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4)
번---쩍!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 그건 천무학관의 교리가 있기 전부터 은연중에 사람들이 아는 바였다.
꽈르르릉! 꽈드드등!
“끄아아악……!”
“크.……!”
정확한 속도의 차이까지는 알 수 없지만, 더 멀리서 터뜨린 대형 벽력탄의 경우, 화염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 폭음과 충격파가 도달하곤 했으니까.
“방금 저건…….”
“맙소사. 저게 천뢰검의 극의인가…….”
그래서 뇌천벽과 제운비. 두 사람은 크게 충격을 받았고, 나머지 화경급 고수 둘은 좀 질린 얼굴 정도였다.
앞의 두 사람은 나름 내공에 자신이 있어 내력을 돌려 귀를 보호했고, 다른 두 사람은 아예 손으로 귀까지 막아 버린 것이다. 별것 아닌 것에서 자존심을 세운 두 교두는, 유장위의 일격에 간접적으로나마 제법 내상을 입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매소봉 교관은.
“으으으으! 아으으으!”
바들바들 몸을 떨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 이보게?”
뇌는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이자, 삿된 모든 것을 살라 버리는 정화의 힘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맞은 것은 아니지만, 속성상 어둠에 속하는 그에게는 유달리 끔찍하게 타격이 온 것이다.
“괜찮은가?”
“흐으으. 하으으으… 예… 괜찮…….”
울컥!
대답하다 말고 매소복은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검고 끈적끈적한 검은 피. 덩어리가 잔뜩 진 것이 선지를 보는 것 같았다.
인간의 것과는 확연이 다른 성질의 피. 부축하려던 뇌천벽은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고, 제운비는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포션으로 되나?”
“아, 아니오. 피가…….”
“허, 이거 곤란하군.”
힐링 포션은 치료의 효과를 지닌다. 어지간한 생명체에게는 다 통하며 특히 인간을 대상으로 최대의 효험을 발휘한다.
하지만 흡혈귀는 어찌 보면 언데드. 살아 있지 않은 존재다. 피가 가진 힘. 정확히는 오드(OD)라 불리우는 변질된 생명력으로 움직이기에, 포션이 별무소용이다.
내상을 입은 이에게 금창약을 발라봐야 별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애초에 힐링 포션은 신체의 회복 속도를 올려 결손이나 손상당한 부위를 복구한다.
하지만 흡혈귀는… 어찌 보면 회복할 신체 자체가 없다.
파자자자작!
“크아아아악!”
또 한 번의 섬광. 그에 매소봉은 발작하듯 온몸을 비틀었다. 마치 성직자의 턴 언데드를 맞고 충격을 받은 언데드처럼.
꽈르르르릉! 우르르릉!
뒤이어, 수천 줄기의 벼락이 일으킨 어마어마한 굉음이 다시금 천지를 뒤흔들었다.
“후우… 후우…….”
단 두 수.
베기에 지금 자신의 전력을 쏟아낸 유장위가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현경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에서도 유장위의 검격은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다.
각이 좋기는 했지만, 고룡 쉐이크의 머리뼈 중에서 가장 단단한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 버렸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그의 경지가 한 단계 올라 버린 이후 뻗어 낸 검격은, 그야말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했다.
파스스스.
본 드래곤의 집채만 한 뼈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경지가 상승한 상태에서의 베기이자 찌르기. 그건 고룡 쉐이크의 앞발, 그리고 날개 일부를 아예 재로 만들어 버릴 지경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였다.
“이게 아닌 거 같은데……..?”
그럼에도 유장위는 자신의 검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화경.
말 그대로 신의 경지. 자연경의 힘을 완전히 통달하고 그 이상으로 올라선 상태라면, 상대가 아무리 거대한 본 드래곤이어도 일격즉참이 가능했어야 하니까.
끄르르르르… 끄륵……!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유장위는 고통으로 몸을 떠는 본 드래곤, 고룡 쉐이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군. 그쪽도 보통이 아니구만.”
