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새로운 징조 (6)
-제운비 수석 교두의 말처럼, 그가 정말 탈마의 고수로 의심된다면 해법은 간단합니다.
-그에게 권력을 주십시오. 그가 권력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를 통해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리그웨더는 골드 드래곤. 지혜의 화신이라 불리는 종족이다.
지혜라는 말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저 고위급 마법을 잘 쓴다고 해서 지혜롭다는 말을 붙이지는 않는다. 강력한, 초월적인 등의 어마어마한 수식어는 들을지언정.
흔히 ‘지혜롭다’는 말을 들으려면 몇 가지가 가능해야 한다.
한발 앞서 생각할 줄 알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급함이 없어야 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리그웨더는 지혜롭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녀는 드래곤. 불멸에 가깝게 오래 사는 종족.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고, 수명 또한 길어 조급해할 일이 없었으니까.
-가능한 한 그를 성심성의껏, 학과장인 저를 대하듯 공손히 대우해 보십시오.
-겸손함은 진한 소금물과 같습니다. 그가 쭉정이라면 스스로의 가벼움으로 떠올라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가 알곡이라면, 권한 속에 벼려진 책임의 무게를 알고 성실히 임할 것입니다.
서찰을 처음 받았을 때, 제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는 한편 동시에 과연, 하고 무릎을 쳤다.
현 레이드 공격대의 전력은 천무학관 전체 전력의 절반가량.
중원의 중소 학관 전력보다 더 큰 전력이다. 클랜으로 치면 대형 클랜 서너 개의 연합.
이런 걸 휘두르라고 하면, 누구든 앞다투어 손을 들 것이다. 권력. 남에게 명령을 내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란 겉보기엔 참으로 달콤하다.
하지만 그런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제대로 된 인물은, 권력을 대할 때 그 과실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부터 먼저 보는 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천마 구옥경은 대단히 괴이한 인물이었다.
“너네 학과장 제정신이냐? 날 언제 봤다고 전권 대리인이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알자마자, 살벌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심지어 욕까지 마구 박았다.
“흐음…….”
그 격한 반응에 제운비는 턱을 쓰다듬었다.
가끔 이런 인물이 있기는 하다. 권력의 무게를 알고 꺼리는 인물이.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겉과 속이 다르거나, 혹은 시간이 지나면 변해 버린다. 당장 유장위만 해도, 초반에는 얼마나 조심스러웠던가.
리그웨더의 말처럼,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권력이 손에 쥐어져야 아는 법이다.
“구옥경 대협, 정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찌릿! 흠칫!
됩니다. 그 말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제운비는 움츠러들었다. 목덜미가 선뜩한 것이, 시퍼렇게 날 선 칼이 드리워진 듯했다.
“이 새끼가 장난치나? 주제 모르고 사람 떠보면 죽는다?”
“…….”
지독한 폭언. 하지만 반발은 꿈도 꾸지 못할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다. 진땀을 뻘뻘 흘린 제운비는, 목덜미가 따끔따끔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스윽.
손을 대어 보니 흐릿하게 붉은 자욱이 묻어 나온다. 피. 혈흔. 그에 제운비의 얼굴이 한 번 더 굳어졌다.
의기상인.
흔히 살기라 부르는, 상대를 해치거나 죽이려는 기운. 하지만 대충 절정 이상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활용법을 아는, 그런 것이 일반적인 살기다.
‘아무리 탈마라 한들 이런 게 가능한 것인가.’
한데 천마의 살기는 단순한 압박감이 아니었다. 방금 스치고 지나간 것은 명백하게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목에 드리워지는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로 예리한 무언가가, 형태가 없어야 할 기운이 형태를 지니고 그의 목 언저리를 긁은 것이다.
‘적어도 살기 하나는 유장위보다 더하군.’
그것도 화경의 경지에서 제법 숙련이 쌓인 자신에게.
정말이지 폭급함만큼은 마공이라는 이름에 어울린다고 제운비는 생각했다.
파라락! 파라라락!
