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징조 (8)
파악!
천마의 손이 튕겨 나갔다. 거센 반발에 한 대 맞은 것처럼.
툭… 툭…….
그리고 작전상황판 위로, 수많은 말과 그림들 위로, 선혈이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천마는 묘한 표정으로 상처 입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황과 황망,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던 그는.
“…재미있는데.”
씰룩.
곧 웃으며 피 흐른 손을 슥슥 소매에 문질러 닦았다.
“교, 교주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신 것입니까?”
한 박자 늦게, 흑객이 보고 놀라 물었다.
“별거 아냐. 용아병인가 뭔가 하는 해골들이 좀 많아서. 잡아다 부수는데… 유장위 놈이 방해를 놨어. 근데 제운비는 왜 따라가냐? 위험한데.”
“…예?”
대단찮은 일이라는 투로 말하는 천마.
흑객은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먹어 반응이 없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구옥경 대… 협?”
오히려 열렬하게 반응한 것은, 던전학 교두 월산이었다.
“뭘 뭐라고 해? 제 눈으로 다 봐 놓고.”
“……?!!!”
천마가 간단하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교두 월산은 더욱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 사실입니까? 그럼?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 겁니까?”
그는 조금 전, 작전도를 보고 있던 천마가,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될 때부터 소름이 쫙 돋았었다. 굉장한 존재감.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으니까.
빠드득, 빠드득 하고 천마가 주먹을 말아쥘 때마다 뭔가 파괴의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전율. 하지만 분명 눈에 보이기로, 크게 대단한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도 위의 작은 말들을 한 움큼씩, 꽉, 꽉, 움켜쥐어 바스라뜨렸을 뿐.
다만… 그때마다 저 멀리 전장에서 어마어마한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파박! 하고 천마의 손이 지도 위에서 튕겨 난 후로는 위압감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피가 뚝뚝. 이게… 뭔가?
“다시 해 보자. 아… 으음...”
월산이 놀라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천마.
그는 아까와 똑같이, 지도 위로 의지를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곧 인상을 찌푸리며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하… 안 되네. 싹을 잘렸군.”
“싹을… 잘려요?”
“어, 그런 거 같아.”
“설마… 설마! 그런 것입니까? 정말 그런 게 가능하신 겁니까?!!!”
갑자기 월산 교두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잔뜩 부스러진 쥐 해골들의 잔해와, 작전도 위에 떨어진 핏자국. 그리고 상처 입은 천마의 손을 보고 설마설마하던 것을 확신을 가졌다.
“얘, 왜 이래?”
막 흑객에게 심드렁하게 투덜대던 천마가 어이없어하자.
“그.…그……! 뭐라 이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 구옥경 대협! 대협께서는…….”
“나 대협 같은 거 아냐. 그냥 교주라고 불러.”
천마가 인상을 썼다.
어지간히 다급했나 보다. 그래도 이게 뭔지.
역시 제운비만 한 놈이 잘 없었다. 월산이란 놈도 배울만큼 배웠을 텐데, 본 교의 교인이든 아니든, 누굴 부를 때는 그 사람의 직위나 지위를 고려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예! 교주… 께서는 조금 전 이 지도를 통해 자연력을 행사하신 것… 맞습니까?”
“어. 맞어.”
천마가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다시 안 되시는 겁니까?”
“어. 그래. 이제 막 감을 잡은 터에 방해받아서.”
천마가 다시 끄덕였다.
“어떻게! 하늘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아-!”
그러자 월산이 펄펄 뛰며 격노한다.
“너 진짜 왜 그러냐?”
이제 천마는 좀 황당해졌다.
“지도를 통해. 모사된 배경에 자연력을 투사하는… 가히 신에 가까운 경지의 힘이지 않습니까! 새로운 이능, 아니, 권능(權能)이라 부를 만한 힘이었는데!”
하지만 월산은 눈물이라도 좍좍 뽑을 기세였다. 천마는 이놈이 바보가 됐나 싶었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일어난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어쩌면 천마 본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던전학과의 교두. 월산.
그는 몬스터나 던전이 일으키는 이능과, 초월적인 특수한 힘들을 연구하고 파훼하는 것이 전문이다.
