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66화 (267/310)

266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7)

격의 차이.

쥐가 고양이를 이길 수는 없다. 어지간히 뻘짓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보다 한 차원 낮은 존재에게는 패하기도 힘들다.

분명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말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물었을 뿐, 쥐가 고양이의 멱을 땄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마지막 발악에 놀라 주춤하게 만들었다는 것뿐.

결국 승리는 정해져 있다. 고양이가 이긴다.

쥐가 얻어 낼 수 있는 최대의 성과라고 해 봐야, 고양이 코끝 한 번 물어뜯고, 제 몸을 무사히 빼내는 정도.

하나, 그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의 확률이다. 구천 번, 혹은 구백 번은 쥐가 고양이에게 뜯겨 죽는다.

그조차 만의 하나의 가능성이고, 기본으로는 쥐구멍-쥐가 생활하던 영역권이 삽시간에 토벌된다.

인간으로 치면 집과 밭이 한순간에 몬스터에게 박살 나고,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래 놓고 몬스터 한 마리를 잡았다? 그건 승리라고 볼 수 없다.

-크흐흐흐.

바알이 지나치게 여유만만했던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유장위라는 인간. 운 좋게 초월자의 기틀에 발을 들인 필멸자와 자신의 차이는 그 정도였다.

쥐와 고양이의 체급 차. 아니, 쥐와 호랑이 정도의 체급 차이였다.

꽈르릉! 파직! 파지지직!

끽해야 벼락이라는, 제법 따끔한 조각을 가지긴 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해도, 날카로운 쇳조각이 입에 들어가면 피는 흐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고작 한 치 깊이의 칼날은 호랑이를 죽일 수 없다. 쥐들 사이에서야 엄청난 피를 뿌리고, 자칫 내장까지 긁어 낼 수 있겠지만, 호랑이에겐 그저 성가신 상처였다.

파지지직! 꽈아아아릉!

-흐흐흐흐…….

끝없이 퍼지는 뇌성벽력. 물기가 잔뜩 묻은 몸에 떨어지는 전격은 분명 위력이 있었다. 바알 또한 어느 정도는 감탄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힘일 뿐.

“허억… 허억…….”

유장위의 안색은 점차로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핏기가 가시고, 수염과 눈썹이 희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그의 육신이 조금씩 소실되어 가고 있었다.

사아아아…….

처음에는 손끝에서 천천히 진행된 무화가, 이제는 손목을 거쳐 팔뚝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스스로의 근원을 터뜨려서 겨우 끌어내는 힘.

-애처롭구나. 필멸자여.

눈에 찰 리가 없다. 벼락을 뿜어내는 검은 점점 약해졌다. 이미 제 존재를 소멸시키면서 날아오는 정화력. 그건 괜히 하악질을 하며 털을 곧추세우는 고양이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가소롭고, 그렇기에 즐거웠다.

-자비로운 제안을 하마. 지금 그 검을 내려놓고 내게 절하라.

-네 부족함을 알고 내 권위를 찬양하라. 그리하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고, 무한한 힘과 부귀를 누릴 것이다.

마왕과 대결하는 용사의 이야기. 수많은 레퍼토리에서, 주야장천 등장하는 제안이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영생을 준다. 힘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준다. 하는 제안들.

-네 힘은 비록 미력하나, 감히 내게 대들고도 아직 남아 있는 네 정신을 가상하게 여기노라. 그러니.

-주제를 알고 굴복하라. 그리하면 세상이 네 것이 되리라.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은, 그러는 경우가 실제로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마왕의 제안을 거부하는 용사와 달리 한도 끝도 없는 마왕의 힘, 그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고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용사가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달리 마왕인 것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바알의 뒤에서 한 무리의 검은 전사들이 모습을 비췄다.

그 수는 약 일백.

한때의 영웅이었고, 신화와 전설에 내려오는 힘을 갖춘 존재들.

분명 마왕에게 도전하는 기치는 영광스러운 것이었고, 명예와 이상에 부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수는 각지의 민담으로 전해지는 것만 해도 수천 혹은 수만.

