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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64화 (265/310)

264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5)

지이잉. 지이이잉.

빛이 있었다.

진한 노란빛 섬광. 가을날 저물어 가는 태양이 붉게 석양으로 타오르기 전의 색.

붉은 기가 살짝 도는 누런색은 진황이라 하여 황금을 뜻하며, 세상에 오직 천자(天子)에게만 허용된 고귀한 색이다.

쏴아아앗!

그런 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신성한 빛. 그 빛의 폭우에 맞은 검은 본 드래곤은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끄르르르……!

-크아아아악!

“호오.”

유장위가 감탄했다. 이제껏 저 마왕이라는 놈. 마계의 대공 바알이라는 존재의 의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였다.

악마어.

그저 들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타격을 주는 언어.

하지만 지금 느껴진 것은 의지고 뭐고 없이, 확실한 비명이었다.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꿈틀. 꿈틀.

-----!!!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한 것인가, 비명은 곧 다시 선명한 의지를 띠었다.

쩌억!

그리고 거대하게 벌어지는 본 드래곤의 아가리.

푸와아아악!

그 입에서 칠흑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먹물?”

흡사 문어가 물속에서 뿜어내는 먹물 같았다. 그걸 사방으로 뿜어내는 본 드래곤.

빛과 어둠이다. 서로서로의 상극. 짙은 밤하늘 같은 어둠이 매연처럼 뿜어져 나갔다. 신령한 서기가 내리쬐는 하늘을 향해.

후르르륵…….

파지직! 파지지직!

신성한 빛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상쇄가 일어났지만, 그 말은 저 어둠이 빛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것.

불과 물은 서로 상극이다. 상극끼리 부딪히는 경우엔 더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누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 그 강함은 용량의 차로 나타났다.

후르르륵! 쏴아아악!

본 드래곤이 뿜어내는 어둠은 구름이 되었다. 자연현상이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구름에, 찬란하던 하늘 저편의 천상계는 모습이 가리워졌다.

그저 천지조화로만 보일 현상이었지만, 유장위는 심히 감탄했다.

“…대단한데!”

흔히 초월적인 힘은 법칙조차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당장 검기가 그렇고 검강이 그렇다.

분명히 칼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 예리함을 형상으로 만들어서 쏘아내는 검기.

그리고 그 검기를 실로 삼아, 한없이 끌어모은 파괴의 일격인 검강.

어찌보면 물리법칙을 위배한 것 같은 힘이다. 일반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힘이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 힘을 알고 있다. 더러는 그 힘을 손에 넣고 발휘하기도 한다.

무럭무럭.

열(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엄연한 힘이다.

자력도 중력도 형체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때로는 그 무엇보다 막강한 힘이 된다.

그렇기에 기공을 다루는 무인이 존재하며, 마법을 사역하는 마법사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또한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눈앞의 1킬로짜리 철근을 손도 안 대고 들어 올리겠다 하면 다들 거짓말쟁이나 병신으로 본다. 그러다가 정말로 철근이 허공에 떠오르면 경악하며 초인으로 본다.

하지만 사실 그건 아주 간단한 이치. 그 누군가는 강력한 전자석의 스위치를 켰을 뿐이다. 그냥 자연의 법칙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무럭무럭! 좌아아악!

본 드래곤에 깃든 이계의 마왕.

그는 그런 자연법칙으로 천상계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을 막아 냈다. 쏟아지는 신성력이 ‘빛’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구름’으로 막은 것이다.

무릇 형태가 없는 것은 형태가 있는 것에게 밀리게 마련.

심검의 경지에 달한 검객은, 손에 검이 없어도 기를 뿜어내어 날카로운 기검을 만들 수 있다. 그 기검으로 검도 철도 바위도 다 벨 수 있다.

하지만 그 검객의 상대로, 진짜 검을 가진 동급의 검객이 맞서게 되면 어찌되는가?

결과는 뻔하다. 형태를 지닌 것과 억지로 형태를 만든 것의 충돌은 전자의 승리다.

