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50화 (251/310)

250화. 징조 (1)

자박. 자박. 자왁. 자왁.

가려 뽑은 이백여 명이 발을 맞추어 걷는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혼란스러움이 있었지만, 곧 박자가 맞기 시작한다.

자왁. 자왁. 착. 착.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무리가 하나되어 움직이는 소리는 두려움을 낮추고 사기를 올린다.

얼추 한 시진가량을 걷자, 멀리서 으스스한 느낌이 감돌기 시작한다. 어둠나무의 영역권에 접어든 것이다.

휘익.

천마가 손을 내젓자, 그 신호를 보고 교관들이 외친다.

“선두 제자리!”

“제자리에-! 섯!”

좍! 좍! 좍!

천무학관 3, 4학년이면 어지간한 절정 고수와 맞먹는다. 그 절정 고수가 2백이나 되면, 이는 유사 군대나 다름없다.

“휴식! 휴식! 산개해서 휴식을 취한다! 한 시진이다!”

“좌우 경계! 경계에 소홀하지 마라! 각 분대별로 방향을 정해 전 방위를 맡도록!”

그리고 그 유사 군대는, 아예 대놓고 군대의 방식을 따랐다. 명령이 하달되고, 각 조에서 번을 뽑아 경계를 차출 한다.

화르륵. 타닥. 탁.

얼마 후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연기들.

주둔지에서 가져온 땔감이나 목재 부스러기로, 곳곳에 모닥불이 지펴진다. 식사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휴식 때는 다들 무언가를 만들어 먹게 마련.

후르륵. 후르르륵.

피운 불에 뜨겁게 물을 데워 마시고, 몇몇은 국이나 차를 만들어 배 속으로 열기를 부어 넣는다.

“이건 좀 의외로군. 마교 교주라는 이는 행군에도 제법 경험이 있나 봅니다.”

몬스터학 교두 하청청의 말에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예상 밖입니다.”

군대나 병단을 운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행군이다. 전투는 막말로 어찌어찌 비비면 된다.

장수가 완전히 졸장이거나, 군병이 아주 잡병이 아닌 이상, 적을 앞에 두게 되면 살벌한 긴장 끝에 누군가가 달려들고, 자연히 싸움이 일어난다.

유달리 손자 예찬에 빠진 유장위가 아니더라도, 천무학관의 교두 교관들 역시 ‘이겨 놓고 싸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충분한 준비. 전투 의지의 지속.

그리고 휴식과 체력 안배.

이 세 가지만 잘 수행해도 명장 소리를 듣는다.

거꾸로 말하면, 이 기본적인 세 가지를 수행하기도 힘든 것이 군대의 운용이다.

“겸손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 아, 하하. 확실히 그렇지요. 정말…….”

뜬금없는 제운비의 말에, 월산이 웃는다.

주어가 빠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너무도 뻔했다.

“보급이나 정찰 같은 운용은 자신 없다고 하더니 말이오.”

쉬익. 쉭. 쉬쉭.

지휘부에서 경장 차림으로 뻗어 나가는 고수들.

화경 이하 초절정의 교관들이다. 각기 무인과 마법사, 혹은 무인과 사제 등으로 짝을 맞춰서 주변을 시찰한다.

하지만 거리만 적당히 유지하고, 그들이 살피는 방향은 대열의 바깥이 아닌 안쪽이었다.

또라이 불변의 법칙이라던가. 사람 백을 모아 놓으면 반드시 그중 스무명은 제정신이 아닌 놈이 나온다. 사람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정신 나간 놈들의 일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열 내외의 분대 단위로 움직일때는 다들 조심을 하지만, 숫자가 수십 수백이 되면 평시와 달리 미친 짓을 하는 이들이 나오는 법이다.

야외로 나오니, 갑자기 눌려 왔던 야생 본능이 솟구치기라도 한 것일까. 되도 않게 큰 나무에다 영역 표시(?)를 하던 학관생들.

“야! 거기! 너희들 뭐 하고 있어!”

“지금은 전시다! 용변은 지정된 위치에서 본다! 어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마!”

그들이 지적을 받고는 ‘어마, 뜨거라’ 하며 대열로 돌아간다.

“헉! 들어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어우. 젠장.”

타다닥! 휘이익!

