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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67화 (268/310)

267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8)

“프흐흐흐…….”

마계의 대공 바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근 1장에 달하는 거체.

조각처럼 탄탄한 그의 몸은 정말 대리석 조각으로 이루어진 듯, 희고 중간중간에 검은 무늬마저 아로새겨져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밤처럼 검었다. 그 아래로 하얀 천을 걸친 미려하고 장대한 거인.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영락하여 악마가 되긴 했으나, 바알은 한때 한 지방의 고위 신이었다.

“뭘 웃냐. 재수 없게.”

물론 천마가 보기에는 괜히 겉멋만 든 덩치였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그대가?”

“어, 지금 이 땅에서 나보다 강한 놈은 없으니까.”

천마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살아생전, 자신과 대적할 만한 존재를 찾지 못했던 그다.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서 한 점 부끄럼 없이 꺼낸 말에.

“오만인가. 그리 자처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

바알이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오명과 낭설로 인해 격이 추락하였으되,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바알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마안.

힘의 흔적을 보는 즉시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부족해? 내가?”

“그래. 그대는 이 땅의 주인, 리치왕에게 이미 패한 몸이지 않은가.”

쿠욱.

허공을 격하고 바알의 긴 손가락이 천마를 찔렀다.

“…이 새끼 보소.”

덕분에 얼굴이 꾸깃 하고 구겨진 천마. 그는 혀를 찼다.

리치왕. 분명 자신이 그 해골바가지에게 크게 깨지긴 했지만, 그건 자그마치 140년이나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걸, 오늘 처음 만난 놈이 바로 척하고 짚어 내는 건 꽤 소름 돋는 기분이었다.

“진 게 아니라 무승부였거든? 그리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덕분에 상당히 불쾌해진 천마에게, 나지막하게 웃는 바알.

“척 보면 보이는 것. 아직 그런 것도 모르는가?”

쭈욱.

마안으로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천마를 훑어본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히 잠깐이나마 반신(半神)의 위에 올랐던 자가… 본인의 격도 모르는가. 그럼에도 이 땅의 주인을 자칭하다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그의 태도는 대단히 기품이 있었다. 애초에 생김새부터 근사했다.

귀족, 아니, 왕이나 황제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오만함은, 천마의 오만함과 태생부터 달랐다.

“격? 반신?”

“그것도 모르는가? 이 땅에는 대단한 초월자는 없었던 모양이지.”

천마가 갸웃하자 바알은 다시금 실소했다. 그리고.

“보라. 이 몸의 힘을.”

그그극. 드드드득.

말과 함께, 일순간 바알의 기세가 급격히 치솟았다.

가히 산이 일어서는 듯한 어마어마한 감각. 그건 세상 무서운 것 없던 천마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이건.”

꿀꺽, 하고 침이 삼켜졌다.

구구구. 구구구구.

느껴지는 바로는 최소 자신과 동급.

그리고 점점 더 불어나는 기세는, 그 이상이라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에 천마는 호쾌하게 웃었다.

“…흐흐. 하하하!”

가슴이 뛰었다.

강자와의 승부. 그것도 까마득히 역량이 높은, 승부를 가늠할 수 없는 싸움.

정말 모처럼의 기대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날 지경이었다.

“호오?”

그렇게 크게 웃는 천마를 보고 바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느끼기로 상대의 역량은 자신의 3할 이하.

분명 인간치고는 제법 강하긴 하지만, 자신의 상대는 안 된다. 아마 상대 역시 자신의 본신 전력을 충분히 느꼈을 터인데,

이제껏 만난 수많은 대영웅들과 달리, 긴장은커녕 오히려 웃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기에.

“왜 웃는 것이지?”

“아, 뭐. 정말 오랜만에 싸움 한번 해 보겠다 싶어서.”

“…싸움을 즐기는군. 조금 전의 그 검사와 같은 부류인가?”

바알의 얼굴에 조금 불쾌감이 어렸다.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검사는 아름답지만, 아예 싸움에만 미친 검귀는 우아하지 못하다.

“그 검사? 아, 유장위? 다르지, 달라. 녀석은 검에 잡아먹힌 놈이지만.”

천마는 씨익 웃으며 그의 검, 검고 두터운, 반토막 난 듀랜달을 휘둘렀다.

