콰득!

“끄… 으으으윽!”

목덜미를 화끈한 통증이 덮쳐 왔다. 마치 거대한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것 같은, 아니.

쭈우욱. 쭈우우욱.

몸의 내용물. 피와 함께 영혼까지 쭉쭉 뽑혀 나가는, 기묘한 허탈감과 상실함에.

‘자, 잠깐… 이건… 좀 아닌 거 같은……?!!!’

천무학관의 교관 문강. 그는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밝히다 말고 스러져 버렸다.

벌컥벌컥. 꾸우욱

“크르르르…….”

미칠 듯했다. 온몸에 힘이 솟아 오르고, 세상을 다 씹어 삼킬 것 같은 강렬한 충동이 뇌를 달궜다.

생각해 보면 이번이 처음이던가.

자의로 인간의 피를 흡혈한 것은.

꿀럭꿀럭. 화… 르르륵!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독한 술을 마셨을 때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나른한 흥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묘할 정도로 달콤한 피. 인간의 피.

그것도 자그마치 마스터(화경)급 무인이 쌓아 올린 정혈이었다.

크르르르르…….

강한 존재의 피를 마신 만큼, 흡혈귀는 강해지고 있었다.

치이이익… 핏. 핏.

흑객의 등 뒤에서는 불길한 검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이른바 부정한(Unholy) 영기.

그걸 본 마법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게 뭐야…….”

“최소 공작급… 서, 설마 대공급 흡혈귀? 인간이……?”

“크후우---!”

번뜩.

흑객의 핏빛 눈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혈기에 잔뜩 취한 그가 몸을 움직이려 한 순간.

-애송이, 진정해라.

‘……!’

차디찬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피 맛 처음 본 티를 내지 말고. 할 일부터. 더러운 파리 새끼의 냄새가 난다.

“…크르르르.”

척. 타악!

흑객은 성미 돋은 모습으로 발치를 걷어찬 후.

콰득!

다시금 엎어져 있는 화경 고수. 이번에는 도객 사현영 교관의 목을 물어뜯었다.

“어억… 으윽…….”

쭈우욱. 쭈우우욱!

애달픈 신음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정없이 피를 빠는 흑객.

찌이이익…….

하지만 그는 피를 빨아들임과 동시에 내뱉고 있었다.

아득. 콰득.

칼날처럼 날카로운 흡혈귀의 이빨은, 닿기만 해도 사람의 살을 가른다. 그건 자기 자신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송글송글. 주르륵.

애초에 그는 피에 대한 주권을 지닌 자.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흡혈귀의 피를 주입한다. 그로서 그에게 물린 이는 하급 뱀파이어로 화한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피만 충분하다면.

뚜드득! 주르르륵!

손상된 신체를 재생시킬 수 있는 권능이 있다.

흑객에게 물려 하얗게 핏기가 가셨던 문강. 그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벗겨지고 갉아먹혔던 피부가 되살아나고,

스르륵. 툭. 툭.

그 서슬에 채 깨어나지 못한, 파리의 미세한 알들이 밀려 나온다.

콰득! 우직!

흑객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그 알들을 터뜨렸다.

브---즈즈즈.

언뜻, 허공에서 기분 나쁜 벌레 소리가 들렸지만, 그 또한 팍! 하는 타격음과 함께 잠잠해졌다.

-바알. 영락해 버린 더러운 신의 찌꺼기…….

언뜻, 블라드 드라쿨레아. 그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그가 알기로 바알은 원래 악마가 아니었다.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어느 민족의 신이었다.

아니, 애초에 바알이라는 이름조차 본래는 ‘주인’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새-날개의 바알. 명궁-활의 바알. 하는 식으로.

그 민족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하며,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으로 그 힘을 빌렸다고 한다.

제물로는 제 신체의 일부를, 혹은 제 자식을.

그 의식은 꽤나 효험을 보아, 바알은 한 지방에서 주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수백 년 후, 그 민족의 또 다른 분파와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신도의 대부분을 잃고 신좌에서 내쫓기게 되면서, 바알은 그 힘을 거의 잃었다.

‘신이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흑객의 물음에 블라드가 대답했다.

-백성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니니까.

영토가 있고 권위가 있어도, 국민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신은 신도들의 신앙으로 유지되는 존재다. 자신의 신도가 몰살당했으니, 원래라면 소리 소문 없이, 존재 자체가 스러졌어야 할 터.

하지만 묘하게도 그를 신좌에서 축출해 버린, 다른 신 의 신도들이 오히려 바알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바알은 악마다. 세상 모든 악마들의 왕. 귀신과 짐승들의 우두머리니라!

종교전쟁에서 선과 악은 명확해야 한다.

승리한 민족의 지도자는 적을 패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문화와 정신마저 빼앗았다.

패망한 민족의 신을 악마로, 불결하고 두려워할 악마왕의 존재로 만든 것이다.

‘…….’

-왜, 남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신앙을 더 이상 모을 수 없게 된 신.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바알이 내리는 풍요는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가 창궐하는 죽음과 질병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더 커지고 확고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신이 아니라 악마로서.

풍요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음과 마귀의 주인으로서 존재하는 악귀들의 왕으로서.

바알은 새로운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신으로서의 존엄은 잃었지만, 악마가 되면서 놈은 더욱 강해졌다. 풍요와 죽음. 양대 속성을 동시에 가지게 된 대악마가 되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상대하려고?’

흑객은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신선도 요괴도 아니고, 신.

부처님이나 옥황상제급의 존재다. 심지어 악마가 되면서 더 강해졌다는 존재를, 드라쿨이라는 놈은 노기등등해서 싸울 기세로 대하고 있었다.

괜히 이놈 때문에 이 세상까지 덤탱이로 위험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할 때.

-아니, 놈은 이미 이곳에 손을 뻗었다. 저기 저걸 보도록.

드라쿨이 흡혈귀의 눈을 끌어내어 먼 곳, 수천 리 상공의 고룡 쉐이크, 놈의 공허한 안와(眼窩)를 보게 했다.

찌이이익-!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곳에 한도 끝도 없는 무더기가 있었다. 오로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용골의 두개골 안에.

“미친…….”

한 마을은 될 법한 크기의, 거대한 파리 떼 무리가. 그 규모에 흑객은 하얗게 질렸다.

-알겠나. 놈이 먼저 이 땅에 탐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나선 것이고… 나는 저놈이 잘되는 꼴은 절대 눈 뜨고 볼 수 없으니.

‘너는… 아니, 당신은. 저걸 어떻게 상대할 생각입니까… 이길 승산이 있기는 한 겁니까?’

-피바다라면.

언뜻, 흡혈귀가 바라는 광경,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룬 끔찍한 광경이 흑객의 눈에 비치고.

-나는 리치왕에게도 지지 않는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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