그런 난리 통에 네 사람. 유독 낯빛이 창백하고, 눈이 붉은 이들이 멀리멀리 달려 나간다. 제운비는 그들의 행색을 보고 불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흡혈귀… 라.”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인선이다.

지금 대열이 멈춰 선 곳은 어둠나무의 영향권 바깥.

냉기와 광기가 감도는 영역 안을 살피기 위해서는 따로 엄선된 고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고수들은 그만큼 큰 전력이다. 정찰에 체력과 심력을 허비했다간, 중요한 시기에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역할을 흡혈귀, 흑객 휘하의 셋이 맡아 주었으니. 본대는 나름 부담을 많이 던 것이다.

“좋게 생각하십시다. 어차피 죽은 거나 다름없었던 처지였지 않소이까.”

복잡한 심사를 읽은 듯, 월산이 타일러 온다.

“…그리 보아야겠지요. 예.”

제운비 역시 대소사를 구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흡혈귀가 되고 만 교관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생김은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몬스터를 잡기 위해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 자랑스럽던 천무학관의 교관들이 한낱 흡혈귀의 시종으로 변한 모습이라니.

‘유장위, 이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제운비는 애써 분노로 돌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랬다. 놈이 먼저 아군인 두 교두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태를 목격한 마법사들의 말에 따르면, 두 교관들은 어둠나무를 지키는 벌레에게 침습당해 가만두어도 죽을 것이 확실했다고 한다.

거기에 어둠나무의 파괴를 알아차린 고룡 쉐이크.

크기가 수백 장이 넘는 보스 몬스터의 난입이었다. 마법사들이나마 살아서 돌아온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땡땡땡! 땡땡땡!

“비상! 비상!”

“전방 주의! 전투 대비 태세!”

한데 갑자기 경계 종이 울리고, 요란한 소동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저… 저놈입니다! 고룡 쉐이크!”

저 멀리.

거대한 형체가 희끄무레하게 솟아올라 홰를 치고 있었다. 크기가 작은 산만 한 본 드래곤. 원래 천무학관 공격대의 레이드 목표.

“저것이 그……?”

“허어, 저런 놈을 상대하라니… 이건 숫제 싸움이 아니라 지역 파괴 아닌가…….”

보고로 이미 들었지만, 직접 보게 되니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레이드 공격대의 주둔지 전체보다 더 거대한 괴물.

저런 것과 싸우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입이 바싹바싹 말라올 지경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래서야.”

“허허…….”

같은 기분인지 체육학과의 뇌천벽이 혀를 찼다. 크기만 해도 엄두가 안 나는 지경인데, 심지어 허공에 떠 있기까지 하다. 이대로 싸움이 나면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을 뿐.

“일단은 땅에 떨어뜨려야 뭐가 되어도 될 것 같군요.”

“마법.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

레이드 공격대의 마법 전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랜드급 반열에 든 이는 없지만, 마스터급 마법사들이 열둘이나 된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커도 너무 큰 탓이다.

“대단위 중력 마법으로 일단 끌어내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뒤로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합체, 혹은 합동 마법.

마법사들이 마력을 동조시켜 하늘에서 끌어내린다 한들, 쉐이크가 떨어진 땅 일대는 중력의 수십 배에 달하는 압력이 계속해서 지속될 터였다.

그래서야 놈과 싸우는 아군의 무인들을 지원할 수가 없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들이라 한들, 자기 몸무게 수십 배에 달하는 압력을 받으며 싸우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화경쯤 되어야 서 있기나 하지, 어설픈 무인이라면 마법이 쏟아지는 땅에 들어서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을 터.

“되든 안 되든 해 봅시다. 여차하면 현… 탈마의 고수께서 어찌 나서 주시겠지.”

“알겠습니다. 마법 병단! 도열!”

뇌천벽이 잠시 버벅거리며 한 말에, 마력학 교두 엘리샤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도열! 도열!”

“연계 대형으로!”

차르르르. 차착!

마스터급 마법사 열두 명이 전면에 섰다. 그리고 그 뒤에 지원조로 달라붙은 수십의 마법사들.

후오오오오!

강력한 마력이 후방에서부터 피어오른다. 맨 후열의 마법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앞 열에 선 마법사의 어깨를 움켜쥔다.

