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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44화 (245/310)

244화. 새로운 징조 (1)

쪼르릉. 종종.

날이 밝았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창 안으로 밀려들었다.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 천무학관의 학과장의 하루는, 상쾌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정갈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후르릅. 후릅.

따스한 찻물. 가볍게 떫은 맛이 나지만, 곧 혀끝에 달큰한 뒷맛이 감돈다. 다음으로 넘어간 찻물이, 목을 통해 코까지 청아한 향기를 풍긴다.

후우.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리그웨더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피로가 조용히 사그라드는 기분 때문이다. 이 세계의 다도는 참으로 신묘했다.

“고작 찻물에 미약하지만 마나 포션의 효력이 있으니.”

벽안에 금발이긴 하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 같았다.

비록 실체는 드래곤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인간의 삶을 살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폴리모프 마법은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후르릅…….

크기가 성만 한 거대한 드래곤이, 작디작은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된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마법. 현실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고, 우회해서 적용하는 또 하나의 법칙이다.

드래곤과 인간은 몸도, 정신도, 전혀 다른 존재다. 본래라면 손발을 움직이는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도 다르다.

“흐으음…….”

때문에 드래곤이 쓰는 폴리모프 마법은, 일종의 ‘격’을 통해서 유지된다.

인간으로 치면 일종의 연극 같은 것.

강도의 배역을 맡은 배우가 스스로를 진짜 강도라고 생각하고 거칠게 행동할 때 제대로 된 극이 나오는 것처럼,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인간처럼 행동해야 한다.

스읍. 달칵.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본체-정신으로 차원 저편에 연결된 자신의 진짜 몸까지 타격을 받는다.

두 개의 몸. 하나의 정신.

서로서로 완전히 달리하기에 보호받을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 마법이다. 동시에 이처럼 고등한 정신 세계를 요구하기에,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마법이다.

드래곤은 인간으로 폴리모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드래곤으로 폴리모프 할 수 없다. 아무리 마법의 극에 달한 고위 마법사라도.

고수가 하수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하수가 고수 흉내를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똑똑.

“학과장님, 기침하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리그웨더는 대답하며 손을 휘둘렀다. 가벼운 마법 행사다.

드르륵.

문이 저절로 열리고, 교무처장 구용천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그는 한 아름이나 되는 보고서 더미를 안고 있었다.

“간밤에 도착한 보고 목록입니다. 중요가 둘. 긴급이 둘 있습니다.”

“흐음… 아침부터 다망하군요.”

리그웨더가 푸른 눈에 살짝 이채를 띠었다.

천무학관은 중원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조직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것은 교무부장 이중구나 천무학관의 실무진이 처리한다.

‘중요’나 ‘긴급’의 등급으로 전해지는 보고는, 골드 드래곤 본인이 직접 나서거나 판단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정말로 큰일의 조짐이 있는 사건들이다.

파락.

“…이게 정말인가요? 몬스터 테이밍?”

그렇게 받은 보고서는 첫 장부터 리그웨더가 탄성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그렇습니다.”

“하아…….”

오가장. 달리 사천 제일상단이라 불린 이들. 그들이 천무학관에 보낸 서신의 내용은, 놀랍게도 비행형 몬스터 사육 성공 보고와 그에 대한 향후 협조 요청이었다.

리그웨더는 빠르게 보고서를 읽어 본 후 요점을 파악했다.

“그리핀이라… 이제껏 없었던 공중기병이 탄생하겠군요.”

공중 고속 침투군. 약칭 공군.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재빠르게 이탈하는 새로운 군대다.

제대로 갖춰진다면,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고 적에게는 일방적으로 출혈을 강요하는 비대칭전력의 등장이다.

“이거라면 획기적인 전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핀에 마법사나 화경 이상의 고수들을 기수로 태우면, 강기나 광역 마법으로 적군이 있는 일대를 통째로 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구용천의 말에 리그웨더가 고개 저었다.

“아니, 그들은 너무 고급 화력이에요. 기존의 지상군으로 운용해도 모자람이 없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리그웨더는 이 전략의 규모를 더 크게 보고 있었다.

구용천은 끽해야 열, 그 정도의 숫자를 생각하나 본데, 백, 천, 그 이상의 숫자를 갖출 수 있게 되면 어떨까.

“폭약, 화염탄… 그런 것으로 무장하면 일류 무인 수준으로도 충분히 위력을 낼 수 있을 거예요. 특히, 대오크 전선에서 카운터 병력으로 활용 가능할 테니.”

몬스터 군단 중에서 특히 그린스킨. 오크, 트롤, 오거 등의 군단.

생명체이면서 몬스터인 그들은, 리치왕 휘하 군단의 4할에 달한다.

숫자도 숫자이지만, 특히 놈들은 약탈과 기습 등 기초적인 전략 전술을 이해하고 있기에, 인간 군단의 방어선 유지에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런 반면, 놈들은 지상 화력은 막강하되 공중을 요격할 능력은 없다. 끽해야 투창, 활, 바위 정도를 날릴 뿐. 주술사만 주의하면 요격 수단은 없다시피 할 테니까.

“으음. 요는 예산과 시간이군요. 이건 회의 안건으로 부쳐야 하겠습니다.”

팔락. 사라락.

구용천이 보고서 뭉치의 한 부분을 따로 덜어서 치운다. 다음 보고서를 읽은 리그웨더의 눈이 살풋 찌푸려졌다.

“탐색자들의 보고로군요. 절강성으로… 해양 몬스터가 침입해 온다?”

