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징조 (10)
신검합일.
몸과 검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는 경지.
따져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무릇 신체는 타고나는 것이고, 움직이는 법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익혀지는 법이다.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신체에게 연습이고 숙련의 과정이다. 그에 비해 병기는, 아무리 강할지라도 자신의 일부로서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한다.
검에는 피가 흐르지 않으며 적아를 구분하는 눈이 없다. 한데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신검합일이다.
명백히 육신이 아닌 이물을, 병기인 검을, 신체처럼 자유자재로 수발한다는 것.
그러기에 혹자는 이를 일컫어 화경의 기초이자 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화경은 변화(變化)와 체화(體化)를 수납해 가는(化) 경지. 따라서 얼마나 검에 빠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지이이잉…….
이 말을 초시로 삼아 나가게 되면, 재미있게도 또다른 역설이 이어진다.
바로, 화경을 넘어선 자- 현경에 이른 이의 신검합일은 어떤 것이냐는 것.
같은 초식을 쓰더라도, 일류의 고수가 쓰는 초식과, 절정, 초절정, 화경의 고수가 쓰는 초식은 각각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화경에 이른 고수는 검강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몸이 곧 검이며, 검이 곧 몸이라는 자세를 오래 단련하면, 검을 몸처럼 수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검객 그 자신이 검의 마음(劍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리하고, 날카로워, 그 무엇이라도 베어 버리는 의지(心御劍).
이것이 바로 검강이며,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초절정, 아직 화경에 이르지도 못한 이가 이미 검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지이이이이잉!!!
유장위가 마침 그런 부류였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검날의 찬란함에 매료되었고,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자나깨나 검을 연마했다. 검 자체에 빠져들었다.
재능도 환경도 받쳐 주었던데다 유달리 광적으로 빠져들었던 그의 성향 탓에, 약관의 나이였을 때는 이미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과거가, 지금에 이르러 기묘한 과실을 맺기 시작했다.
끄르르르…….
부우웅! 휘아아앙!
본 드래곤이 거세게 사방을 후려갈겼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던 것이, 검게 색이 변하고 난 뒤로 고밀도의 중력에서 벗어난 듯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후우우웅! 콰앙! 콰앙!
천지를 뒤집히는 듯한 괴력. 역발산기개세라는 것이 이런 것을 형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일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
“…맑은 개울물 위로 성긴 그림자 비꼈고(疏影橫斜水淸淺).”
이제껏 주변에 동화되어 기척을 죽이고 있던, 유장위가 입을 열었다.
즈즈증.
그가 심력을 일으키자, 중력장 가운데서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안개. 지금 이 지역은 중력 마법의 대단위 직접진이 적용된 곳.
도르르 흐르는 땀방울조차 세차게 땅에 꽂아 버리는, 그런 미친 중력의 지대다. 거기서 뜬금없이 부옇게 피어오르는 안개라니.
“…그윽한 향기 달빛 속으로 번져 간다(暗香浮動月黃昏).”
스스슥.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개는 점차 범위를 넓게, 농도를 더 짙게 하며 피어올랐다. 그 지역이 점점 넓어지자, 아무리 거대한 본 드래곤이라도 이 이변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끄루루루루…….
또한, 그 본 드래곤에 깃든 어떤 존재 역시.
----!
윙윙하고 귀를 울리는 기파가, 사방팔방으로 소름 끼치게 퍼져 나갔다.
덜컥!
이를 악문 와중에 짜릿하게 충격을 받은 유장위는, 퉤! 하고 한 모금 피를 뱉어 내며 웃었다.
“큭큭. 헛짚었다. 머저리야.”
신통방통하게도 분명히 말이 통하지 않는데 감정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저 이계의 마왕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어딜 감히, 자신의 앞에서 마법 따위를 부리려 하느냐고.
하지만 놈은 너무 몰랐다. 이 중원에 대해 너무 몰랐고, 유장위라는 존재에 대해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유장위의 집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딴에는 명문가여서 말이지. 송대의 시인. 임포의 산원소매(山園小梅)다.”
스윽.
오른손은 검을 쥐고 뒤로, 왼손은 검지와 중지를 겹쳐 뻗었다.
검결지(劍結指).
보통 부적을 태우며 대상을 가리키는 손동작으로, 세간에서는 귀신을 쫓고 악령을 겁준다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나, 유서 깊은 도가 문파에서는 이 또한 가볍게 보지 않았다.