부우웅!

“나는 검을 잡아먹은 몸이라 이 말이지.”

“…호오.”

“그리고 하나 더. 너 나더러 반신이니 격이니 하면서 그런 것도 못 보느냐고 거만 떨었는데, 나야말로 네 녀석이 보이거든. 너.”

히이죽.

천마는 바알을 향해 척, 검을 겨누었다. 조금 전 바알이 자신을 상대로 한 것처럼.

“싸움은 별로 잘 못하는 놈이지?”

“……?”

“정확히는, 너보다 더 강한 놈하고는 싸워 본 적이 없는 놈이네. 기세는 분명히 대단한데 물몸이라고. 이제껏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기만 해 왔겠지?”

“……!”

어느새 얼굴이 굳은 바알. 한때 한 지방의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던 존재에게 천마는 처억, 검을 들어 역수로 쥐었다.

“권능이라. 뭔 소린지 대충은 짐작 간다. 탈마에서 신마경 가는 길에 줍는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리고 나는 말이다. 나보다 강한 녀석들을 때려잡는 게 취미라고!”

화악!

역수로 쥔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걸 띄우자마자 천마는 크게 검을 휘둘렀다.

“멸절공!”

콰르르륵!

허공에 보랏빛 음산한 불꽃이 피어났다. 초생달의 형상을 만들며 쏘아져 나가는 불꽃.

착.

그에 바알은 눈을 크게 뜨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겁화의 주인이여!”

쩌억!

그리고 두 손을 벌린 순간.

촤악! 퍼어억!

멸절공이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마치 강제로 좌우에서 잡아 뜯은 것처럼.

쉬이이익…….

그리고 나타난 인영. 두 손에 불을 가득 담고, 도마뱀의 머리를 한 괴인이 바알의 앞에 나서 있었다.

이글이글. 후르륵.

맹렬한 불꽃을 피워 올리는, 반투명한 리저드맨. 그 모습에 천마는 살짝 눈이 커졌다.

“…소환수?”

“그런 저급한 자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라. 필멸자여. 나는 수많은 권속들을 다스리는 이들의 군주일지니.”

쇄애애액!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듯이 리저드맨이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불꽃은 자줏빛이었다. 멸절공에 결코 꿀리지 않는 강렬한 화염.

쿠와아아아악!

그 화염이 사방팔방을 태우며 피어오르자, 천마의 얼굴도 살짝 굳어 버렸다.

“…장난 아니네.”

치직. 치지지직!

머리카락 끝이 오그라들고, 입고 있는 옷에 쭈글쭈글 주름이 잡힌다.

덕분에 천마는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려 몸 주위에 둘러야 했다. 이대로라면 싸움에 앞서, 입은 옷이 홀라당 타서 알몸이 드러나 버릴 지경이었으니까.

그만큼, 열기 하나는 끔찍한 수준으로 뿜어내는 놈이었다.

“성질나게… 대열참!”

붕부웅. 휘이익!

천마는 두터운 검은 검을, 풍차 돌리듯 크게 휘둘러 참격을 쏘아냈다.

과아아악!

매섭게 소용돌이치는 검기가, 톱날처럼 삐죽삐죽 이빨을 드러내며 뻗어 나갔다.

리저드맨이 불꽃으로 그걸 상쇄했지만.

쇄애애액!!!!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크게 튕겨 나갔다. 그와 함께.

꽈릉!

폭음이 일고 대지 한 부분이 크게 패였다.

강기였다. 천마의 대열참. 그건 검기의 다발 사이에 압축된 강기를 숨겨서 던지는 방식이었다.

이를 맞게 되면 이름 그대로 갈기갈기 크게 찢어지는(大裂) 부상을 입는다.

“치졸한 수다!”

“앗핫핫핫!”

심지어 불꽃으로 겉을 가리고 안에 심어 넣었으니, 상대는 눈싸움을 하던 도중, 속에 돌을 넣은 것을 얼굴에 맞은 격이었다. 대마왕도 기가 찰 정도의 치사한 수법.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냐? 고작 이 정도로…….”

치잉!

기고만장하게 웃던 천마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드득.

머리카락 한 움큼이 흩뿌려졌다. 섬뜩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낫이 그의 머리를 노린 것이다.