반응이 격하다. 노기를 마구마구 뿜어내더니, 다음으로는 거칠게 서류철과 상황판을 연달아 보는 천마.
“설명 다시 해 봐. 어이, 거기 너.”
“나……? 아니… 저, 말씀입니까.”
콕 집어 부르자, 떨떠름한 얼굴로 교두 월산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 던전학과 교두라며? 이쪽 전문가 아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만능이 아냐. 보급이고 정찰이고 이런 운영이나 기획은 성질에 안 맞아. 머리 나쁜 나 대신 머리 좋은 전문가가 머리 좀 짜내 봐.”
“…….”
사실, 탈마의 고수가 머리가 나쁠 리가 없다. 최소한 세상의 이치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깨달은 초월자들이니까.
하지만 천마는 이런 귀찮은 일에 머리 쓰기를 싫어했다.
비교, 통계, 자료 분석, 효율 등을 따지는 일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기는 하되, 정신적으로 단순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흔히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 천마의 경우, 그 말은 반대로 적용되었다. 몸이 허약하니 머리가 고생한다? 같은.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리고 소견은 어떤지. 아는 대로 말해 봐. 시작!”
“어… 예.”
엉거주춤하게 선 교두 월산. 황망한지 한참을 눈을 꿈벅거리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학관생 수준으로. 너, 교두잖아? 나 같은 애들 가리키는 게 전문 아냐? 낙제생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괴상망측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월산 교두는, 나한테 왜 이러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자, 교편.”
휘익. 휘리릭.
커다란 지시봉. 그게 너울너울 떠올라서 월산 교두의 가슴께에서 멈췄다.
허공섭물. 여기 모인 이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기예.
하지만 대체 얼마나 내공이 심후한 것인지, 잔떨림 하나 없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고맙… 아니, 가, 감사합니다… 그럼…….”
월산 교두가 지시봉을 들고,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처음부터 설명한… 하, 하겠습니다. 이 지역, 어둠나무 지대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어둠나무가 있는데…….”
탁. 탁.
일단 본업에 들어가자 월산의 입에서 익숙하게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반 하대와 존대가 엉켜서 버벅대기는 해도 어쨌든,
‘나름 사람은 잘 다루는 인물이군.’
제운비는 두 사제(?)의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학관생 복을 입고 있는 천마. 그 앞에 선 초로의 교두 월산.
겉모습만 보면 일대일 보충 교습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나라면 못해 먹겠군.’
현경-탈마의 고수가 낙제생? 턱도 없는 소리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도 정도가 있다.
제운비는 천마 앞에서 검술 시연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상입니다. 음, 다음으로 현 상황을 제 소견으로 말씀드리기 전에… 잠시 한숨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셔.”
“감사합니다!”
벌컥벌컥!
반 시진 만에 십 년은 늙은 얼굴이 되어, 월산 교두가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보통의 수업과는 완전히 다른, 탈마의 고수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하는 것이 부담이 엄청났으리라.
반면 어떻게든 내용을 머리에 입력하려고 하면서 세상 싫다는 표정의 천마. 그런 그의 입에서 투덜거림이 잔뜩 쏟아졌다.
“아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진짜… 내 뭘 보고?”
‘그러게.’
이 말만큼은 제운비도 동의했다.
대체 리그웨더가 뭘 믿고 이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징조가 일고 있습니다. 종말의 날까지 앞으로 4년, 아니, 3년입니다.
-이 시기에 느닷없이 나타난 탈마의 고수라니. 어쩌면 이것은 인과. 이 세계의 의지일지도 모릅니다.
-리치왕에 의해 파괴된 어머니 대지가, 스스로를 수복하려 그에게 힘을 주어 대적자를 만드는 것일지도요…….
그는 새삼 서신의 뒤에 있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유장위. 그에 대한 대접이 유달리 후했던 것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는 현경의 고수였고,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레이드 공격대를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쥐고, 빠르게 비틀려 버린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번 인선만큼은 학과장님도 실수가 있구나’ 혹은 ‘유장위가 참 속내를 잘도 숨겼구나’ 하고 다들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어쩌면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계셨고. 그에 대한 대우라면…….’