비록 손가락이라 하나, 그래도 검은 검.
왼손의 검결지가 짚는 방향은 주의가 집중되는 방향. 오른손에 쥔 검- 대포의 포가가 조준하는 방향이며, 강한 살기를 뿜어내는 통로다.
그리고 현경의 고수가 집중해서 쏘아대는 살기는, 그 자체가 강력한 공격 수단의 하나였다.
근질근질. 찌리릿!
“크으…….”
미간이 가려워 왔다. 상단전이 열리고 있었다.
암향부동. 매화의 향기는, 가볍고 옅기에 밤이 깊어야 은은하게 맡을 수 있는 군자의 향취다.
그리고 개울물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그치지 않고 일어나, 이제는 숫제 검은 먹구름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무럭무럭.
그 구름 속에 몸을 감춘 채, 유장위는 휘익, 휘익, 가볍게 검결지를 휘둘렀다.
마치 괴황지 위로 부적을 적는, 닭 피 먹은 붓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십 년을 벼려 왔었다네. 보라 서릿발 같은 이 칼날을(十年磨一剑, 霜刃未曾试.).”
콰르륵. 와르르륵!
유장위가 오언절구의 시구를 읊자, 그의 검결지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먹구름이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끄르르르르.……!!!
당연히 본 드래곤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만 않았다. 놈은 그악스럽게도 대지를 후려치고, 충격파로 구름을 흩어냈다.
왜애애애앵…….
그리고 괴물 파리, 본 드래곤의 두개골에 무한히 저장되어 있던 지옥의 곤충들.
놈들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장위의 먹구름을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듯, 시커먼 파도 같은 물결이 몰려들었다.
“오늘 뽑아 그대에게 보여 주니, 말하게. 누가 불공평한 일을 당했는가(今日把示君, 谁有不平事)?”
하지만 유장위가 검결지를 휘두르며 시를 마저 읊은 순간.
우르릉. 꾸르르릉!
유장위의 먹구름 안에서 은은하게 빛이 번쩍이며 우레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바바박!
뇌성벽력. 천지간에 가장 강한 뇌의 기운이다.
쏴아아아…….
더불어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해, 파리는 물론이고 본 드래곤의 검은 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하아!”
콰드드득! 파아아악!
습기 가득한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괴물 파리들 수천만 마리가 일시에 터지고 타 죽으며 고약한 냄새를 냈다.
찌이잉!
----!!!
그리고 그 순간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계의 마왕.
“큭큭. 마법 아니라니까? 당대의 시인. 가도(贾岛)가 지은 검객이라는 시다. 무식한 것.”
유장위는 다시 웃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중원에서의 명문가란, 무가라 해도 어릴 때부터 글월을 외고 지식을 쌓게 하는 곳이다.
당연히 유장위도 그 과정을 겪었다.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소학, 대학, 수많은 성현들의 어록이나 가르침을 머리에 욱여넣어야 했다. 그리고 그건 그냥 기본이었다.
기본을 어찌어찌 잘 따라갔더니, 그다음에는 수백 년은 더 전에 나돌았을, 케케묵은 시인들의 시구 등을 강제로 외우게 했다.
“호오. 그렇군. 아니, 이런 데서 만류귀종인가? 크크큭…….”
당시에는 반감도 있었고, 이걸 왜 배우고 외워야 하느냐고 푸념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 지독한 주입식 교육의 결과가,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꽈르릉! 꽈르르릉! 파지지직!
---!!!
본 드래곤에 깃든 놈이 뿜어내는 수십 줄기의 분노가 느껴졌다.
어디서 감히 마계의 왕 앞에서 마법질이냐고. 지금 이게 마법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걸리기만 하면, 네놈 따위는 지옥에서 영원히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잡아내고 말겠다는 지독한 결의가, 피부가 아프도록 저려 왔다.
그 긴장과 흥분이, 유장위를 더욱더 도약시켰다.
“…만류귀종?”
극한에 가깝게 체력이 깎인 몸 상태.
다소 혼미한 정신이었기에, 오히려 지금은 명정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지금 하기에는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대체.
가문은 무슨 생각으로 그 많은 지식들을 자신에게 욱여넣었을까?
유불선은 기본이고,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수많은 사상들.
묵자니 손자니 오자니 하는 병법서까지 외웠었다. 거기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이백이나 두보 같은 시성이라 불리는 이들의 시집까지 달달 외우게 하는 건 왜였을까?