업이 업인지라, 그는 상식을 벗어나는 여러 가지 초현상들에 대한 지식이 박대정심했다.
제운비처럼 화경에 이르러서 천마의 공능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당장 초현상에 대한 지식만큼은 천무학관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추정하기로, 방금 천마가 보인 것은 도화(圖畫)를 통한 물리력.
정확히는 의지력을 물리력화시킨,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현상 구현… 옛날 이야기나 전설에나 나오던 것이… 허, 그럼 그게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이 경우는 더욱 더 특이한 극한의…….”
“…야, 혼자 떠들 거면 나가. 지금 상황 안 보여?”
월산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자, 천마가 인상을 찌익 썼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흑객에게 말했다.
“야, 여기 이쪽에 발 빠른 애 없냐? 제운비 저거 말려야지, 자칫하면 죽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객 역시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영문은 아직 모르겠지만, 교주가 하는 말이니 일단은 시키는 대로 따른 것이다.
-매소봉 교관, 근처에 제운비 대협 보입니까?
-방금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인 일이십니까. 주인이시여.
-교주께서 그를 말리라 하십니다. 유장위를 추적하는 모양인데… 제운비는 화경.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달려들었다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피가 전달하는 목소리. 그편에서 당황과 분노 같은 격분이 전해져 왔다. 짧은 촌각의 시간이 지난 후, 매소봉이 다시 말을 해 왔다.
-제운비 교두. 놓쳤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체육학과 교두 뇌천벽과, 다른 화경의 고수 둘이 더 제운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아하…….
흑객의 얼굴이 밝아졌다.
분명, 유장위가 현경의 고수라 하나, 제운비와 뇌천벽. 천무학관의 쌍벽을 이루는 두 무인에, 다른 화경급 고수 둘이라면 단시간에 어찌하기는 힘들 테니까.
-주인이시여. 유가놈이 이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세가 불리한 걸 아는 모양입니다.
-그거 다행… 잠깐, 지금 추적에 같이 하고 있는 겁니까? 매 교관?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시여, 각별히 제 몸의 안전을 조심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니…….
-주인께서 화경의 고수 둘에게 힘을 받으시며, 저 또한 작은 성취를 이루었나이다. 느껴지십니까?
목소리 끝에 작은 웃음 같은 것이 들렸다. 흑객은 잠시 정신을 집중해 보고, 허, 하고 감탄한 웃음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매소봉, 그는 안개화를 이용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다소 힘에 겨워 보이긴 했지만, 흡혈귀로서의 권능이 급진전을 이룬 것이다.
“뭐냐? 제운비 빠졌대?”
흑객이 웃자 천마가 물었다.
“어… 추적 중이랍니다. 근데, 화경 고수 넷이서 유장위를 따라간답니다.”
“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러면 전선이… 아니, 됐다. 나름 나쁘지 않겠네.”
슬쩍 인상을 쓰려던 천마가 곧 머리를 저었다.
고룡 쉐이크와의 교전 중, 유장위 같은 전력의 난입은 대처하기 힘든 변수다. 그런 걸 화경급 고수 넷을 따로 돌려 그 돌발 변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저, 교주님.”
“…너 아직 안 나갔냐?”
월산이 말을 건다. 천마는 또 한 번 인상을 썼는데.
“저, 진정했습니다. 그래서 여쭙는데… 혹시 조금 전, 작전상황도를 보고 계시다가 일종의 황홀경을 느끼셨습니까? 그저 그림일 뿐인데 갑자기 지도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생동감이라든가…….”
“…오. 맞아. 그랬어.”
어떻게인지, 천마가 느낀 그 느낌을 정확하게 말해 왔다.
“그럼… 정말이군요! 이 말들… 지도 위의 뼛조각들을 쥐고 부수시는 순간… 진짜 용아병들이 부서지고 소멸되고 그런 것이지요?”
“어, 그래. 잘 아네?”
천마가 신기해하며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 힘을 쓰고 계시던 가운데… 유장위, 그 잡놈이 교주님의 신공을 대성하시는 것을 방해한 것이고요?!!!”
