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3)
‘바빴다.’
그 후 수십 년.
바쁘고 황망했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은, 제대로 하려다간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시간과 여유가 넘치는 자리다.
유장위는 전자도 후자도 모두 겪어 보았다.
성실함과 집중으로 클랜을 성장시켜 보기도 하고, 피곤함에 진절머리가 나서 다 내버려 두고 술과 여자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망했었다.
리더가 모든 것을 다 하려다간, 일에 치여 사람이 팍팍해진다. 스스로 천근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열근도 못 들어 낑낑대는 사람을 좋게 보기란 힘들다.
대충대충 하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바르게 이끌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떠났지.’
맑은 물에서는 고기도 살기 어렵다. 차라리 대충대충 사람을 부리고, 게으름 피는 리더가 아랫사람으로서는 편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태도를 바꾸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끌어 갔다. 좋은 게 좋은 걸로 넘어갔다. 그랬더니 그 클랜은, 부패로 얼룩져서 빠르게 쇠락해 버렸다.
또 망해 버렸다.
‘중도와 적당함.’
그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눈금이라는 것은 항상 바뀌게 마련이었다.
리더가 바쁘면 바쁜 대로.
리더가 대충 하면 대충 하는 대로.
사람들은 자기의 짐을 위로 넘긴다. 리더가 모든 것을 다 처리하고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편하기를 원했다. 일은 하지 않고 보수는 많이 받고 싶어했다. 도둑놈 심보다.
‘실로 부당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다. 사람이 다 그랬다. 생각해 보면 유장위 본인도 그 심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윗사람은 사람을 들여 돈을 쓰면서, 쓴 돈 이상의 일을 해 주기를 원했다.
아랫사람은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누군가의 양보는, 누군가의 손해였다. 하지만 그 기준점이라는 것이 없었다.
십여 번을 클랜을 창단했다가, 망했다가 하며 유장위는 겨우 교훈을 얻었다.
‘혹독하게 몰아치면 얌전해지고, 관대하게 대해 주면 상투까지 기어오른다.’
인의예지. 책으로 배운대로 사람을 대하면 현실과 맞지 않았다. 외려 반대였다. 공자맹자는 틀렸고, 탐관오리들이 맞았다.
클랜에서 고작 10의 일을 하는 이에게 30의 대우를 해줬더니, 거만해져서 40, 50을 원한다.
20의 일을 하는 이에게 10의 대우를 해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몸을 굽힌다.
이런 것을 여러 번 겪으며, 유장위는 자연히 사람을 대할 때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점점 거만해지고 권위적으로 변해 갔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으니까.
인덕 대신 이득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검.’
함께 할 사람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는 홀로 고립되어 갔다. 세상을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인간(人間)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늘어가는 것은 무공의 경지뿐.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다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혼자일 때 수련할 수 있지만, 혼자가 되면, 수련이 아닌 다른 일에 더 치였다.
논검을 하고 비급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고수들을 초빙하기 위해서는 좋은 집과 옷, 비싼 먹거리가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랫사람이었다.
결국은 돌고 돌아 사람이었다. 스무 번을 넘는 실패를 겪은 뒤, 유장위는 비로소 세상사는 법을 알 수 있었다. 무지렁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했다.
‘사람은 차별해야 한다.’
금전, 대우, 언사, 식사 때의 자리 등, 제각기 서로 다르게 대해 주어야 했다. 말로는 사해가 평등하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하루에 고작 세 시간 일하는 자와, 열 시간 빠듯하게 일하는 자를 동등하게 대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간 열심히 일하는 놈은 말라죽고, 게으름 피우는 놈들만 살아남는다.
심보가 좋은 놈이건 나쁜 놈이건 상관없었다. 요는 행위였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욕심 부리지 않는 놈은 쓸모없었다. 반면, 설령 남의 등을 쳐 먹을 생각으로 가득해도, 열심히 일하는 놈은 쓸모가 있었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그놈의 기준점이라는 것은, 수시로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클랜원에게, 은자 백 냥을 주면 분명히 감사해하고 더욱 일한다.
한데 정말로 우연히, 옆 클랜에서 은자 이백 냥을 얻는 놈을 보고 녀석이 갑자기 게을러지고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간사한 것이 인간이고, 간사한 것이 사람이었다.
네가 은자 이백 냥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그렇게 지적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나동그러졌다. 그 즈음에 유장위는 한비자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솔직하게 대하면 안 된다.’
똑같은 무인이라도.
때로는 과할 정도로 좋게. 때로는 억울할 정도로 박하게.
영문을 알 수 없도록 흔들고 속내를 비치지 않으며 대하자, 비로소 클랜이 자리를 단단히 잡기 시작했다.
기준점. 그건 찾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었다. 규율이 정확하지 않고 멋대로라야 했다. 클랜원들이 자신을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야 충성을 바쳤다.
겨우내 그렇게 기반을 쌓고, 실력 있는 무인을 모았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 한순간에 꺾였다.
‘급습.’
던전의 보스를 처리하던 중, 갑작스레 난입한 몬스터들이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건 애초에 의도된 덫이었다. 거기서 유장위는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중상을 입었다.
거금을 주며 클랜에 두고 있었던 실력자들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도망갔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 사이에 유장위는 홀로 남겨졌고, 날카로운 칼날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끝이다. 원래라면 죽는 것이 당연했을, 그런 부상을 입었을 때 한 가닥 금빛 섬광이 내민 손에 닿았다.
-아직 혼란스러운가요?
리그웨더.
