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신과 악마 (4)
피는 곧 생명이다. 그리고 생명은 곧 힘이다.
막대한 양의 피의 바다. 그런 곳이 전장이라면, 흡혈귀는 불멸 불사다. 무적의 존재가 된다.
피만 충분하다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생명체든, 언데드든, 형용조차 못 할 악마왕이든. 적어도 흡혈귀에게는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서 피는, 무인의 내공이나 마법사의 마나와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피에 종속되는 흡혈귀가 그 종속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른바 완벽. 스스로 가진 ‘격’의 존재가 더 상위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되기에.
-바알이 마계의 가장 큰 존재라 하나, 나 또한 마계의 대공(Duke). 무한의 혈해(血海)가 있다면, 드래곤과 겨루어도 지지 않는다.
‘…….’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에 흑객은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이걸 믿자니 안 믿기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당장 몸 안에 들어차는 힘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드드득. 드드드득.
흡혈귀의 힘은 무인과 달랐다. 기경팔맥과 십이 경락을 통해 움직이는 내공과 달리, 흡혈귀의 힘은 전신에 뻗은 수천 수만 개의 혈관을 통해 뻗어 나갔다.
“끄읍…….”
팅! 팅! 팅!
그 힘은 전신의 혈관을 통해 미친 듯이 증폭되고 있었다.
탈마급 고수인 천마, 그리고 화경급 고수인 천무학관의 교관 둘. 이들의 피로 목을 축인 흡혈귀는 오랜만에 힘 걱정 하지 않고 날뛸 수 있게 되었다.
“쯧…….”
그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그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흑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그건…….’
-알고 있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것 따위.
블라드는 코웃음을 치며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지금이야 영락하여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괴물이 되었지만, 생전의 그는 고귀했던 기사.
작지만 한 나라의 왕이었던 이의 자존심은, 염치도 없이 남의 권리를 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남의 몸을 빼앗아 놓고?’
-상황이 다르지. 너는 그때 죽었었다.
기막혀하는 흑객에게 블라드가 일침을 가했다.
-네 주인이라는 자가 잠든 나를 네 죽은 몸에 밀어 넣었었지. 나는 이미 죽은 시체인 줄 알고 받아들였고, 따지고 보면 내가 사기를 당한 격이다.
따악. 피잇!
말과 함께 블라드가 흑객의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파다다다닥!
그와 함께 몰려드는 수많은 박쥐들.
끽! 끼긱!
주변이 어두워졌다. 어둠나무를 상대하느라 조금 소모하긴 했지만, 인근 사백여 리에서 몰려든 박쥐들의 수는 근 만에 가까웠다.
-…아깝구나.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피이거늘.
가히 군세(軍勢). 하늘을 까마득하게 덮으며 모인 박쥐의 무리를 보고, 블라드가 혀를 찼다.
그런 그가 잠시 아쉬운 기색을 보이다가 따악!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긴 순간.
깨애애액! 깩! 깩!
퍼벙! 펑! 퍼벙!
하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수천 마리의 박쥐들이 일제히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후드드득. 솨아악.
쉬이이이이…….
수많은 육편, 그리고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붉고 검은 사체와 피들, 그리고 비명들은 난데없이 인세에 찾아든 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츠…….”
허공에 어마어마한 피의 안개를 뿌린 블라드는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그는 가진바 전력을 다해 자신의 권능을 펼치는 중이었다.
사아아아아…….
블러디 미스트(Bloody Mist).
말 그대로 핏빛의 안개, 혈무였다. 아까의 마법사들이 쓴 물리 배척에 버금가는, 흡혈귀의 성역(Arcane).
상대가 생명체라면, 휘감기는 즉시 피를 빨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생명체가 아니라면, 닿는 족족 부식되거나 바스러지고 만다.
이는 피 자체가 가지는 성질.
아무리 신병이기라 한들, 끈끈한 피를 묻힌 채 시일이 지나면 녹이 생기고 손상이 가고 만다. 일종의 자연력을 강제로 한쪽에 모은 끔찍한 권역.
솨아아아…….
그 권역이 이동까지 하고 있었다. 붉은 혈무는 허공에서 활강하고 있는, 고룡 쉐이크를 향해 몰려갔다. 거대한 뼈로 된 용은, 그에 끔찍한 호통을 내질렀다.
꿰------에에엑!!!
파칭!
허공에 거대한 유리구슬이 생겨난 듯했다. 시야를 굴절시키는 투명한 역장(力場). 거기에 혈무가 달라붙어, 갑자기 새빨간 핏빛의 달처럼 변했다.
파---타다다닥!
