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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52화 (253/310)

252화. 징조 (3)

“여, 영광입니다! 당문의 말예! 사천의 당무련이 천무학관의 검성을 뵙-”

“그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닐세!”

제운비가 손을 내저어 막았다. 그는 예를 취하려는 당무련에게 급한 손짓으로 가리켰다.

왜애애앵… 푸드득.

겨우겨우 잡아 놓은, 기세가 주춤해진 새카만 파리 떼의 무리를.

“인사는 나중으로 하고! 우선은 힘 좀 써 주게! 저것들을 어디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멈칫.

제운비의 질문에 당무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피식!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고, 그녀는 곧 버릇없게 웃고 말았다.

“어디까지 막아 드리면 되겠습니까?”

“다, 당 소저!”

그녀를 업고 있던 소진이 괜히 기겁했다. 수석 교두 제운비를 상대로, 고작 2학년 학관생이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거만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바람이 도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문의 먹은 세상 천지를 검게 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무련은 그럴 만했다.

비록 아직 독공의 조예가 부족한 몸이지만.

바람-정령사와 마법사가 바람만 제공해 준다면, 그녀는 저 파리 떼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당문이라 해도, 양에는 당해 내지 못할 텐데?”

제운비가 되물었다.

비록 독이 대량 살상에 특화된 무기라 한들, 수천 수만 배의 적은 감당할 수 없다.

죽이는 와중에 희석되고 중화된다. 지극히 정설이며 원론적인 이야기다.

조금 전 당무련은 독분을 다섯 주먹이나 썼다. 그렇게 해서 겨우 막아 낸 것 아닌가?

“아니오. 방금 것은 독술이라 할 수도 없는 낭비… 작정하고 쓰게 되면 다릅니다. 당문은 오로지 독에만 수백 년을 매진한 가문입니다.”

툭툭.

당무련이 유달리 빵빵하게 채워진 자루. 어린애 몸통만 한 암기낭을 두드려 보였다.

업어 주는 소진이 질겁할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독으로 가득 찬 독낭이 여럿 들어 있었다.

또한, 소진이 있었기에 이런 자신감도 보일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당무련만이 아니라, 그녀가 몸에서 떼지 않는 다른 암기낭도 다섯이나 둘러메고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지금 같은 전투 상황에서 허언은…….”

“목을 걸겠습니다.”

뚜욱.

소리가 나도록 몰려드는 시선들.

당무련의 눈은 진심 백배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심. 공을 세우고 싶다는 욕심이었으나, 이 상황에서 제운비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부탁하네. 도움이 절실해.”

“부탁이 아니라 명령으로. 당무련이 받겠습니다.”

차악.

군례. 무인의 예가 아니라 군인의 예를 취하며 당무련이 고개 숙였다. 제운비는 그에 끄덕이며 교관 둘에게 말했다.

“저 아이를 돕게. 전력으로.”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흐흐…….”

당무련은 웃었다.

독술사에게 있어 정령술사와 마법사의 바람 지원이란, 약속된 승리! 뿌렸다 하면 무조건 다 쓸어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고지(高地)의 이점이었다.

“다, 당 소저… 대체 어쩌려고…….”

다만 그러려면 당장 그녀를 업고 있는 소진, 이 겁 많은 놈이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소진, 나 부탁 좀 할게.”

“어……? 부탁? 무슨…….”

“지금부터 놀라지 말아 줘. 그리고 최대한 나를 믿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수 있을까?”

뚜욱.

소진의 몸이 굳었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대… 대체 뭘 하려고?”

그는 무가가 아니라 상단의 후계다. 절대적 신뢰. 무슨 일이 있어도 믿어 달라는 말. 이런 백지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 부담인지 잘 아는 이였다.

그런 소진에게 당무련은 한층 더 매달렸다.

“한 시진만. 딱 한 시진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탱해 줘. 그러면… 언제고 네가 뭘 요구하든 다 들어줄게!”

“아, 아니. 잠깐. 당 소저……!!”

…뭘 요구하든 다 들어준다?

