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새로운 징조 (4)
치이익. 치이이익.
고기가 익으며 기름이 떨어진다.
화르륵. 타닥. 탁.
떨어진 기름을 받아먹고 불은 더욱 덩치를 늘렸다.
지직. 지지직.
흑객은 고기를 모닥불 위로 이리저리 흔들어, 연기가 스며들게 했다.
매의 고기는 맹금류라 누린내가 강해서, 차라리 이렇게 연기를 쐬게 해 불맛으로 덮어 버려야 먹을 만해지기 때문이다.
찌이익. 우물우물.
청둥오리를 한입 베어 물고 맛을 보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냐?”
“…예?”
“뭐 잘못한 게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그런 시금떨떨한 얼굴을 하고선. 눈치 그만 보고 얼른 말해.”
따악.
누린내 나는 매 고기를 먹던 흑객의 얼굴이 굳었다.
실제로 그는 천마의 말처럼 눈치를 보고 있었다. 딱히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아도… 말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예… 교주님, 흡혈귀라는 게 들통났습니다.”
“흐음?”
우물우물.
고기를 뜯으며 천마가 무신경하게 소리를 냈다.
더 말해 보라는 것처럼.
“상황이 다급했습니다. 유장위가 별도의 파티를 구성했는데, 그중 하나로 저를 콕 집어 지목했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던 흑객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유장위가 주도한 위력정찰.
직접 가서 목도하게 된, 어둠나무의 실체와 그걸 보호하고 있던 수많은 벌레의 무리들.
그리고 가볍게 전력을 탐색해 보려다가, 거꾸로 당해 버리고 만 천무학관의 교관들.
그들을 버림 패로 던져 준 다음 어둠나무의 본체에 돌격한 유장위.
뒤이어 나타난 차원 간 게이트. 게이트 건너편에서 이쪽 차원을 침공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역병의 대군주 바알제불.
그리고 놈과 앙숙인 블라드 체페슈의 등장.
필드 보스인 고룡 쉐이크는, 이미 바알제불에게 거의 잠식되어 있었다. 어둠나무와 동화된 차원 간 게이트가 타격을 받자 즉각 정찰대를 찾아왔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생명이 위중해진 화경의 고수 둘, 거기에 무력은 거의 없는 마법사들이 셋.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고룡 쉐이크는, 산처럼 거대한 놈이었다. 도무지 탈출이 불가능해진 상황.
그래서 흑객은 두 교관을 물어서 흡혈귀로 만들어, 빈사 상태에서 회복시켰다. 그 덕에 겨우 몸을 빼냈지만… 대신에 은밀하게 뒷수습하기란 불가능해졌다.
교관 둘의 입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피의 권능으로 흑객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흑객이 흡혈귀임을 알게 된 마법사가 셋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유장위, 위력정찰을 주도했던 정찰대의 리더가 실종되었다. 이 판국에 이들을 다 물어서 종속으로 삼자니, 분명 무언가 꼬투리가 잡히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있는 대로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흑객의 이야기가 모두 나오기까지는 거의 반시진 가까이 걸렸다. 그걸 모두 들은 천마의 반응은 단출했다.
“꽤나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이래저래.”
“예…….”
“하지만 어째 변명처럼 들린다만?”
우물우물. 툭. 데구르륵.
입에서 청둥오리의 뼈를 발라내어 뱉는 천마. 그 앞에 흑객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변명이 맞습니다. 어쩔 수 없이라고 했지만, 제가 제 정체를 드러낸 것은 누구의 강요도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화경의 고수 둘을 본 교의 전력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고 생각하여…….”
“아니, 흑객. 나는 지금 네가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말이 길어지는 것을 끊고, 천마는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손을 스윽, 옷에 문질러 닦았다.
“책하는 게 아니다. 지금 네 태도는 천마신교의 태도가 아니야. 좀 더 당당해져라. 우리는 그래도 된다.”
“……!”
“하고 싶어서 했다. 혹은 하기 싫은데 했다. 둘 중 하나지. 계산해 보니 이게 기회였다? 그런 태도는 변명이고 쓸데없다는 거다. 모름지기, 천마신교는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은 약자가 하는 것이다. 눈치 보는 자가 하는 것이다.
강자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리되었다. 이리 했다. 라고 말할 뿐이다. 적어도 천마는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몰라도, 그의 전생에서 천마신교는 그렇게 행동해 왔다. 비록, 그런 독단과 독선으로 어떤 오해를 사더라도.