죽음과 피가 격돌했다. 큰 궤를 놓고 보면 흡혈귀나 스켈레톤이나 같은 언데드다. 어찌 보면 동족상잔으로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피가 곧 힘이자 생명으로 되는 뱀파이어와, 그저 사체의 부산물로 흐를 뿐인 언데드.
그 둘은 근원에서 달랐다. 한낱 뼈 무더기조차도 술자가 다르면 싸울 수 있는 법. 그렇기에.
파직! 파지직! 파캉!
혈무가 쉐이크의 방어를 깨뜨리고 스며들었다. 핏빛 안개는 곧, 노르스름한 금속성의 빛을 띠었다.
무수한, 셀 수 없이 많은 쐐기. 혹은 말뚝으로 변하며.
‘저건……!!!’
흑객은 멀리서 보이는 광경에 경악했다.
가시창술.
자신이 어설프게 쓴 흡혈귀의 힘.
서너 가닥의 창날이 수십 개로 분열하며, 빠져나갈 틈도 없이 적을 휘저어 버리는 광역 기술. 하지만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기예는, 규모건 범위건 간에 흑객의 상상을 초월했다.
쉐가가가각! 파가가가각!
킬로미터 단위의 적을, 수십 만의 칼날이 몰아치고 있었다. 고룡은 죽은 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한껏 피를 머금은 블라드는 잔인하게 웃을 뿐이었다.
쫘아악!
그는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인형술사처럼, 열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뻗은 채로 꿈틀거렸다. 실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는 그 손가락에 맞춰, 허공에 뻗은 수십만의 가시 창들이 고룡의 전신을 쑤시고 찢어발겼다.
브---즈즈즈!
“큭!”
하지만 어느 순간, 블라드가 휘청했다. 그는 곧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퉤, 하고 침을 내뱉었다.
“으읍…….”
그건 몸을 공유하고 있는 흑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쓰고 매운 지독한 악취에 헛구역질을 했다.
‘이, 이게 뭐야?’
-더러운 파리 새끼의 냄새다……. 하, 현계는 꿈도 못 꿀 덩치가 발가락부터 들이밀고 앉았군?
‘현계(現界)라고?’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이 차원은 이미 저놈이 눈독 들이고 있던 참이다. 건너오기라도 할 참이었나 보지……. 저걸 봐라.
----!!!
음파 시야. 자욱한 혈무에 뒤덮여 보이지 않던 것이 흑객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건.
솨아아악… 브즈즈. 브즈즈즈!!!
수천여 개의 가시 창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파리 떼를 찍어 터뜨리는 광경이었다.
퍽! 퍽! 투둑! 뿌직!
흑객이 뽑아 휘두른 가시 창이 팔뚝만 했다면, 블라드가 직접 운용하는 가시 창은 손가락, 그 이하로 가늘었다. 창날의 작은 끝 부분 정도로 얇고 예리했다. 애초에 그런 크기가 아니면 적, 초파리보다 약간 큰 새카만 파리들을 찔러 터뜨리기도 힘들었다.
쥐-----이이이잉! 파드드득!
초당 수십, 수백 번의 진동을 일으키는 가시 창. 음파 시야가 아니었으면 흑객 본인도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을 정도다. 창날의 예기를 진동으로 더욱 끌어올리며, 가시 창은 고룡 쉐이크의 두개골 안을 후벼댔다.
파득! 파득! 파바박!
하지만 새카만 파리 떼는 무한(無限)에 가까웠다. 놈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초당 수십 수백만 마리의 파리들이 가시 창에 썰리거나 터지고 있었지만, 수백만, 아니, 수천만에 달하는 검은 파리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퍽. 퍽. 투두둑.
곤충이 터지며 흩뿌려지는 체액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철퍽. 철퍽. 촤르륵.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진동하는 가시 창의 위를 덮었다.
바르르륵! 파바바밧! 팍! 팍!
가시 창은 선명한 금속성을 울리며 그 물결을 밀어냈지만… 파리 떼는 파도와 같았다. 새카만 물결이 밀어내도 밀어내도 계속해서 퍼부어지며 가시 창의 범위를 잠식해 왔다.
“쿨럭, 커흑……!”
하필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기에, 흑객은 핏방울에 스미는 악취, 벌레 썩은 냄새를 고스란히 맛봐야 했다.
우웨엑! 울컥!
그저 그냥 벌레 시체라 해도 구역질이 날 텐데, 심지어 그 벌레가 역병을 일으키는 놈들이었다. 사람의 시체, 동물의 사체. 온갖 죽고 썩은 곰팡이의 냄새가 흡혈종이 되어 예민해진 흑객의 감각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아니, 애초에 무리였던 것 아닌가?
