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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58화 (259/310)

258화. 징조 (9)

구르르릉…….

변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짐은 이미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허억. 허억.

귀찮게 쫓아오던 떨거지들을 겨우 떼어 내고, 유장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왔다. 드디어…….”

우드득.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끼긱거리며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했다. 그러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툭! 툭! 투둑!

얼굴에서 흐르는 검은 땀이, 세차게 바닥으로 내려꽂힌다.

일대에 펼쳐진 대규모 중력 마법 직접진의 영향이다. 솟아나기 무섭게 땅에 처박히는 땀방울. 그건 몇 배의 속도로 떨어졌다. 다섯 배. 어쩌면 열 배에 가까운 중력의 힘.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 해도,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천무학관 마법 병단의 8할. 그들의 역량을 총집중해서 펼쳐 낸 마법이니까.

유장위는 개인이다. 개인이 수십 명의 힘을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전설상의 신화경, 그에 도달한 고수라면 또 모를까.

“큭큭큭. 신화경… 신화경이라… 큭큭큭!”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젓는 유장위.

그 모습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미쳤는지 모른다. 행색이나 행동을 보면 이미 미친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 어쩔 텐가.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유장위가 보기에 미친 것이란, 아주 명확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것이 진정 미치는 것.

노리는 것은 단 하나다.

“벤다…….”

완전한 베기. 무엇이든 갈라 버리고 쪼개 버리는, 아름다운 호선.

극히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면, 현경 무인의 이름도, 이제껏 쌓은 사회적인 지위도, 다 버릴 수 있었다.

-가다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불경에서 불도를 이루는 마음에 대해 하는 말이다.

물론 유장위의 출신은 학관. 그것도 도문을 계승하는 학관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는 것.

베고 베고 또 베어서, 뇌리 한편에 남은 꿈결 같은 베기, 그것을 이루는 것.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검날의 춤사위.

원하는 것은 오직 그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욕을 듣든, 어떤 오해를 받든, 상관하지 않는다.

“큭큭큭큭…….”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룰 것인가.

남 시선을 신경 쓰고, 욕먹는 것과 오해받는 것을 꺼리면서, 남만큼 하면서 어찌 남보다 뛰어나길 바랄 것인가.

드르르륵. 끄르르르…….

눈앞의 용골. 본 드래곤의 뼈는 천천히 검게 물들고 있었다. 크기가 산만 했던 놈의 뼈가 중력 마법을 극복하고 일어서고, 허옇던 몸이 검게 변하자.

사위가 온통 어둠에 물드는 듯 빛이 흐려졌다.

-……!

찌이잉!

검은 고룡. 언데드를 굴복시켜 자신의 수하로 삼은 존재가 말을 걸어온다.

“큭!”

듣는 순간 유장위는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꾸욱.

반사적으로 거머쥐고, 다시 반사적으로 휘둘러진 베기가 아니었다면 분명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쐐애액!

키긱! 파바밧!

불꽃이 튀고 집 몇 채 크기의 정강이뼈가 잘려 나간다.

끄---르르르!

고룡 쉐이크가, 정확히는 그의 머리에 깃들어 있다가 실체로 나서기 시작한 자가 분노했다.

-……!

“닥쳐, 이 새끼야. 먼저 공격한 건 네놈 아니냐?”

유장위는 스윽, 코 밑을 닦으며 대꾸했다.

검게 땟국이 앉은 손등을, 벌겋게 물들이는 피.

코피다. 그것도 쌍코피다. 좀 전에 녀석이 뿜어낸 기이한 음파, 혹은 정신파에 터진 거다.

울컥!

유장위는 그에 분노가 치밀었다.

보통 그만한 고수쯤 되면, 코피가 쌍으로 터지는 건 꽤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현경의 고수가 체신머리 없게 이런 꼴을…….

“아니, 아니지. 이게 아니야.”

떠오르는 생각, 상념을 유장위는 다시 털어 버렸다.