뭐, 그 덕분에 문무를 겸비하여 현경의 고수가 되었고, 지금처럼 신통방통한 힘을 쓰고 있지만 과연.
선친이나 조부가, 과연 유장위가 이리 될 줄을 알고 미리 선행학습을 시켰을까?
“그럴 리가 없지. 허. 허. 그렇군…….”
어렴풋하게, 떠올라 왔다. 당시의 조부와 부친이, 왜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외우게 했는지.
그냥 간단한 거였다. 좋은 글귀. 좋은 말이니까 외우게 했던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음.”
끄르르르르…….
꽈드득! 와드드득!
본 드래곤이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유장위만 재미를 보고, 제 공격은 통하지 않자 생각이 바뀐 듯 했다.
과드득. 과드드득.
거칠고 사납던 움직임이, 차곡차곡 계단을 밟듯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를 테지만, 놈은 유장위가 있는 위치 주변을 쿵쿵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푸욱. 푸욱. 우드득.
수많은 발자국을 땅에 새기며, 바위고 초목이고 다 박살 내 버리면서.
“마법진인가. 그런데… 이것도 글자로구먼.”
유장위는 그걸 보고도 딱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뇌리를 아슬아슬, 간질이는 느낌이 불현듯 찾아왔다.
드드드드득.
상단전이 크게 열린다. 그간 수십 년을 제대로 쓰기 힘들었던 것이.
덕분에 유장위는 정말로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단서는 어이없게도, 만류귀종.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고.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도, 결국 말의 힘이 아닌가?”
마법. 말. 의지.
마나를 기반으로 했을 뿐, 생각해 보니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무예와.
“정, 기, 신.”
그런데 그건, 무예도 다르지 않다. 신체에 기를 쌓아서, 그걸 내력으로 삼는다. 그 내력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무예. 구결. 의지.
의사와 심상은,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상승의 신공은, 귀하고 함부로 유출되지 않는 것이다.
한 자 한 자. 발음과 뜻을 담은, 그 자체가 귀한 것이기에. 그 자체가 보물이기에.
“반야바라밀경…….”
불경. 수많은 기도와 염원을 함께 담은 사람들의 기록.
그중에서도 그 경전은 그저 입에 올리고,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영험을 발휘한다 했다. 그것이… 그런 소박한 마음이 아마도.
유장위와 부친의 뜻이었던 것이다. 좋은 시구를 외우면, 그 자체가 자식에게, 손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것이라고.
마치 부적처럼. 검결지처럼. 두루두루 두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하하…….”
유장위는 웃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사고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말. 언어의 힘. 그것은 곧 의지의 기록이다. 마법이든 무예든, 예술이든 다르지 않다.
선대에 누군가가 가졌을 수많은 깨달음. 가치의 확인. 그런 것들이 글자로 전해지고, 후대에 내려진다. 그리고 문자가 있는 이상, 후예는 어느 순간.
까마득한 선대의 유지를, 그 몸에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도 마나를 운용할 뿐, 무예도 내공을 이용할 뿐.
요는 자격이었다.
“그렇다면…….”
우르릉! 와르르릉!
주변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력.
이제까지도 진심이었지만, 지금에야말로 진짜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검은 본 드래곤의 신체 위로 흐릿한 아지랑이가 일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그건 그냥 보는 순간 눈이 아파질 정도의.
지독한 죄악의 수렁. 그걸 느끼면서도 유장위는 이제 개의치 않았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차례라는 것을.
-그렇다면 화경을 넘어 현경에 다다르는 길은 오로지 검뿐인가?
생각과 함께 나오는 답.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아니다.
검이 분명 만병지왕인 것은 사실이며, 다른 어떤 투로보다 빠르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권각술로, 혹은 봉술이나 창술로. 심지어 궁술이나 암기 같은, 다른 기병에 매진하여 현경에 오른 이도 분명 있었다.
이른바 만류귀종. 출발점이 동쪽이든 서쪽이든, 결국 오르는 산의 정상은 똑같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이에 또 하나의 질문이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병기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후우욱! 빠드드득!
그 순간. 유장위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미 극한에 달한 신체. 오폐물과 탁기를 모두 털어 낸 몸.
필요한 건 자격이었다. 그 자격이 갖추어진 순간.
쏴----아아악!
눈부신 서광과 함께, 현경의 고수가 신화경에 근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