그러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우. 우오오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거대한 백골의 용이었던 존재.
그놈은 지금 새카만 흑룡을 연상케 하는 어둠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단어 그대로 상극이다.
불과 물처럼.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물 한 바가지를 끼얹으면, 한 번에 불이 꺼진다. 하지만 모닥불의 크기가 아주 크다면, 불길의 숨이 좀 죽을지언정 여전히 타오른다.
끄---루루루!
화악! 화악!
유장위의 천뢰검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고룡 쉐이크에 깃든 어둠이 그만큼 짙고 진한 까닭이다. 유장위는 그를 노린 거대한 검은 기파를 느끼고 몸을 피했다.
휘익. 삿!
축지.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접어, 한 걸음으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기예.
무공이라기보다 도술, 혹은 이능에 가까운 힘이었다.
그런 것을 의지의 힘 하나로 바로 구현하는 유장위. 그는 숨 한 번 쉬는 것으로 단번에 삼백 장이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음.……?!”
후욱! 후우욱!
하지만 놀랍게도, 고룡 쉐이크가 만들어 낸 어둠은 그의 지척에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아무리 신화경에 달한 유장위라도, 이건 좀 의외였다.
화아아악!
분명 쏘아져 나갔었는데, 유장위가 한순간에 삼 백장을 뛰어넘자 다시금 거짓말처럼 덮쳐 오는 검은 기류. 벌렸던 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지는 일격이다.
일렁일렁.
게다가 만만치 않았다. 한없이 어두운, 검은 기류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 둘. 그 진체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유장위는 들고 있던 검을 올리며, 슬쩍 끄덕였다.
“그렇군. 공간이 곧 시간인가.”
한 꺼풀 더 무언가가 깨달아졌다.
화라라락!
거대한 어둠이 보자기처럼 덮쳐 오는 가운데.
슷-!
소리조차 나지 않는, 어마어마한 일격이 쏟아져 나갔다.
덜컥. 쫘아아악!
촤아아악! 촤아아악!
그에 반으로 갈라져 버리는 어둠. 기이하게도, 유장위가 어둠의 장막을 벤 순간 끔찍한 어떤 무언가가 폭발성의 굉음을 냈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으아아아아… 아우으으으…….
“…마왕이라는 자가 참으로 채신머리가 없도다.”
유장위는 혀를 찼다. 베어 내고 난 뒤에야 조금 전 날아온 공격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
끄아르르르르… 허으으으…….
메아리치는 비명. 대략 1만의 원혼. 그것들이 서로 뭉쳐서 날아든 것이다. 레이스? 그런 종류의 것으로 묶을 수 있기나 할까.
후웅. 후웅!
“쯧…….”
원혼 일만은 서로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이면서 일만. 일만이면서 하나. 이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보고 있는 유장위도 난감했다.
“더럽군.”
스물스물.
마치 도자기의 가치와 같았다. 누가 내던져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도자기. 그걸 반사적으로 검으로 쳐 낸다?
그럼 그 도자기의 가치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반으로 쪼개졌든, 산산히 쪼개졌든, 깨짐을 당하는 순간, 그 그릇의 가치는 제로에 가깝게 바닥을 친다.
그게 고대의 것일수록,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녀 값비싼 도자기일수록 더욱 그 가치의 폭락은 크다.
당나라 시대의 채화도자기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지만, 그게 산산이 부서져 쪼개진 조각은 은 한 냥도 받기 어려운 것처럼.
스물스물!
“음……!”
그런 가치의 소실.
업이라 할까? 방금 유장위가 베어 버린 것은 일만에 달하는 원혼이었다. 그저 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만 명을 살해해 버린 업보가, 그에게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불합리하다.
분명 생명을 원혼으로 만든 것은 유장위가 아니라 본 드래곤. 그 안에 깃든 마왕이었다. 그러니 놈도 업보를 받았다. 하지만 근원이 달랐다.