이계의 마왕은 이 원리를 간단하게 써먹었고, 그걸로 중원의 천상에서 내리쬐는 공격을 손쉽게 막아 냈다.

무럭무럭. 좌우우욱…….

하나 그러는 바람에 그는 하나를 경시했다. 분명 천상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은 먹구름으로 막아 냈지만.

“정말 좋은 판이야.”

하늘을 온통 덮어 버린 짙은 먹구름.

그건 천뢰검을 익힌, 유장위에게 있어서 최고의 환경이었으니까.

우우웅---!

검이 진동한다. 화상의 송문고검. 그 검면에 새겨진 수많은 솔잎 모양의 무늬. 그것들에서 새하얀 빛의 알갱이들이 송글송글 올라와.

훗. 훗. 후훗.

먹구름 속으로 쏘아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우르르르릉…….

뇌성이 울렸다. 짙은 먹구름이 천지를 울리는 굉음을 토해 냈다.

끄르르르……!

검게 물든 본 드래곤. 녀석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또한 형체를 지닌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무리 내면에서 조종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 해도, 지금 현세에 물질로서 있는 것은 고룡 쉐이크였다.

녀석은 유장위의 천뢰검에 이미 여러 번 지독한 고통을 받았다.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지고, 몸의 여러 부분을 소실당했다. 아무리 지성 없는 언데드라 해도, ‘무의미한’ 소멸에 대해서만큼은 두려움을 가지는 법.

----!!!

노기로 가득한 의지가 크게 호통을 쳤다. 고작해야 필멸자를 앞에 두고 불멸의 존재가 멈칫거린다? 그 몸에 깃든 마왕의 체면이 와그작 구겨진 셈이었다.

“핫핫핫……!”

유장위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핫핫핫핫……!!

우르릉. 우르르릉!

모름지기, 뇌는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이다. 쇳덩이도 바윗덩이도 쪼개거나 뒤틀어 버리는 힘. 천년 거목을 일격에 두 조각 내며 활활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핫핫핫핫… 우르르릉!

그런 힘을 품은 먹구름이, 격한 떨림을 드러냈다. 유장위의 웃음소리가 뇌명이 되어 함께 하늘을 두드렸다. 칠흑처럼 검었던 하늘에, 새하얀 실선이 끝없이 드러났다.

지지직. 지지지직.

벼락이 치기 전.

민감한 이는 느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살갗의 솜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연현상은 항상 전조를 보인다. 지진조차도 큰 지진이 오기 전에는 주변에서 원인도 모르게 악취가 풍긴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지의 속에 깃든 공기 방울이, 격한 압력을 받아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끄르르르…….

----!!!

본 드래곤이 신음했다. 어쩌면 두려움의 표시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몸에 깃든 이계의 마왕이 강제로 억눌렀다. 그걸 본 유장위는.

“그 하늘. 십만 팔천 리. 바람보다 빠르게 이어지니.”

시구를 읊었다. 어느 시성의 유명한 시구가 아닌, 그 본인이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만드는 시였다.

바---지지직!

그럼에도 하늘이 울었다. 정확히는 먹구름 속에 머물던 뇌정이 유장위의 의지에 반응했다.

“부수지 못하는 것 없고, 죽이지 못하는 것 없도다.”

빠---지지직!

먹구름과 먹구름 사이에서 실선이던 빛이, 굵은 털실처럼 두께가 더해졌다. 점점 밝아지고, 더욱 사납게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 힘. 여(如)의 화살과 같아, 땅 위의 모두를 두렵게 하니.”

쫘아아악!

한계에 달한 먹구름이 시허연 빛무리를 뿜어냈다. 끔찍할 정도로 두텁고, 수백 수천의 가지를 친.

아니, 정확히는 하늘에 수백 수천의 뿌리를 둔 거대한 벼락이 흡사 나무처럼.

“하늘에 눈이 없다 하는 이 누구냐. 여기 악인을 내리치노라.”