천무학관의 학과장이 그를 살렸다. 수십 년 만의 해후. 그 눈은 여전히 푸르고 깊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그에 유장위는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 반드시 갚으리다.
목숨을 살려 준 고마움은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현경의 유장위는, 이미 예전의 유장위와 달랐다.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다. 현경의 고수가 죽지 않는 것 만으로도, 언제고 대괴물 전선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다.
유장위는 이제 거기까지 볼 수 있었다. 목숨의 빚이든 무엇이든, 결국은 서로서로 이용.
그걸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었다. 가슴 어딘가가 허전하긴 했지만, 그건 항상 그랬던 것이었다.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싸움. 피가 머리까지 솟구치는 흥분뿐이었다.
-고룡 쉐이크. 상대해 보고 싶지 않나요?
그래서 어둠나무. 위험한 괴물을 토벌하는 자리에 서슴없이 뛰어 들었다. 돈도 필요했다. 클랜이 크게 휘청거렸으니, 그걸 회복시킬 수 있는 무명이 필요했다.
중간에 잠시 야료를 부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그는 적절히 푼돈이나마 모으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적절히 쌓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키이잉!
어둠나무. 그 안에 숨겨진 차원의 문.
그것을 보고 깨달았다.
‘아아…….’
그건 흔히 문이라 일컫어지는 빈 공간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과의 연결은, 허공의 문 같은 것이 아니라, 반투명한 구형의 거품과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서.
-----!
어마어마한 것을 느꼈다. 세상 모든 악의를 모아 쌓았을 탑을. 한없이 막혀 있는 답답한 살의의 근원을.
이것이다.
그제야 유장위는 깨달았다. 자신은 오로지 이것을 베기 위해서 살아왔었음을. 이것을 깨뜨리고 갈라 놓을 누군가. 그의 위치를 자신이 가질 수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음을.
거기서 유장위는 선택했다. 비록 소모되고 말더라도, 자신이 그 위치에 있기로.
그리하여…….
* * *
번쩍.
눈을 뜬 순간, 먹구름 전체가 벼락으로 하얗게 빛을 냈다. 사방 천지에 내려 꽃이는 수천의 낙뢰.
“…….”
꿈벅.
유장위는 길고 긴 주마등에서 깨어났다.
길고 긴 자신의 일생. 그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꿈처럼 맞는 경험은, 언제 겪는다 해도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격렬한 번개의 창은 주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 흔들림 끝에 공기가 요동을 쳐 거센 광풍을 만들었다.
“…허허.”
유장위는 풀썩 웃었다.
전신에 가득한 힘.
그리고 자유로움.
얼핏 선경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뻗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스스로 그 기회를 뿌리쳤음도 기억났다.
끄르르르르……!
그건 바로 자신의 발 아래 선 거대한 본 드래곤.
고룡 쉐이크에 깃든 초월적인 존재 때문이었다.
“아무렴. 베어야지.”
파사삭…….
옷가지가 재처럼 부서져 흩날린다. 이미 현경의 극에 달한 몸이 뿜어낸 노폐물. 그것들이 스며든 상황에서 의복은 그 기능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하초가 덜렁거리는 것은 무언가 남사스러웠다. 아무리 초월경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예법을 더는 따를 필요가 없다 해도.
“으음. 허엄. 음.”
스스스슥.
굳이 인간을 또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유장위가 마음을 먹은 순간, 타고 부스러져 가루가 되었던 비단옷이, 다시금 원래 그대로 재생성되어 그의 몸을 가렸다.
만물이.
그가 원하는 대로 편집되는 때다.
휘딱.
손을 내젓자, 어느 결에 떨어뜨렸을 송문고검이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아마도 화산파의 고검. 그를 보고 유장위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오래는 가지 못하겠구나.”
우우웅…….
송문고검이 송구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검.
찌르기와 베기에 특화된 병기.
무인에게 필요한 것으로서야, 그 예리함이지만, 최상승의 절초를 버텨 내기에 필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단단함. 내구도라 할 수 있었다.
무인이 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라도, 신체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검이 아무리 예리해도 그 내구도가 받쳐 주지 못하면 큰 효용이 없다.
지금 이 순간, 현경을 넘어 신화경의 끝자락에 닿은 유장위. 그의 손에 들기에 한낱 철검은 너무도 초라한 붓이었다. 하나.
우우우우웅…….
“아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저 한 번의 베기임을.”
이 검명이 과연 그런 의미일까? 어쩌면 유장위 자신의 다른 마음이 그렇게 검을 겁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내려놓아야 했다.
결전의 순간. 신병이기에 집착한다면 그 또한 모자람이리라. 그 어느 상대가, 자신의 형편에 맞게 해 주던가?
끄----르르르.
사람을 상대할 때 기준점이 상대적이듯, 적을 상대할 때의 기준점 또한 상대적이다. 저 거대한 본 드래곤을 상대하는 지금 이 순간, 의천검 같은 명검이 필요하다 느낀다면.
그건 사실일 수도, 혹은 유장위의 소심함일 수도 있다. 사실이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 와서 급에 맞는 신병이기를 찾아올까? 혹 사실이 아니면? 인생을 모두 걸고 맞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바보가 되지 않겠는가.
“오겠나. 아니면 내가 갈까.”
이미 판은 짜였고, 마음이 정해진 바.
더는 고려할 것 없다. 그저. 근 칠십 년의 세월 동안.
스르릉.
한 없이 베고, 베고, 또 베었던.
그저 상상으로만 해 왔었던,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베기를, 이 순간 펼쳐 낼 수 있다는 것에.
쐐애애액!
유장위는 검을 휘두르며 너무도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