탐색자. 혹은 순찰자.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이들로, 좋은 음식과 대우를 마다하고 풍찬노숙을 이어 가며 몬스터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전사들.

주로 친지나 가족을 몬스터에게 잃은 이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로, 그들은 적지를 순찰하며 중소 규모 기습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동향을 감시하며, 때때로 중요한 정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처럼.

“근래 들어 해변 인근만이 아니라, 강을 통해 내륙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흐음…….”

해양 몬스터.

주로 씨 서펜트 같은 대형 몬스터나, 머맨, 머메이드 같은 어인 계열 몬스터들로, 이제껏 중원에서 이들에 대한 방비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이들은 기존의 적과 다르다. 물에서 사는 몬스터들은 육지를 대규모로 침공해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분탕질을 쳐 놓고도 다시 물로 돌아가면 인간들로서는 추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넓은 바다. 들어가면 숨이 막히는 해저 어디에 녀석들의 둥지가 있는지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서 사는 것이 유일하면서 효과적인 방비였는데… 그랬던 전선이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바로 수륙양용이 가능한 몬스터의 등장이었다.

“나가(Naga)라니…….”

상체는 인간. 하체는 뱀이나 물고기의 것을 지닌 몬스터.

기본적으로 호전적이기는 하나, 딱히 인육에 맛을 들이지 않는 몬스터이기에 이제까지 굳이 큰 방비가 필요 없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무슨 일인지, 놈들이 강을 통해 육지로 들이치기 시작했다는 것.

“연유가 무엇일까요? 이제껏 잠잠하던 녀석들이…….”

구용천의 얼굴에는 우려가 서렸다.

장강이라 불리는 거대한 강은, 중원의 평야를 강북과 강남으로 가른다.

이 크고 너른 강은 사천까지 이어져 있다. 수많은 지류와 수원까지 합하게 되면, 보고가 올라온 절강성은 말할 것도 없고, 중원 전역에 이제까지 준동하지 않았던 해양 몬스터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류에게 대단히 큰 위협이었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정복이라든가, 아니면 새로운 영토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리그웨더는 경우의 수를 살폈다.

나가는 오크나 트롤 같은 그린스킨 쪽 몬스터가 아니다. 그들은 굳이 분류하자면,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 지성체다.

당장 인간과 다툼이 잦기에 몬스터로 분류되기는 하나, 그건 물을 함부로 오염시키는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 때문.

우선은 말이 통할 수 있기에, 조건만 맞는다면 적당한 ‘평화 협정’이나 ‘조약’도 가능하다.

“무조건 적대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우선은 중립으로 생각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또한 회의 안건이군요. 그럼…….”

팔락. 스르륵.

구용천의 손이 또 한 무더기의 서류를 옆으로 옮긴다. 리그웨더는 다음 보고서를 집어 들고 얼굴이 굳었다. 이번에는 사안이 심각했던 까닭이다.

“대규모… 인신 공양?”

“예, 역시 탐색자들의 보고입니다.”

구용천의 얼굴도 흐려졌다.

인신 공양.

생명을, 특히 인간을 도륙하거나 태워 죽여서 번제를 지내는 것.

주로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들이 벌이는 의식이며, 놈들은 이 의식을 통해 상급자에게 바친 제물만큼 본인들의 힘을 강화한다.

문제라면, 지금 이 중원에서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들이 제물을 바칠 대상이라면… 리치왕.

대격변을 불러온 재앙 중의 재앙이라는 것.

“…부활의 날을 앞당기기라도 할 생각일까. 아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 아닐 텐데…….”

리그웨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격변의 날 이후 144년. 그건 완전수 12의 제곱이다.

리치왕이 굳이 저 긴 세월을 동면할 이유는 많지 않았다. 그는 분명 이 차원에서 누군가와 격한 전투를 벌였고, 그렇게 소모한 만큼의 힘을 보충해야 했을 것이다.

‘대체 누구일까.’

거기다 동시에 한 차원 더 큰 힘을 손에 넣으려고 웅크렸을 터.

그것을 이제 와서 깨뜨린다고? 상리에 맞지 않았다. 지금 인신 공양을 해 봐야 리치왕이 부활하는 시기를 고작 몇 년 앞당길 수 있을 뿐, 오히려 그로 인해 그의 초월만 불완전해질 테니까.

“설마… 아니겠지…….”

문득, 거기서 리그웨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교무처장 구용천이 놀랄 정도였다.

“왜 그러십니까. 학과장님?”

“아니, 아니에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리그웨더.

그럴 리는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희망과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그녀의 뇌리를 자극했다.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그냥 대파국이 되고 말 테니까. 골드 드래곤인 그녀로서도,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다음 내용은… 이런.”

리그웨더는 남은 보고서를 읽다 말고 탄식했다.

그렇지 않아도 왜 이렇게 소식이 늦나 했던 필드 레이드. 그쪽에서 뒤늦게 날아온 비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유장위. 변심.

-필드 레이드 공격대를 무단으로 운용, 자신의 사욕을 챙김. 이제껏 고의적으로 보고를 지연시키고, 여러 변명을 하여 왔으나, 경지가 경지인지라 사태 파악이 늦음.

-해당 사건에 책임을 지고 징계를…….

“회의를 소집시켜 주세요. 지금 바로.”

리그웨더가 긴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다시 구용천에게 건넸다.

파락. 스르륵.

가져온 보고서 더미를 한곳에 모은 교무처장이 씁쓸히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침부터 꽤 바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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