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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48화 (249/310)

248화. 새로운 징조 (5)

주둔지의 지휘통제실은 분위기가 무거웠다.

잔뜩 긴장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흑객과 천마 두 사람은 장막을 들추고 들어갔다.

팔락.

“……!”

주우욱 하고 몰려드는 시선들에 흑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레이드에 참여한 교두와 교관들, 전원이 다 모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자신을 주시하는 수십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긴장하게 된다.

심지어.

‘전원이 화경. 그중에서도 숙련 이상의 경지…….’

“우우와~~ 바글바글하게도 모였네. 이거.”

물론 천마는 그런 어지간한 사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와, 뭐가 이리 많아’ 하며 피식피식 하는 정도. 덕분에 흑객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교주.’

평소라면 뻔뻔하다거나 눈치 없다고 투덜거렸겠지만, 무신경함도 이쯤 되면 능력이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그는 마교 교주.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과 경외를 받았던 몸이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게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매사에 제멋대로 굴고 기분이 들쭉날쭉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애초에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우우웅.

‘음?’

갑자기, 벌이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이한 느낌이 뒷골을 울렸다.

소름? 그것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불편한 시선 같은?

“으윽… 컥! 끄으윽…….”

그리고 갑자기 교관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격하게 몸을 떨었다. 사레라도 들렸나, 하고 생각했는데 왈칵 하고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눈에서.

“엇…….”

“저런 저런. 그러게 괜히 훔쳐보다가 다치지.”

끌끌끌.

이게 무슨 일인가 하던 흑객은, 곧 천마가 혀를 차는 것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아마도 어설프게 뭔가 탐지 같은 걸 걸다가, 천마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상이라도 입은 것일 터.

“실례. 나쁜 뜻은 없었으니 노하지는 마셨으면 하오.”

펄럭.

교두들 특유의 천무(天武)가 적힌,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다가온다.

‘제운비…….’

흑객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천무학관 제2의 고수를 보고.

저벅저벅.

제운비는 마치 싸움이라도 걸듯이 다가온 다음 천마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탈마의 고수를 만나게 되어. 이 제모의 영광이오. 불편한 자리에 모시게 되어 죄송하오이다.”

…꿀꺽!

정중한 제운비의 인사에, 흑객은 침을 삼켰다.

‘다… 들통났다.’

대외적으로 흑객은 천무학관 4학년생.

그리고 천마는 고작 2학년이다.

제운비는 화경에 이른 교두. 그것도 대외적으로 검성이라 불리는 위치다.

그런 그가 읍을 하며 먼저 인사를 한다는 건.

“…와, 놀라운데.”

이미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 생각하는 흑객의 앞에서 천마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탈마의 고수라고? 현경이 아니라?”

“……?”

묘한 곳에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천마였다. 그런 그에게 제운비가 다시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방향이 다르고 길이 다른데, 함부로 부르는 것은 폄하. 그리 배웠소이다. 혹 잘못인지?”

“하하, 아니야, 아니야.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불려 보는구나 싶어서.”

탈마와 현경.

대략 같은 경지라고 말하지만, 애초에 마공과 정종무공은 가는 길이 다르다.

얼추 비슷하다고 해서 그냥저냥 부르는 건, 검과 도를 구분하지 못하고, 왜인(倭人)과 한인(漢人)이 뭐가 다른지 모르는 것과 같다.

당연히 큰 무례다. ‘현경’이 아니라 ‘탈마’의 고수라고 말해야 존중이다. 상대를 알려고 드는 노력도 하지 않는 이가 무슨 존중을 할 수 있겠는가.

‘세월이 지나서 좋아진 것이 많구만.’

달리 말해, 천마로서는 오랜만에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예의.

정도 문파에서 가장 많이 따지는 것이다. 맹자 가라사대, 사람이 예의가 없으면 금수와도 같다 했다. 하지만 정작 천마가 그 예의를 받아 본 경험은 손에 꼽았다.

‘마교’를 보면 거품을 물고 부모 안부부터 물어 오던 이들. 말 표현은 정중하게 하지만 독설과 이죽거림으로 대하는 이들.

그게 천마가 아는 정도 문파였다.

비틀린 선입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적어도 천마가 경험하기로는 그랬는데.

“음… 크흠.”

“아, 실례.”

너무 감회에 빠졌던 걸까. 답례를 잊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출 줄 아니, 일파의 지존이라 해도 자신 또한 예의를 다함이 옳다.