그것이 강자의 권한이고 특권이다.
“흑객, 신교가 마교의 이름을 감내하면서 힘을 추구한 까닭이 뭐인 것 같으냐.”
“…….”
“강자에게는 권리가 있다. 그래서 기나긴 수련과 죽음을 건 생사투를 스스로 하는 거지. 힘이 곧 정의고 명분이다. 이유다. 그 정도 특권이 없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강자가 되려고 할까.”
꾸욱.
흑객의 다문 입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그에게 천마가 다시 물었다.
“변명은 약자가 하는 것이다. 흑객, 우리 천마신교가 어디 약자였더냐?”
“아닙니다. 교주님.”
스윽.
고개를 든 흑객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천마와 마주친 그는 곧 다시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저… 저 때문에 교주님의 유희에 차질이 생긴 듯하여…….”
“유희라… 그래, 그렇지. 한동안 재미나게 놀고 있었으니까.”
천마는 끄덕였다.
유장위든 누구든, 이번 일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건 상관없었다. 복잡하게 꼬인 가닥을 잡아 가다 보면 결국 다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흑객과 천마신교의 재흥은 얽혀 있었고, 그들과 함께 움직인 천마 역시 드러나게 될 터.
“…반년인가.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들통났군. 그간 그렇게 열심히 숨기려고 했었는데 말이지.”
“…….”
“응? 뭐야. 내가 잘못 말했나?”
“…아닙니다.”
잘못 말한 게 아니라 잘못 생각했다. 그간 천마가 학관생활을 하며 일으킨 돌출 행동들. 그게 어디가 신분을 숨긴 생활이었나 하고 항의하고 싶었던 흑객이었다.
물론 그는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지는 않았다. 탈마고 뭐고 상관없이, 천마는 교주다. 그런 말을 하는 건 바보짓이다. 날아오는 주먹질 때문이 아니라.
‘…뭐라고 해도 들어 먹지를 않으실 테니.’
애초에 쓸모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과연, 천마는 곧 관심을 접고 다른 것에 생각을 돌렸다.
“그래서, 유장위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예. 마각이 드러난 게 수치스러웠는지…….”
“아니, 아닐 거다. 현경의 고수는 그런 이유로 몸을 숨기지 않아. 녀석이라면 충분히 해명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천마는 그 말을 듣고 고개 저었다.
“해명… 이라고 하시면.”
“그냥 있는 대로. 벌레들이 딴눈을 팔게 만들어서 공격해 오는 순간 강력한 일격으로 본체를 두들길 생각이었다고. 교관들의 버림 패로 쓴 것 같긴 하지만, 저 자신도 실은 목숨이 위태로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끝이다.
유장위는 무인이다. 어차피 치료사도 성직자도 아닌데, 본인 목숨을 걸고 굳이 감염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무인의 삶이란 칼끝 위에 선 것. 언제 어디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버림 패로 죽을 뻔한 교관들의 기분이야 상했겠지만, 뭐, 그래서 어쩌라고?
“현경의 무인이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치야.”
애초에 유장위는 물론이고, 천마 본인도 여차하면 남을 버림 패로 쓰고 자신이 살아남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남의 버림 패로 내던져진 경험 같은 건, 수십 번은 넘게 겪었으니까.
“그럼… 교주께서는 왜 그가 잠적했다고 보십니까?”
“글쎄다. 경지의 완숙도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현경에 오른 지는 제법 되었다고 들었지. 아마도. 어디까지나 아마도이지만…….”
천마는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솨아아아.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물보라가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일부러 풍경이 좋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천마는 폭포를 가리켰다.
“저게 보이느냐?”
“폭포를 말씀하신다면…….”
“폭포 말고.”
“…무지개 말입니까?”
“그래. 너한테는 그게 다이겠지. 아는 만큼 보이고, 능력만큼 보이는 거니까.”
천마는 흐릿하게 웃었다. 딱히 흑객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그에게는 저 무지개의 정체와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물방울, 습기, 그리고 거기에 비쳐드는 햇살.
수많은 빛무리가 갈라져서 밝게 보이는 현상. 약간의 바람과 빛무리에 이끌린 자잘한 날벌레들의 움직임까지.
그것이 지금 천마가 보고 있는 작은 세계였다.