흑객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블라드가 흡혈귀의 왕이니, 마계의 대공이니 하더라도 상대는 고룡 쉐이크. 천무학관이 전력의 반가량을 기울여 토벌하려고 했던 필드 보스다.
애초에 흑객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었다. 아무리 지금 블라드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든다고는 해도…….
-흐, 다 차린 밥상에 이제 와서 숟가락을 들이미는가. 참 뻔뻔한 작자로다.
‘어?’
쐐애애액!
그때였다. 갑자기 저 아래. 백여 리 가까이 떨어진 바위 무더기에서, 눈부신 섬광이 솟아올랐다.
그 섬광은 고룡 쉐이크의 두개골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나쳐.
틱. 파---지지직!!!
창공을 하얗게 물들이는 벼락처럼, 살짝 푸른 기운의 뇌전이 되어 백여 리 전방을 뒤집어놓았다.
“크억!”
꽈----르르릉!
뒤늦게 폭음. 뇌명(雷鳴)이 일었다. 먼저 충격을 받고 나동그라지다 시피 한 흑객이 콜록콜록.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유… 장위.……!”
그랬다. 조금 전 날아온 벼락은 이제껏 몸을 숨기고 있었던 유장위가 뿌린 일격이었다.
처음에 검강으로 뿜어져 나오다가, 마지막에 수십 개로 분열하며 쪼개져 나가는 뇌정(雷霆).
“커억… 씨발, 무슨 광역기 대결이라도 하냐…….”
흑객이 끙끙거렸다. 그의 말처럼, 바알-블라드의 두 악마적 존재가 범위의 공수를 주고받는데, 여기서 자연재해급(현경)의 일격이 또 한 번 광역으로 퍼진 것이다.
쌍방이 있는 힘을 다 겨루고 있던 상태라, 갑작스러운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후드득. 푸스스슥.
억을 가뿐히 넘겼을 파리 떼는, 지근거리에서 터진 뇌명에 떼몰살을 당했다. 그리고 그 파리 떼를 짓이겨서 터뜨리고 있던 블라드의 가시 창은, 은은하던 금속성을 잃고 핏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제어가 풀렸군… 더는 힘을 쓰지 못한다.
블라드가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했다.
“쿨럭! 어, 어떻게 해! 그러면!”
-어떻게 하긴? 차라리 기회다. 지금 이탈한다. 본인이 잔뜩 어그로를 먹어 주는데… 큭큭.
“뭐……?”
처척. 턱.
흑객의 의문에 대한 답은 뒤에서 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천무학관의 두 교관. 사현영과 문강이 마치 신하처럼 부복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시여.”
“주인을 뵙습니다. 명을 내려 주소서.”
“교관님들……?”
상처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전신이 파리와 구더기에게 파먹혔던 부상자가, 완전히 회복되어 돌아온 것이다.
“말씀을 낮추소서. 존귀한 분이여.”
“저희는 당신의 권속일 뿐입니다.”
“……!”
흑객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아마도 아까 피를 빨면서 흡혈귀의 정수를 밀어 넣었기 때문인가. 이 두 사람은 이제 흑객 자신의 수하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으로 돌변한 것이다.
“…후퇴한다. 적은 예상외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사현영, 문강, 그리고 매소봉.”
입맛이 조금 썼다. 이제 인간으로서 자신의 성취를 이룬 무인 둘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흑객 자신의 수하가 되며 그들의 존재는 변해 버린 것이다.
하나.
“각각 마법사들을 들어 주둔지까지 옮기도록. 후방은 내가 맡겠다.”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건 그를 위한 희생… 정도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지.
“명!”
“받습니다!”
타닥! 타닥!
천무학관의 무술 교관 셋이 마법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눈에서는 은은한 혈광을 내뿜고, 송곳니는 길고 날카롭게 뻗은 흡혈귀가 되어서.
“으. 으아아악!”
“자, 잠깐! 멈춰! 안 돼!”
“후…….”
잠시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허약한 마법사가 무술 교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사이 좋게 뒤통수를 한 대씩 맞은 마법사들이 무인들에게 들려 업힌 채로 후퇴하고.
쿠르릉! 콰아아아!
유장위라는 현경의 고수가 엄호(?)해 주는 동안, 흑객은 후방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천천히 후퇴했다.
-후, 비록 영락했다고는 해도 신은 신. 한 지방의 대신으로서 있었던 존재의 값은 크군.
“…….”
뜻 모를 블라드의 말. 그걸 단단히 머리에 심어 놓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