그랬음에도 마왕이 아직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당연하다. 마왕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결코 인간이 이겨 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덤비는 정신 나간 쥐가 한둘 있어 봤자,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쥐는 호랑이의 찬거리조차 안 되는 법.

-보이느냐? 이들이 모두 내게 굴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중 너보다 약한 이가 몇이나 되느냐?

때문에 바알은 느긋했다. 자신이 이제껏 수집했던 수많은 맹장과 타락한 용사들의 모습을 비췄다.

개중에는 용의 피를 이은 이도 있었고, 더러는 흐려졌지만 신이나 천족의 피를 이은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혈통의 우월함 없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쌓아 올린 이는 수십 배로 많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위명이, 현경에 오른 유장위보다 높았다. 이런 것을 보고도 저항할 마음이 든다면, 그건 실로 어리석은 것이니.

-마지막이다. 무릎을 꿇고 내게 복종하라. 그러면…….

쉬이익! 차악!

바알의 실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만한 강함을 가지고도 앞뒤를 못 가리는 인간이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팟! 치직!

-…참으로 어리석구나.

신혈. 고귀한 금색의 피가 튀었다.

우우우웅!

비록 지금은 마왕이라 불리지만, 바알은 단순히 사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한때는 풍요와 다산의 민족신이었던 존재. 나중에 수많은 날조와 비방으로 악마화되었을 뿐.

증. 증. 즈즈증!

-충들의 수많은 날갯짓이 있으니, 네 바르작거림은 그저 묻혀 사라지리라!

수많은 방호와 수호의 권능이 일어나, 유장위를 덮쳐 갔다.

“…벤다.”

쒜에에엑! 퍽!

벼락의 힘이 거의 바닥나, 이제 거의 흐릿하게 변한 검강이 먼저 구축된 방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보았느냐. 이것이 너와 나의 격차…….

“벤다.”

쒜엑!

바알이 한마디 더 하려는 때에 유장위가 다시 일검을 휘둘렀다.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그의 검격은, 이제 검강이라고 보기도 힘든, 미약한 검기 수준이었다.

-이제…….

“벤다…….”

휘릭! 칭!

칭!

칭!

칭!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 한없이 높게 솟은 검은 벽을 향해 유장위는 그저 베고 또 벨 뿐이었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마왕으로서의 오만함이 아닌, 절대자로서의 품위 또한 있었던 바알이 탄식했다.

완전히 검에 사로잡혀, 근본까지 잡아먹힌 존재.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유장위는 그런 존재였다. 오로지 베고 베어 죽이는 것만이 목전에 있을 뿐. 고귀함도 없고, 강인함도 없는, 미쳐 버린 검귀일 뿐이었다.

“벤다.”

치잉! 스걱!

이미 그 움직임에는 의미가 없고, 의지 또한 없었다.

남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저 베겠다, 고 하는 망집일 뿐.

바알은 자신의 감식안이 이번에는 잘못 짚었음을 인정했다.

-가치없는 축생에게 말을 섞었구나.

본 드래곤이었던 검은 존재가, 두 손을 모았다.

스스승.

그와 함께 일어나는, 검고 검은 한 없는 어둠. 밤하늘 같이 캄캄한 암흑이 유장위를 좌우에서 짓눌렀다.

“으… 읍……!”

빛과도 같은 그림자. 한조각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정 반대로, 한없는 어둠이 유장위를 집어삼켰다. 잠시 잠깐 선계에와의 통로까지 열어젖혔던 현경의 고수는, 큰 물바가지에 휩쓸린 모기처럼, 정처 없이 휘말리다가 사그라들었다.

꾸욱. 부트득.

검고 검은 손아귀가 그의 몸을 빨래처럼 짓이기고,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제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스걱.

한데, 그 순간 그의 안면에 금이 갔다.

-…무엇?

칙!

극히 가벼운 소리.

치직!

섬전도 우레도 없는, 아주 가벼운 바람 같은 베기.

피식!

뇌전은 이미 사라졌다. 더는 속성에 기대 얻을 수 있는 정화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무슨!

칙! 파지직!

검고 검은 어둠을 비틀어 열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유장위가, 한 가닥 면도날 같은 틈을 비집고 몸을 드러냈다.