“아마도. 어디까지나 아마도이긴 하지만… 본 게 아닌가 싶다.”
천마는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흑객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자연.”
“……?”
흑객은 선문답 같은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도, 천마는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조금 더 입을 열어 주었다.
“자연은 무인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다. 하염없이 높고 넓게 뻗은 푸르른 창공을 보고, 남궁세가는 창궁무애검을 만들었지. 그리고 청성파는 저녁 노을과 함께 져 가는 해를 보고 사일검법이라는 검초를 만들었다.”
차원 간 게이트.
두 차원이 간섭을 일으키며 서로 상쇄되는 순간 일어나는 끔찍한 충격.
그건 버섯구름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천마는 그걸 정통으로 맞으며 겪었다.
이것이 바로 자연. 그 안에 깃든 힘이라고.
“극마는 마를 이겨 냄이고, 탈마는 그 마를 완전히 벗어 냄이다. 흑객, 너도 이즈음엔 알겠지? 같은 극마니 탈마니 하는 경지 안에도 많은 단계가 있다는 걸.”
“예.”
흑객이 즉각 끄덕였다. 요즘 들어 한 차원 깊게 느끼고 있는 현상이었기에.
강호에서 보통 무인의 경지를 나눌 때는 삼류-이류-일류로 부른다. 그 위를 절정. 또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을 초절정이니 초월이니 하고 말한다.
“극마와 탈마에 각각 단계가 몇이나 있는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화경은 그 모든 것을 통달한 조화의 단계이며, 현경은 그조차 넘어선 아득히 먼 하늘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다.
예전에는 초입-숙련-절정으로 쉽게 말할 수 있었지만, 본인이 경지에 오르고 나니, 흑객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따지기가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당장 극마만 해도, 이제껏 자신이 겪은 것은 최소 다섯 단계는 지난 것 같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라, 지금의 흑객은 처음 극마에 오를 때보다 최소 다섯 배 이상 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탈마에 가까운가? 그건 아니었다.
“가면 갈수록 아득하기만 합니다. 앞으로 몇이나 되는 벽을 더 넘어야 할지도 알 수 없고요.”
올라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극마나 탈마의 길은, 삼류-이류-일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멀고 높은 길이라는 것을.
오히려 무인으로서의 시작은 극마-화경에서부터가 진정한 출발이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학관에서, 화경급 고수를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럼 한번 반문해 보거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화경이니 현경이니 하고, 서로 역량 차가 다른 무인들을 한데 묶는 것 같으냐?”
천외천. 하늘 위의 하늘을 논하는 천마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하고 어딘가 경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흑객은 진중한 그의 얼굴을 보며 길게 장탄식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아, 새끼. 생각 좀 하고 대답을 해라. 그냥 척수반사로 말하지 말고.”
“…….”
뭔가 와장창, 하고 박살 나는 기분이 들어 흑객은 좀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 좀 더 점잖게 말씀 좀 하시지. 기껏 경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계시다가 쌍욕이 뭔가.
“음, 큼. 교주님, 제가 우둔하여 더 짚을 곳이 없습니다.”
왜 구 층으로도 모자랄 단계들을 싸잡아서 하나로 묶는 것인지. 분명히 서로 다른 경지인데 대충 하나로 퉁치고 있는지. 이건 세상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
그런데 거기서, 무언가가 흑객의 머리를 스쳤다.
“하, 그래. 아주 멍청하지는 않다니까.”
천마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고는 경악으로 물든 흑객에게 가볍게 일러 주었다.
“그건 일단 접어든 이상, 어느 순간 그 경지를 돌파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고 유장위도.”
탈마에 올라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고찰을 가진 천마도.
그리고 현경에 올라선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인 유장위도. 진짜 자연력을 몸으로 느끼고, 어떤 종류의 힘인지 궁구하다 보면 그 끝에 닿을 수 있다.
그렇기에 화경은 그 안에 9층의 단계가 있음에도 화경으로 뭉뚱그려지고, 현경 또한 마찬가지.
“설마… 설마…….”
“슬슬 일어나자. 우릴 보고 싶어 하는 녀석이 왔네.”
툭툭. 바지직.
천마는 모닥불을 발로 비벼서 껐다. 멀리서.
“…2학년 3반 이한. 4학년 4반 흑객.”
체육학 교두 뇌천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