선한 인간이 선행을 하면 더욱 그 덕이 쌓여서 빛이 나는 것처럼, 마왕은 존재 자체가 악이었다. 놈은 악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존재.
이미 오물 구덩이가 된 곳에 더러운 쓰레기를 좀 넣는다고 해서 성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한없이 악한 존재에게는 이런 잔학한 행위도 오히려 힘이 되었다.
스스스슥. 우득. 우득!
실제로 유장위가 베어 내어 소멸시킨 앞발의 뼈, 그것들이 수복되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반면 유장위는 불가해한 검은 기류가 몸에 덧씌워져, 하얀 옷에 묻은 오탁처럼 선명하게 격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마왕이기에 세상의 근본 법칙까지 비틀어 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역량. 그것이 여기에 드러났다.
치잉!
“고하나이다.”
유장위는 검을 들었다.
지금의 그는 신화경에 발을 들인 자. 상대가 법칙을 뒤틀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또한 법칙을 뒤틀거나 혹은 재정립할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세워 눈앞에 가져다 대며, 왼손의 검결지로 암흑의 본 드래곤을 가리켰다.
“천상의 상제시여. 중생을 측은히 여기는 불타시여. 여기 이곳에 바르지 않은 이치가 있나이다. 이 몸에 피를 묻혀, 제 소관으로 업보를 뒤트는 자가 있나이다…….”
슉. 슈슉. 슉.
휘둘러지는 검결지. 그 궤적을 따라 선명한 빛의 문자가 써졌다. 모습은 마치 부적. 고대의 한자인 갑골문이 길게 늘어져 허공을 수놓았다.
그 폭과 길이만 자그마치 3장에 달했다.
“까닭 없이 세상에 분노만 가득 찬, 뭇 생명의 의지에 방향을 보게 하소서. 죽은 후에 남은 상념조차, 아(我)가 없어 혼란스러운 자들에게, 더는 억울함에 묶이지 않게 하소서.”
우우우웅!
종이 없이 허공에 그려진 주문. 빛의 문자들이 휘황한 섬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제껏 써 본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유장위 역시 한때는 도문에 몸을 담았던 자. 그리고 유서 깊은 도문은, 단순히 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장삼봉이나 여동빈처럼 경지를 넘어선 초월자는 그저 검만이 아니라 천지교태에도 이해가 높아, 부적이나 주술을 쓰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을 신선이라 부르며, 지금의 유장위는 그 신선의 단계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급급여율령.”
행하기를 율법을 따르도록 빨리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휘아우웅!
빛나는 문자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유장위를, 그를 감싸는 어둠을, 그리고 아직 베어 내지 않았던 일만의 원혼과, 그들을 이용한 본 드래곤에게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파바밧! 퍽퍽!
끼---르르르!
본 드래곤이 기성을 지르며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지금 유장위가 쓴 것은 천제에게 바치는 상소문.
불합리하게 세상의 이치까지 비틀 수 있었던 마왕이다. 대마왕이라 부를 만한 존재다.
그렇다면, 상대가 그만큼 격이 높다면, 유장위 또한 그만한 격이 높은 존재에게 탄원하면 그만.
힘의 차이는 어쨌든, 자격 자체는 이미 그도 소신의 반열에 들어 있었다.
우르르릉! 파지지직!
수많은 빛의 문자가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휘오오오!
거센 바람과 함께 푸르던 하늘이 하얗게 갈라졌다. 그 아래로 푸슬푸슬 흘러내리는 꽃비. 복숭아 꽃잎이 나부끼며 떨어지는 화우.
그드드득. 끄르르륵.
----!!!
천상계의 문이 열리고, 검은 본 드래곤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 모습은 마치 흑도의 사파 무림인이, 길 가다가 마주친 포도아문의 관리를 보는 것 같았다.
“자아.”
유장위는 그 꼴불견의 모습에 웃었다. 비록 자신의 단칼로 베어 내지 못하는 것이 분하기는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싸움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자고로 싸움이란.
“어쩔 테냐. 열받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빡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