“벤다.”

오직 한마디.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갈망. 그 집념이 억겁과 같아, 생사의 판결조차 넘어서는 갈증.

그것이 지금의 유장위였다. 그 진체를 보고 바알은 탄성을 흘렸다.

-미친놈이로구나…….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격과 궤에 관한 법칙.

검으로 하늘을 베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욕망과 망집이었다. 원래라면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그저 한 칼잡이의 터무니없는 큰소리였으나.

“벤다.”

싯! 촤악!

지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반신반마인 바알의 실체. 악으로 뒤덮인 검은 형체를 찢어 날리는 검격. 그 안에는 중도 쾌도 없는, 한없는 예리함만이 가득했다.

-하.

“하.”

싯! 촤악!

검게 덮인 얼굴의 일부가 베였다. 어둠 아래로 빛이 섞인 혼재된 영체가 잘려 나가, 허공에 흩어졌다.

분명한 부상. 신의 존재에까지 이빨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아무런 격도 깎아 내지는 못했으되.

-훌륭하다. 잘 벼리어진 전사여.

“훌륭하다. 잘 벼리어진 전사여.

바알의 목소리가 점차 실체를 가진 육성으로 변해 갔다. 우렁우렁하던 신성의 목소리. 차원과 차원의 서로 다른 간섭을 통해 일어나는 괴리가, 그 괴리조차 베어 내는 검격으로 인해 현실에 닿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장위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를수록.

바알은 이 현세에 더더욱 모습을 투사하기가 쉬워졌다.

“벤다…….”

싯. 챙강!

검격은 점차 무게가 사라졌다. 궁극에 달한 예리함은 굳이 질량을 가지지 않아도 무언가를 벨 수 있었다.

싯.

싯.

싯.

행위조차 의미가 없었다. 이미 심어검. 마음이 가는 대로 적을 벨 수 있으니, 거리도 시간도 의미가 없고, 그저 의념이 있을 뿐이었다.

싯. 싯. 싯. 싯. 싯. 싯. 싯. 싯. 싯. 싯. 싯. 싯.

그리하여 그 ‘베겠다’는 의념이 극에 다달았을 때.

쨍그랑!

가벼운 금속음이 일고 이제껏 수천 수만의 검격을 쏘아낸 송문고검이 가녀린 비명을 토해내며 깨어졌다.

잘그락. 후드득.

그 심지까지 완전히 타 버린 촛불처럼, 자잘한 쇠 부스러기를 흩으며 바스러져 버린 검.

“베었다…….”

툭, 풀썩.

그 검과 함께 유장위도 부스러졌다. 그 몰골은.

“…그래. 훌륭하다.”

처참했다. 선풍도골이었던 그의 모습은, 전신을 칼로 저며 낸 듯이 끔찍하게 깎여져 있었다.

신검합일. 한없이 예리하게 벼려 낼 수 있는 검을 휘두르려면, 먼저 자신의 신체가 검이 되어야 했다. 예리함. 베어 냄. 그 하나를 위해서 극도로 쥐어 짜내인 것.

“네 비록 내 것이 되지는 못하나, 내가 기억하노라. 훌륭한 검이여.”

“…….”

바알의 거대한 손이 유장위의 머리를 덮었다.

스스슥.

그리고 먼지처럼 흩어지는 유장위의 육신.

한때 선경에서도 불렀던 그의 존재는, 뼛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졌다.

존재 의의.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서 행하며, 죽은 후에까지도 남아야 할 그것조차 소모해 버린 이의 최후였다.

“실로… 놀랍군. 이토록 집념에 가득 찬 인간이라니.”

“그러게. 반쪽짜리이긴 했지만.”

“…….”

바알의 검은 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본인은 신화경인 줄 알았겠지. 그러니 그렇게까지 정신머리 없이 썼을 테고. 그런데 그거… 그냥 현경의 벽이었거든.”

“그대는 누군가.”

“천마.”

휘익. 탁.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려앉는 천마. 그가 2미터 50의 장신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천마신교 23대 교주 구옥경. 이 세상의 주인이다.”

한없이 오만하고 거만한 자태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