펄럭. 탁.

“천마신교 23대 교주 구옥경.”

140년 만에 마교의 교주는 정식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가 포권을 취하는 자세는 다소 특이했다. 소매를 크게 휘두르고, 주먹을 댄 손은 손가락을 모두 뻗쳐 불꽃의 모양을 만든다.

“천무학관의 검성을 뵈어 영광이다.”

그리고 살짝 기세를 흘려 보냈다.

푸---확!

발치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와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불길하고 위험한 기운에, 정도 문파의 맥을 이은 교관들 대부분이 얼어붙었다.

“이… 이건…….”

“흑마력……? 아니, 조금 다른데…….”

살벌하고 위험한 기운. 목덜미에 칼이 겨눠지는 것 같은 흉악함. 하지만 탁하지는 않다.

사령술을 기초로 뻗어 나오는 흑마력은, 그 특유의 끈적끈적한 느낌이 있다. 썩은 생선처럼, 찐득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악취 같은.

훅. 화아아악!

하지만 지금의 현경-아니, 탈마의 고수가 흘리는 기운은, 지독하지만 가시고 나니 뭔가 말끔한 느낌이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린 교관들은, 뒤늦게 제 목이 붙어 있는 것을 실감하고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벅저벅. 털썩.

천마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장 상석.

상황판을 정면으로 보는, 눈치가 없는 이가 아니라면 앉지 않을 자리에.

“음…….”

“으흠…….”

당연히 교두고 교관이고, 제법 많은 사람들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탁탁.

“콧김 뿜지 말고 앉지, 다들? 되도 않는 기 싸움 같은 거 벌이지 말자고. 진짜 치고받고 할 것도 아니면서.”

“…….”

“…….”

일파의 종주라고는 너무 채신머리없는 경박함.

하지만 자연스럽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흥미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오만함과는 다른 종류의 절대적인 자신감.

흑객은 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

천마신교의 교주.

전율이었다.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어릴 적에 꿈으로만 그렸던 절대자의 모습.

꿈에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된 교주는.

울컥!

까닭 모를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큼. 흠. 으흠!”

갑자기 감상적이 된 흑객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오래도록 기다려 온 본 교의 구원자는.

“아, 그리고 그 밥건인가 하는 거도 좀 가져오고.”

“…밥건?”

그런 이름의 영약이 있던가, 하고 제운비가 고뇌할 때, 흑객은 피시식 웃음을 흘렸다.

“아, 팝콘 말씀입니다. 옥수수를 우지(버터)에 튀긴 것요.”

“아… 아아아.”

여러모로 흑객 자신의 보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 * *

“…그래서 고룡 쉐이크는…….”

탁. 탁. 탁.

상황은 기묘했다. 제운비, 천무학관의 자타공인의 2인자가 손수 지시봉을 들고 브리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목상으론 학관의 모든 교두와 교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다들 알고 있었다.

이 브리핑의 목적은 학관생으로 위장한 이한-알고 보니 정체를 숨긴 현경급 고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는 걸.

“으음… 끄응…….”

“자네, 괜찮나?”

“이제 좀 낫네… 후우… 안구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교관이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닦았다. 눈가에 아직 핏자국이 남은 그는 영술사. 마법의 계통이 아닌, 술법으로 영혼의 궤적을 볼 수 있는 이였다.

2학년 학관생 이한이, 정말 제기된 의혹처럼 영혼이 덧씌워진 인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모산파의 진전을 이은 교관이다.

“그래서… 확실한 게지?”

“사람하곤. 내 꼴을 보고도 아직 의심이 되나?”

“하긴…….”

모산파는 과거 중소 문파 반열에나 겨우 이름을 올린 문파다. 그만큼 무위가 약하고 절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도통(道統)이나 술수라는 방면에선 무당보다 더 위로 쳐 주기까지 하던 독보적이던 문파. 그게 모산파다.

재능이 없으면 입문조차 못 한다. 어느 무인이건, 대성하기 위해서는 재능이 있어야 하지만, 모산파의 관문은 아예 궤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영매의 자질이 있어야 하고, 여러 번의 중첩된 악운(惡運)이 있어야 한다. 왜 악운이냐면… 애초에 사람이 귀신의 일과 관계되는 것을 좋게 여길 수가 없어서다.