현경의 고수고 나발이고, 이미 인간의 굴레 같은 건 다 벗어던지기로 작심하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코피니 쌍코피니 그게 다 어쨌단 말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흐흐흐흐…….”

웃을 뿐이다.

처음에는 그냥 습관적으로, 그리고 그러는 그 자신이 웃겨서 더욱 웃었다.

킬킬킬… 크크크크!

웃음은 점점 커져서 킬킬거리는 광소가 되었고, 그와 함께 유장위의 기세는 천천히 흐릿해졌다. 삽시간에 범인, 그 이하의 기세로 줄어든 채로, 유장위는 말했다.

“간다. 마왕이라는 놈. 이번에는 좀 다를 거다.”

* * *

“음…….”

끄---르르르르!

멀리서, 기성을 터뜨리는 고룡 쉐이크. 본 드래곤의 몸체가 보였다. 원래 희끄무레하던 본 드래곤의 몸이, 점점 검게 물들어가자 제운비는 저도 모르게 침음했다.

“어이, 제운비. 느꼈냐?”

뇌천벽이 꽈악, 어깨 어림을 지혈하며 물었다. 그는 헐떡이며 상당히 지친 기세였다.

무리도 아니다. 그들이 추적하는 상대는 한 차원 위의 고수였으니까.

자칫 목이 달아날 뻔한 검격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볍게 내지른 견제의 의미뿐이라는 게 또 속이 상했지만.

“그래. 유장위의 기세가… 사라졌다.”

“죽었을까?”

“그럴 리가.”

탁탁. 꿀꺽.

제운비는 대답과 함께, 작은 병에서 요상단 몇 알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우물우물.

약을 씹어 침과 함께 버무려 삼킨다. 물 따위는 없다. 몸을 조금이라도 무겁게 하는 것들은 죄다 버려야 했으니까. 물론, 그러고도 추적에 실패했다.

상대는 적당히 자신들을 상대하다 말고, 그냥 중력 직접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뭔가 거대한 기파가 사방을 덮쳤다.

“저놈이 아직 서 있어. 대치 중이라는 것이겠지.”

제운비는 완전히 직립한 검은 본 드래곤을 보았다.

조금 전 기감으로 살피기로, 유장위는 저것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대치. 나름 승부 중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갑자기 기척이 사라졌다.

유장위가 졌을까? 아니다. 본 드래곤이 그를 처리했다면, 응당 그에 해당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포효하거나, 승리의 기쁨을 지르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저것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여전히 대치 중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유장위의 기척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은.

“…더 강해졌군. 자신을 갈무리하기 시작했어.”

오로지 스스로에 집중하여 완전한 몰아를 이룬 상태. 그래서 존재감이고 기세고 싸그리 사라져서, 얼핏 느끼기엔 죽었나? 싶을 정도로 기척이 흐릿해진 것이다.

“시발… 역시 봐주고 있었던 건가?”

뇌천벽이 이를 갈며 투덜거렸다.

고작(?)해야 화경인 그들로서는, 추적하는 유장위를 따라잡는 것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고도 실패였으니 속이 상할 수밖에.

“당연하지… 아니, 그 이상일걸.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내가 보기론-.”

“아,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을 해. 좀.”

“-내가 보기론, 애초에 우리는 제 신경 쓸 바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우리만 저놈을 상대하고 싶어 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운비는 말을 맺었다. 그에 뇌천벽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잔챙이 취급을 당했다. 이거군? 하하 아주…….”

“상관없다. 나름 우리가 한 게 영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니.”

붉으락푸르락하는 뇌천벽의 말을 끊고 제운비가 말했다.

그 역시 모욕을 당한 기분이지만, 감정은 나중에나 따질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

“지켜볼까? 아니면 돌아갈까?”

“…….”

퍼어엉! 쿠우우웅!

빠져나온 전장에서는 굉음이 일고 있었다. 나름 믿을 수 있는 전력의 4학년 학관생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쫓아온 시간은 대략 1각(15분)가량.