따----앙!

그대로, 본 드래곤의 머리 위로 어마어마한 전격(電擊)이 내리꽂혔다.

* * *

드드득. 드드드득.

“으… 윽!”

뇌명은 흔히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한다. 멀리서 들은 이는 그럴 리 없다 말하고, 가까이에서 들은 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며 부정한다.

꽈---르르릉!

하지만 정말로 지척, 낙뢰가 강타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들은 이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말한다. 가청범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지진이나 화산 활동 등, 끊임없이 일어나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걸 듣지 못한다. 들었다간 살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거대한 소리.

너무도 커다란 충격.

그걸 상시 겪는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서 계속 호흡을 죽이고 있어야 한다.

“끄… 으으윽…….”

“서, 서문영? 왜 그래! 괜찮아?!!!”

그래서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게 당연했다. 멀리서 들리는 뇌성 정도야, 이제 막 때려잡은 언데드와 괴물 파리 떼에 비해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아… 아아아… 으으으…….”

하지만 서문영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 뇌격이 하늘을 찢어발기는 소리. 그리고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몸이었다.

그건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주르륵… 우웨엑!!!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곧 속에 든 것들을 게워 냈다. 깜빡깜빡 찰나간에 기절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서문여엉-!”

“안 돼! 만지지 마! 그랬다가 죽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서문영. 그를 부축해서 정신 차리게 하려던 방윤이 날카로운 제지에 멈칫했다.

타닥. 툭툭. 철퍽.

운소령이 달려왔다. 서문영을 붙잡은 방윤의 손을 떼고, 머리의 혈도 몇 개를 짚은 다음, 사정없이 땅에 내팽개쳤다.

“너……?”

“건드리면 안 돼. 천고의 기회야! 스스로 뇌명을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

운소령의 다급한 말에, 방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아는지는 의문 가질 것도 없었다. 그녀는 운소령이니까. 수많은 학식을 쌓은 제갈세가의 여식이니까.

하다못해 서책을 통해서라도 보았을 것이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호법. 좀 도와줘. 주변에 아무것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촤---르르륵!

급하게 금줄이 쳐졌다. 서문영이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떠는 가운데, 엘리트 파티원의 반절은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서문영을 지켰다.

“으… 으으… 으으…….”

토하고, 눈을 뒤집고, 전신을 경련하는 서문영.

“저… 진짜 가만히 둬? 포션이나 정화술이나 그런 거 안 쓰고?”

“절대 안 돼. 죽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죽을 거야. 기껏 얻은 경지를 잃어버릴 수 있으니.”

이러든 저러든 확실히 죽는다는 말이다.

무인이 몇 차원이나 높은 경지에 천운으로 발을 들여놓았는데, 혹 그러다가 죽을까 봐 각성의 경지에서 강제로 깨어나게 한다?

성질 더러운 무인이라면 살려 준 사람을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서문영처럼 고지식한 명문가 출신이면, 차마 다른 사람은 죽이지 못하고.

“…자살하겠네. 그럼.”

빠지직! 빠지지직!

이젠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뚜렷해졌다. 정신을 잃은 서문영. 그의 몸에서 튕기듯 작게 튀어나오는 섬광.

그건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뇌기였다.

‘세상에… 어떻게 약관의 나이에 이런……!’

운소령은 속으로 탄성을 지르고 소름이 바짝 돋았다.

방윤의 생각처럼, 그녀는 이런 경우를 서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때로는 가문의 어른들에게 말을 듣기도 했었다.

어마어마한 영향.

혹은 본인 스스로가 준비되었을 때.

확실한 건, 의지나, 이성이나, 숙달된 노력이 아니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흥을 통해 찾아온다는 것이다.

화산파의 독문무공이 매화인 것처럼.

무당이 수많은 도가 문파 중에서도 유독 태극을 으뜸으로 치는 것처럼.

“으으… 윽! 으윽! 끄으윽……!”

지금 서문영은, 벼락에 대해 무언가를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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