“운-그라크. 사파!”

“운-그라크. 사파!”

“엠파워! 리-차지!”

우우웅! 우우우웅!

그리고 그런 물결이 앞으로, 앞으로 이어졌다.

마법사들의 마력이 덩치를 불리며 앞으로 몰려간다. 짧은 시간에 강력하게 피어오른 마력은,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조차 덜덜 몸을 떨 정도였다.

지릿지릿하게 공기의 냄새까지 바뀔 정도니 말 다한 것이다.

“마력 전달. 그리고 강화입니다. 평시에 쓰는 마법의 위력보다 세 배 이상 강해질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엘리샤가 말했다. 확실히 위력은 대단해 보였지만, 제운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두가 버틸 수 있겠소?”

격체전력. 여럿의 힘을 하나에 모으는 전법.

이는 무예사에서도 성공한 사례가 드물다. 소림사나 화산파 등, 유서가 깊고 아주 오랜 기간 연구한 이들이 겨우겨우 성과를 냈을 뿐.

애초에 한 사람의 몸에 지닐 수 없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고 억지로 마력을 밀어 넣어서 사용하는 방책.

아무리 마스터급 마법사라 해도 부담이 상당할 터였다.

“버텨야지요. 그게 역할이니.”

“진지 작성!”

“진지 작성! 으오오오오!”

엘리샤가 삼엄하게 눈을 뜰 때, 선두에 있던 마법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온몸에서 영기를 뿜어냈다.

부---웃!

대지에 관이 쑤셔 박힌다. 분명 형체를 지닐 수 없는 마력이, 강제로 형체를 맺으며 지맥과 연결되었다. 그와 함께 부북, 부북, 무언가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시커멓게 물드는 지면.

“…사기(邪氣)가 상당하군요. 하지만 아무리 죽어 버린 대지라 한들, 표토를 지나 지저에 이르게 되면, 말라 버린 영맥의 근원에 닿고 마는 법.”

엘리샤가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부북. 부부북.

흡사 오폐수처럼, 대지의 영맥에 박힌 관이 시커먼 사기를 뿜어낸다. 그러나 그러기를 얼마 지나, 기분 나쁜 사기는 점점 줄어들어 탁한 강물처럼, 그리고 점차 시냇물처럼, 맑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영기의 관.

“우오오오---! 그래비티 캐논!”

동시에 열두 명. 마법사들이 허옇게 마력에 물든 채로 고함을 질렀다.

“1번 포 레디!”

“3번 포…….”

“9번 포!”

“12번 포 레디!”

치지직! 치지직!

그 고함은 비명에 가까웠다. 사람이 백열(白熱)하는 기가 막힌 괴사. 마스터급 마법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마력 방출의 포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으으으윽!”

“괘, 괜찮은 거요? 저래도…….”

“마도에 몸담은 이상.”

제운비의 걱정에 엘리샤가 냉랭하게 고개 저었다. 평상시에 항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던 그녀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 빙벽처럼 냉랭했다.

“육신도 영혼도, 언젠가는 쏘아질 하나의 탄환일 뿐입니다. 이그니션!”

“그 무슨…….”

“으아아아!”

제운비가 놀라 물으려 했지만, 마법사들의 고함이 더 빨랐다.

꽈르릉! 꽈우우웅! 꽈가가강!

1번 포부터 12번 포까지. 초를 12번 나눈 것처럼 쏘아지는 동시 사격. 강력한 중력장을 발생시키는 마력의 탄환이 하늘을 갈랐다.

키에에에---!

그 방대한 마력의 행사에, 고룡 쉐이크가 포효를 내질렀다. 일렁일렁 강대한 역장이 그 몸을 뒤덮으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것으로 마법사들의 포탄을 대비하는데.

씨---잇!

“……?!!!”

멀리, 지면 저편에서 날아든 오색의 검강. 그것이 거대한 드래곤의 마법 보호막을 찢어발겼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마치 사전에 준비하고 들이닥친 것 같은 난입.

콰드득!

덕분에 고룡 쉐이크는 정통으로 중력탄의 탄두에 두들겨 맞았다. 학관생들이 목이 터져 나가라고 환호하는 가운데, 제운비는 눈이 시뻘겋게 변해 격노를 토해 냈다.

“…유장위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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