“이 뭔 씹……?”

크으으으으…….

돌아보니 서역에서 사신(死神)으로 불리는 존재. 그림 리퍼였다. 거대한 체구에 죽음의 낫을 장비한, 해골 형상의 유령.

우오오오. 휘이이이이!

공기가 칼날처럼 변했다. 동시에 그림 리퍼의 주변을 감싸며 맹렬한 귀곡성이 불어 닥쳤다.

우우우웅. 팩! 패액! 팩!

그 끝에서 뻗어 나오는 엄청난 강철의 기세.

“우웃!”

퍽! 쇄각! 카드득!

대검으로 방어했지만, 천마의 머리끝이 베어져 나가고, 검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마어마한 압력. 그리고 막대하게 생기를 잡아먹는 흡입력.

‘이거, 이 정도면…….’

다른 검이라면 절대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지금 천마가 들고 있는 것은 부러지지 않는다는 명검, 듀랜달. 그것이 생전의 롤란드의 타락으로 부러져 버린 존재다.

이를테면 마에 물든 성검이라 할 수 있었다. 부러지지 않는다는 축복을 받고도 부러져 버린, 그래서 더더욱 그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되살아난 검.

“와, 썩을. 무시무시한데…….”

그런 검이었기에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림 리퍼. 모든 생명을 수확해 버린다는 사신의 낫은 단순한 예리함이나 파괴력이 아닌, 절단의 권능을 품고 있었다.

쿠와아아아……!

시커먼 안와. 눈구멍 안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해골. 놈이 다시금 거대한 낫을 휘둘러 왔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보기만 해도 주저앉아 오줌을 지릴 끔찍한 압박.

“후…….”

처억.

천마는 그에 검을 잡은 자세를 바꾸었다.

왼손을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고, 검을 든 오른손은 뒤로 살짝 뺀 채로.

스가각! 후우웅!

“차아---압!”

강렬한 찌르기를 찔러 넣었다. 선으로 덮쳐 오는 공격에 대해 점으로 집중하는 공격.

퍼… 걱! 파스슥!

“…휴우.”

그저 일섬. 극한의 빠르기로 쏘아 낸 찌르기는, 사신이라 불리는 존재를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한숨 돌리려던 천마는.

철컥. 철컥.

“…….”

살짝 얼굴이 굳었다. 도마뱀 괴인과, 그림 리퍼를 처리했는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온갖 무기와 병기를 장착하고 걸어 나오는 십여 마리의 괴이한 영체들.

탁. 쫘악.

탁. 쫘악.

“분명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냐고 했겠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두 손을 마주 잡았다가 다시 좌우로 펼치는 바알이 있었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며.

“그럼 굳이 일대일을 고집할 이유도 없으렷다?”

여유 있게 웃었다.

탁. 쫘악.

탁. 쫘악.

손을 펼칠 때마다 늘어나는 그림자.

“…하하.”

십여 개의 영체는, 곧 수십 개의 영체가 되었다. 그건 보는 사람이 기가 질리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전사, 검사, 기사, 심지어 마법사나 주술사까지.

그 하나하나가 대마왕 바알의 트로피, 혹은 컬렉션이었다. 자신에게 대항하다 스러져, 결국 굴복하고 만 수많은 영웅들. 그들의 영혼을 이 자리에서 한껏 풀어 놓은 바알.

“하하하하!!!”

“…웃어?”

그런 그를 보며 천마가 웃었다. 분명, 이번만큼은 그도 등골에 식은땀이 다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겠는데!!!”

이글이글!

투지에 더욱 불이 붙었다. 도박사처럼.

자신에게 펼쳐진 패는 허약하고, 상대의 패는 강대하다. 판돈은 어마어마하고, 누가 봐도 패배할 확률이 9할.

가치 낮은 패를 받고도, 우세한 패를 지닌 적을 고꾸라뜨릴 때의 쾌감. 그걸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숫자는 백 미만… 이 정도면 놀아 볼 만하겠군.”

“말로는 무얼 못 할까.”

바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솨솨솩. 솨솨솨솩.

수십, 수백으로 갈라져 늘어난 천마의 그림자에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천마군림보.

환상이자 실제인, 마교 최강의 보법이 극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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