엄하게 들으면 얼굴이 확 붉어질 만한 말이다. 소진은 저도 모르게 당무련의 얼굴을 살피고 꿀꺽! 침을 삼키고 말았다.

‘뭐든? 뭐든 다 들어준다고? 그럼 혹시…….’

곱다. 평소에 성깔이 좀 있어서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 그조차도 고양이상이라 불리는 매혹적인 얼굴이다.

생각해 보면 당무련은 당문의 사생아. 저 폐쇄적인 사천 당문의 남자가 혹해 넘어갈 정도로, 그녀의 어머니가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 당 소저가… 어… 한번 한 말을 물릴 사람은 아니니까 이참에… 아니, 아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라……!’

어찌 보면 그냥 무인으로서 한 약속일지 모르지만, 한번 떠오른 망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또래 명가의 자제들에 비하면 몸이 다소 약하지만, 소진 역시 십 대.

여러 가지 의미로 왕성할 때다. 자극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접촉이 좀 자주였는가!

지난번 유령선에서, 자신의 앞을 막아 준 당무련. 그렇게 쓰러진 그녀를 보살피다가…….

본의 아니게 남았던 감촉과 굴곡이 있었다. 이참에 그것이 떠오르니 얼굴에 피가 확확 몰리는 기분이었다.

“사천 당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어! 제발! 부탁해!”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정확히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래서 결국 넘어갔다. 여러모로 등골이 다 쭈뼛하다.

사천 당문의 이름을 건 약속?

거부했다간 오히려 된통 미운 털 박힐 일! 소진은 그렇게 가문에 변명할 말을 생각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처럼 날 업고 움직여 줘. 그리고 이 배낭들을 잘 챙겨 줘.”

“그, 그거면 돼?”

“응. 실은. 지금 네가 메고 있는 이것들… 다 극독이거든.”

“……?”

일단 약속을 받아 두자, 당무련은 바로 질렀다.

이제껏 그녀가 소진에게 둘러메게 하고 온 독낭들. 이건 상당한 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어둠나무 인근 지대는 나타나는 몬스터들이라곤 거의 언데드 계열이다.

이미 죽은 놈들에게 독이란 낭비일 뿐.

그래서 암기는 주야장천 다 써 버렸고, 이제 사천의 본가에서 보내 온 독물들만 잔뜩 재고로 남은 상황.

“연습을 해야 돼, 나는. 손 풀이를 해야 하고.”

거기에 지금의 그녀는 얼마 전, 오감폐쇄를 거치며 독공에 대한 조예가 급상승한 상태.

무인이 경지가 오르면 연습이 필수다. 날카롭고 큰 새 무기를 가지고만 있다가 급히 휘두르려다간 무기에 스스로를 다치는 법. 특히 독공은 그런 위험성이 병기보다 몇 배는 더한 무기다.

때문에 당무련은 고민이었다. 이번 행군에 억지로 끼긴 했지만, 언데드 몬스터들을 상대로 독을 연습할 기회가 있기나 할까… 하고 초조하게 들고만 있던 중에.

이런 꿈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왜애애앵… 왜애애앵---!

“생명체 한정으로… 독은 무적이야. 특히 저렇게 크기가 작은 녀석들은.”

새카맣게 일어나는 쌀알만 한 파리 떼들.

벌레는 기본적으로 약하다. 하등한 생물이다. 인간의 수천분의 일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는, 그만큼 극미량의 독으로도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숫자가…….”

제운비가 지적한 것을 따라 말한 소진. 하지만 당무련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문제없어. 오행은 상극만이 아니라 상생도 있으니까. 바람이 받쳐 준다면… 스스로 증식하는 것도 가능해.”

“…독이? 스스로 증식한다고?”

“응! 이론상으론 문제없어! 걱정 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당무련의 야무진 다짐에 소진은 현기증이 다 났다.

스스로 증식하는 독? 그건 그것대로 어마어마한 공포다. 소진은 파도치듯 몰려드는 파리 떼를 보고 오한이 들었다.

왜애애앵… 왜애애앵--!