어찌 보면 짧지만, 칼 한 번 잘못 휘두르는 데는 촌각으로 충분하다. 몬스터를 상대로 대치하는 것으로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자신도, 뇌천벽도, 그리고 뒤이어 헉헉대며 도착하는 화경급 교관 둘.

“허억… 허억…….”

“큭… 어이구…….”

유장위라는 돌발 변수를 막기 위한 투입이었지만, 이 네 명의 전력 손실은 대단히 크다.

자그마치 화경급 교관 네 명이 빠진 동안, 학관생들은 그만큼 큰 압박을 버텨야 한다.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미 사상자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지켜보는 게 아니라 난입해서 한 칼 먹이고 싶지만…….”

전열을 돌아보고, 같은 것을 생각한 뇌천벽이 속이 쓰린 얼굴로 푸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운비가 그에 끄덕였다.

“그래. 아쉽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일선으로 돌아가야…….”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교두님.”

후욱.

거기서 갑자기 인기척을 드러내는 매소봉. 움찔하는 교관 둘을 말리며 제운비가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인가. 흡혈자?”

“…저!”

뇌천벽의 안색이 조금 찌푸려졌다.

엊그제까지 같은 한솥밥을 먹던 교관에게 흡혈자라니, 좀 지나치게 모멸적인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정작 그렇게 불린 매소봉은 호칭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주인께서, 그리고 천마께서 방비하고 계십니다. 네 분의 전력 공백 정도야, 충분히 여유로우니 걱정 마시길.”

“…어째, 왜 빠졌냐고 욕을 들은 것보다 더 기분이 나쁜데?”

“그거 다행이군.”

뇌천벽이 투덜거렸지만, 제운비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본대에는 극마와 탈마의 고수. 그것도 극마인 흑객은 무인으로서의 경지에 더해서 흡혈귀의 권능까지 가진 몸이다.

적이라면 끔찍한 악몽이겠지만, 이들이 아군이라니 새삼 마음이 든든했다.

“그럼 우리는 무얼 하면 되는가. 복귀? 혹은 다른 신교의 교주께서 딱히 말씀은 없으시던가?”

처음에 매소봉이 물렸다고 들었을 때는 노해서 이를 갈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런 그가 지금 신체를 안개화시켜서 자신을 따라잡은 걸 보니 소름이 다 돋았다.

이 정도의 전력을, 고작해야 전령으로 사용하다니.

“지켜보라. 고 하십니다.”

매소봉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냥 지켜보라고? 상대도 안 되니까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그리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가 될 겁니다. 당장 지금이 아닐 뿐.”

훗훗.

매소봉은 핏기가 가셔 새하얀 입술로 미소 지었다. 분명 남자임에도, 그가 요사스럽게 웃는 것을 보며 뇌천벽은 팔의 소름을 후두둑 긁어 털어 냈다.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군. 괜찮은 건가. 이거.’

새삼 제운비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애초에.

상대를 걱정해 주고 말고 할 필요가 하등 없었던 것이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건데? 그 양반은?”

“음… 잠시만. 아. 예. 지금의 싸움을 잘 보라고. 유장위가 몰락하기는 할 테지만, 더 높은 경지의 궤적을 보아 두라. 그러면 너희도 언젠가는 그 세상에 닿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군요.”

“…….”

매소봉이 잠시 뜸을 들이며 한 말에 화경의 교두 교관 넷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닿는다라. 정말일까.”

“아니, 그보다… 자멸이라고? 유장위가?”

뇌천벽이 당황해서 묻는다. 그러자 매소봉이 끄덕였다.

“광마에 빠진 자. 그 결말이 어찌 되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귀감으로 삼으라시는군요. 지금…….”

----!

일순, 소리 없는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에 모두가 몸을 떨 때, 매소봉이 하던 말을 맺었다.

“제대로 결착이 날 겁니다. 직접 보시죠.”

꽈르르릉!

보시죠. 하는 부분은 입모양으로만 보았다. 끔찍할 정도의 천둥이, 전혀 전조도 없이 2리 밖에서 폭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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