“그렇다니까… 근데 네가 왜 화를 내냐?”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아… 이건 죄악입니다. 유장위 이놈이 미쳐도 더럽게 미쳐서…….”
천마가 인상을 쓰자 월산이 찔끔해서 소리를 낮춘다.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던 흑객이 결국 물었다.
“저… 교두님? 저도 알아듣게 설명 좀…….”
“이능 발현, 아니, 권능의 자각입니다.”
월산의 첫마디는 대단히 짧막했다.
흑객은 분명 설명을 듣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하지만 다행히 월산은 할 말을 고르고 있었던 건지, 차분하게 따박따박 다음으로 말을 이었다.
“현경, 아니, 탈마의 경지에 계신 교주께서, 조금 전 신공이라 할 만한 능력을 얻으셨던겁니다. 한데, 그걸 대성하기도 전에 파훼당하신 거고요.”
“…그걸 어떻게 아시고?”
“제가 비록 절정의 무인은 아니지만, 수많은 문헌과 기록을 정리하던 중에 배운 것이 있습니다. 무인의 깨달음이란 한 번 왔다고 해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교두 월산. 그는 무인으로서는 대단하지 않았지만, 이론만 놓고 보자면 어지간한 화경의 상승과도 말을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깨달음의 단초란, 가느다란 실처럼 약하다. 극도의 긴장, 막막하기 짝이 없는 상황. 그런 가운에 얼핏 떠오르는 희미한 영감에서 비롯되는 것.
한낱 인간이 드높은 차원의 무언가로 잠시 올라서는 것이라 휘발성이 높다. 무인이 생사결을 하면서 심득을 얻었을 때, 그 정리에 오랜 시간을 들이는 까닭이 그래서다.
아주 짧게 뇌리를 스쳐 지나간 다른 차원의 힘. 영감에 가까운 것이기에, 그걸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대체 유가놈 그 잡것은 왜 교주님의 성취를 방해한 겁니까?”
때문에 유장위, 소위 현경의 고수라는 자가, 이제 막 힘을 얻는 천마를 공격해서 파훼해 버린 것은, 무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파렴치한 일이었다.
정작 힘을 잃은 천마는 그러려니 하는데, 당사자도 아닌 월산이 격분해서 펄펄 뛸 정도로.
“뭐… 다급함 때문에 그래. 내가 나타나서 제 먹잇감을 가로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더라.”
“…그런 것도 느껴지십니까?”
“음. 약간? 여자한테 채인 찌질이가, 괜히 주변에 남자만 나타나면 혼자 버럭하는 그런 감상이었지.”
천마는 다른 어떤 무공보다, 검에 대한 조예가 특히 깊고 선명하다. 유장위가 날린 검강. 그걸 맞고 신공이 깨어진 순간,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것이다.
그리 말해 주자 월산이 끄덕였다.
“…그렇군요. 애초에 화경 현경을 오르는 검객들 중, 신검합일을 성취하지 못한 이는 있을 수 없으니까.”
신검합일.
검이 나이자 내가 곧 검이 되는 단계.
검도의 극을 향하는 고수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 단계를 반드시 거친다. 그래서 상대와 검을 겨루면서 많은 것을 읽어 낸다. 고수이면 고수일수록 그렇다.
“…설명하나는 나보다 더 잘하는 거 같다.”
“별말씀을. 그냥 머리로, 글귀를 읽은 것이 다입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아. 극상의 신공을…….”
“근데 그거, 깨져서 다행이야. 어차피 나랑 별로 안 맞는 거 같으니까.”
“…예?”
거기서 천마의 말에 월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도거든 결국. 검을 쓰는 놈이 저런 외력에 휘둘려서야 대성을 하지 못해. 결국 믿을 건 이것뿐이지.”
탁탁.
사파보다 더하다는 소리를 들은 마교의 교주가, 사도를 논하는가? 월산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주님, 놈이 옵니다.”
“누구?”
“바알제불…….”
갑자기 흑객이 몸을 부르르 떨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끄----루루루루!
분명 강력한 중력장을, 고룡 쉐이크가 버티고 일어서는 것이 멀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