“가끔 손가락이나 팔이 잘린 것을 잘 갈무리해서 다시 붙는 경우가 있지 않나?”

“드물지만 그렇지.”

“나는 무슨 잘린 목이 다시 붙은 걸 보는 기분이더군. 둘 다 괴물이야…….”

“허, 세상에.”

그 모산파의 술수에 대성하여, 천무학관의 교관까지 된 이다. 영혼이 뒤바뀐다거나, 이상한 괴이(怪異)가 스며든 것을 가장 확실히 판별할 수 있는 인물.

그런 그가 영안을 열자마자 눈알이 터질 뻔한 부상을 입었으니, 천마-이한이 보통 사람이 아님은 그 순간에 바로 증명이 된 셈이었다.

“하나는 흡혈귀에 씌었고, 또 하나는 귀신이 남의 몸을 뒤집어썼고… 정말이지 저놈의 마교라는 곳은 아주 사마외도 천지라니까…….”

“흠, 흠. 여보게.”

투덜대는 교관에게 영술사가 다급히 어깨를 두드렸다. 주의를 받은 교관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번뜩.

우연인가. 아니면 들은 것인가. 상석에 앉은 천마의 눈과 마주쳤다. 일순, 지옥의 아가리를 들여다본 듯한 기분에 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 * *

“그래서… 구옥경 님?”

“아.”

시답잖은 뒷방 늙은이를 닥치게 하느라 잠시 내용을 놓쳤다. 천마는 한 손을 들어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 잠시 딴생각했어. 무슨 말이었지?”

“…위력 정찰의 결과와 현 상태의 전략 목표 재검토입니다.”

제운비가 조금 불편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표정을 되돌렸다. 천마는 반쯤 흘려들었던 내용을 되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억이 났다.

“음… 그래, 그랬지.”

어둠나무.

이번 레이드의 전략 목표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필드 보스인 고룡 쉐이크의 퇴치도 중요했지만, 아직 3그루의 어둠나무가 남아 있다.

녀석들이 파괴한 어둠나무와 같은 기능을 한다면.

차원 간 게이트. 굴혈이 아직 셋이나 남아 있는 셈이다.

“사실이라면 반드시 파괴해야 합니다. 게이트는 계속해서 몬스터를 토해 낼 테고, 심지어 그 게이트를 통해 마계의 바알이라는 놈이 간섭해 온다고 하니까요.”

“알아들었어. 문제는 파괴해도 뒷감당이 쉽지 않다는 거지.”

“예.”

천마의 말에 제운비가 끄덕였다.

차원 간 게이트의 소멸.

그건 자칫하면 막대한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공간과 공간이 겹쳐지는 순간, 물질은 그 질량만큼의 에너지를 발생시킨다고.

유장위의 경우에는 어찌 운 좋게 게이트가 닫혔지만, 정작 천마가 소멸시켰던 굴혈은, 버섯구름을 일으킬 정도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음…….”

그 위력은 탈마의 중간 이상으로 올라온 천마. 그의 호신강기를 파괴할 정도였다.

뭐, 그때는 다소 방심했던 탓이라 충격을 크게 받았고, 이번에는 알고 들어가는 거니 그렇게 피떡이 되지는 않겠지만…….

“아… 찝찝한데. 하나 묻자. 제운비.”

“말씀하십시오.”

“너네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냐?”

자꾸만 애매하게 남은 잡념이 사고를 방해했다. 천마는 자신의 옹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대인배가 아닌 주제에 대인배인 척하는 것보다 불편한 게 없는 법.

“마치 내가 원래 상관인 것처럼. 내 무위나 이력이나,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을 거 아냐. 그런데 너무 협력적이라서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

“…….”

“말해 봐. 누가 내 말 잘 들으라고 이야기하기라도 했어? 절대 거스르지 말라고? 그런…….”

“예. 그렇습니다.”

“…어?”

제운비의 대답에, 천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펄럭.

그런 그에게 제운비는 서신 하나를 펼쳐 보였다. 다른 것 없이 유독 붉게 쓰인 한 줄이 확 눈에 들어왔다.

-적극 협력할 것. 최대한의 예를 갖출 것. 본인에게 하는 만큼의 태도를 보일 것.

“학과장님의 지시 사항입니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 본인. 그걸 눈앞에서 보고.

“…아놔, 독박 쓰게 생겼네.”

천마는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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