저 위험한 죽음의 벌레들을 무서워해야 할지, 아니면 저것들을 다 잡아 죽일 수 있다 장담하는 당무련의 독을 무서워해야 할지.

이성적으로는 후자가 더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주저함을 당무련은 허락하지 않았다.

“제발… 부탁해! 소진!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회라고!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해!”

와락. 물컹!

아예 육탄 공세로 달려드는 당무련.

이쯤 되면 노린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소진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매달려 오는데  거절했다간… 정말 여러모로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좋아… 제기랄. 나 죽이지 마. 부탁해…….”

“하핫! 그럴 일이 있을까 보냐!”

“…청춘이군. 청춘이야. 그쯤 하고 얼른 힘 좀 쓰지?”

끌끌끌.

이제껏 두 소년 소녀의 드잡이를 보고 있던 교관들이 혀를 찼다. 소진은 기겁했고, 당무련은 그저 머쓱해하기만 했다.

“아, 앗차! 죄송합니다! 바람! 부탁드립니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소용돌이까지는 필요 없어요. 잔잔하게! 거세지 않은 바닷바람 정도로!”

정령술사 미샤의 말은 짧았다. 그에 대답하는 당무련의 말 또한 짧았다.

“음! 실피드여!”

후르륵-! 휘익!

두 손을 들어 바람의 정령을 이끄는 미샤. 이제껏 소용돌이로 휘감아 놓았던 바람이 풀어지자, 새카만 파리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는 물결처럼 풀려 나왔다.

왜애애애앵---! 파즈즈즈즈!

“소진! 달려! 두 팔 크게 들어! 그리고 이걸로 코와 입을 막아!”

“으읍! 으으읍!”

녹색 입마개를 받은 소진. 그런 그의 몸에 달린 주머니를 풀며 당무련은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자… 드디어 꿈에서나 그리던 광경을!”

후드득.

소진의 팔과 등에 걸린 네 개의 큰 독낭. 그 아가리를 잔뜩 벌린 채, 어린 독술사는 독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보여 주겠어!”

파아아악!

다섯 가지 색의 독분이 무지개처럼 퍼져 나갔다.

솨아악. 사사사삭.

시작은 안개 같았다. 하얀. 혹은 분홍빛 분말이 연기처럼 흘렀다.

퍼적. 퍼드드득.

그중 분말 알갱이에 닿은 검은 파리가, 즉각 몸이 굳고 그대로 질척질척한 반 액체로 녹아 흐른다.

주르륵. 툭. 툭.

녹아 흐른 끈적한 검은 점액질이, 다른 파리의 날갯짓에 튀어 오른다. 그리고 다른 파리 떼에 닿아.

즈즈즈즈… 즈.

녹색의 기체가 독연을 피워 올린다. 연무에 가까이 닿은 파리 떼는 즉각 몸이 마비되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흡사 새카만 쌀알을 마구 뿌려대는 듯했다.

‘…엄청나군.’

멀리서 보고 있던 제운비는 소름이 다 돋았다.

과연. 이것이 독의 대가(大家).

대격변의 날 이전부터 혹자들은 꾸준히 이견을 말해 왔다. 사천 당문. 독 같은 위험하고 더러운 것을 무기로 삼는 이들을, 어찌 정파의 반열에 넣느냐고.

독은 적아를 가리지 않는 무기다. 물론 무기에는 원래 눈이 없어 적아를 가리지 않지만, 독(毒)이라고 하는 수단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상대가 강호인이든 양민이든, 그리고 삼류 무인이든 절정의 무인이든, 가리지 않고 죽음을 선사한다. 화기와 더불어 독은, 무예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자칫하면 이름 높은 강호의 명숙이, 한낱 하오문의 잡배에게 죽을 수도 있다. 때문에 강호인들은 정파 사파 가리지 않고 독을 쓰는 이들을 꺼려 왔다.

여차하면 수련이고 수행이고 필요 없이 뿌리기만 하면 대량 살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

그것이 바로 독이니까. 이는 강호인들의 정체성마저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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