들어맞는다.
구옥경이라는 인물은 마교, 애초에 망해 버린, 심하게 말하면 근본도 알 수 없는 조직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탈마의 고수인지도 모른다, 는 보고에 대뜸 레이드 공격대의 전권을 넘기는 기행(奇行). 리그웨더답지 않은 파격적인 조치에 당황도 했지만, 지금 떠오른 것처럼.
학과장은 예전부터 어떤 누군가가 나타날 것으로 예측했고, 그것이 천마 구옥경이라고, 그렇게 본 것이라면.
“…로 간다.”
‘이런.’
제운비는 당황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천마의 말을 놓쳤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방금 무슨 말이 나왔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
“…….”
“……?”
분위기가 이상했다. 자신처럼 말을 아예 못 들은 것이 아닐 텐데, 다른 교관들은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었다.
“어, 으흠…….”
제운비는 헛기침을 한 후, 결국 한 손을 들었다.
“송구합니다만, 방금 뭐라고 하신 건지?”
“뭘 못 들은 척하고 그래? 총. 력. 전. 이 말이 어려워?”
타앙.
천마가 짜증을 내며 찌익! 소리 나도록 주변을 노려보았다.
파라락. 타다닥.
서류철을 접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상황판을 노려 보는 천마.
그리고.
“한 방에. 찔끔찔끔 눈치 볼 것 없이. 바로 들이받는다. 지금 현 상황에 가용한 전력. 전부 동원해라.”
“…네?”
“하나 더 잡았다니까, 남은 건 셋이군?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여파가 가라앉기 전에 친다. 다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탁. 탁. 탁.
천마의 말과 함께 지시봉이 상황판의 어둠나무 셋을 두들긴다. 그 소리와 함께, 이제껏 얼어붙어 있던 교관 교두들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 구 대협!”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데없이 총력전이라니. 이 무슨……!”
“아, 시끄러워! 이 자식들아! 상황 파악 안 돼?!”
탕. 콰르릉!
지시봉이 땅에 쑤셔 박히더니 끔찍한 충격음이 일었다. 천마가 버럭 호통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네들. 현경이니 탈마니 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심한 괴물들인지 모르지?”
“……?”
“……?”
“알 리가 있나. 그래. 하. 광마다, 이건. 상황은 이미 삼파전이야. 서둘러야 한다고.”
더더욱 영문 모를 말이 나왔다. 교두고 교관이고 전부 혼란에 빠졌고, 제운비의 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
‘이건… 너무 지나친……!’
경지를 깡패 삼아 다 눌러 버리려는 폭거인가? 막 그렇게 생각했을 때.
“교주님, 광마라 하시면…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흑객. 천무학관의 4학년으로 있는, 흡혈귀가 깃든 화경의 고수가 바싹 나와서 말을 받았다.
“아… 그래, 맞아. 젠장, 내가 너무 급했군.”
그와 함께 한숨 푹 쉬며, 빠르게 열이 식는 천마 구옥경.
“흑객, 알아듣게 네가 설명해. 나는 성질 나서 못 해 먹겠다.”
그러고는 털썩, 자리에 주저 앉는 천마.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교관 교두들의 눈이 쏠리자.
“교주께서는 유장위, 그가 개입할 거라고 보고 계십니다.”
“…예?”
“무슨?”
난데없는 소리가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유장위라니. 갑자기 여기서 도망자가 왜?
“그는 자신의 과오가 들통이 나서, 부끄러워서 탈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윽.
흑객이 손을 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그는 지시봉을 잡고, 상황판의 또 다른 표적.
탁탁.
“현경 그 이상의 경지를 위해, 잡아먹을 존재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차원 간 게이트. 그걸 품고 있을 것들을. 우리는 그자보다 늦지 않게 서둘러 표적을 처리해야 합니다.”
다른 어둠나무들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