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9)
쏴아아악!
천마가 제일 먼저 상대한 것은 야성적인 느낌의 장창수였다. 머리에 공작새 깃털을 달고, 온몸을 털가죽 갑옷으로 두른 그는, 천마가 다가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부우웅! 패릭!
실린 힘이 심상치 않다. 창날만이 아니라 휘두르는 창대에까지 경력이 실린 일격.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와중에 천마는 서슴없이 일검을 찔렀다.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푸욱!
하나 상대의 왼팔에 막혔다. 과연. 첫 인상부터 강인하더니, 급소를 막기 위해 신체를 내어 주는 것도 거침이 없다. 한데.
크큭.
‘웃어?’
그 순간, 싸하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던 천마는, 덜컥 하는 충격에 잠시 의식이 나갔다.
뻑!
직후, 뒤통수에서 뭔가가 후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윽, 이런. 씨앙-!”
휘청!
호선을 그리는 휘두르기를, 분명히 피해 냈음에도 미증유의 추가 공격이 있었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드득! 파각! 파각!
“끅!”
연속으로 들어오는 공격. 제각기 힘의 방향이 다르게 들어오며, 그대로 두개골이 골절. 뇌수를 튀기며 머리가 박살 나 버렸다.
크륵. 크크크.
천마의 숨을 끊은 고대의 영웅은 비웃음을 지으며 붕, 붕,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그의 턱주가리가 산산이 박살이 났다.
뻑. 크륵……?
끄이이이!
뼈와 살이 튀고, 턱 아래가 날아간 장창수는 기이한 비명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퍽! 빠직!
그 머리를 주먹으로 날려 마무리하며, 다른 천마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창의 작은 날로 힘을 뿜어내는 건가. 괴이하군.”
상대의 무기는 외날 창이 아니라 겹날 창. 굳이 말하자면 여포가 써서 유명해진 방천극 같은 것이었다.
큰 날의 용도가 찌르고 베어 내는 것에 맞춰져 있다면, 작은 날 월아의 용도는 상대의 무구를 걸어서 당겨 흔드는 데 목적이 있다. 그게 일반적이다.
한데 방금 이 장창수는, 큰 날만이 아니라 작은 날의 사용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
보통은 부가적인 장치로만 보고 무시하는 작은 날을 통해, 검기 비슷한 것을 충격파로 쏘아 낼 수 있었다.
“방심 유도… 가 아니라 양쪽을 다 취했군. 아무래도… 컥!”
푸슉!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의 가슴에서 피가 솟았다.
휘우듬하게 휘어진 새파란 칼날. 억지로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쇠사슬로 연결된 낫을 든 전사- 혹은 암살자가 거기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제기랄. 무슨 기척도 못…….”
퍽. 퓨악!
날카로운 낫이 사정없이 천마의 가슴을 갈랐다. 등에서 목까지 쫙 갈라진 천마가 신음과 함께 쓰러졌고, 그와 함께 그 신형이 훅, 하고 사라졌다.
“……?!”
낫을 든 전사- 아니, 암살자의 몸이 굳었다.
그는 분명 손에 확실한 감촉을 느꼈다. 그런데 쓰러뜨린 적의 신형이 사라지다니?
투웅.
흑의를 두른 그가 흠칫하며 발을 박찼다.
우득!
하지만 머리 위, 막 몸을 빼려고 했던 그 방향에서 어마어마한 압력이 가해졌다.
“커…….”
뿌드득!
곧바로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몸은 민첩했지만 두터운 근육이 없었던 그는 내려찍는 상대의 힘보다도, 전력을 다한 자신의 점프력을 버텨 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목을 부러뜨린 것이다.
털썩.
“씁, 장난 아니네. 거의 신월단주 수준인데?”
낫을 든 전사를 쓰러뜨리고, 또 하나의 천마가 나타나며 혀를 찼다.
신월단.
저 멀리 회회교의 암살자들로, 원래라면 중원까지 들어올 일도 없는 녀석들. 실력의 증진을 위해 내력이나 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닌, 요가와 약물을 병행하는 놈들이었다.
그래서 대개는 수준이 하찮다. 신체의 수련이 아니라 이물로 능력을 얻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거기서도 대장을 해먹을 놈이면, 선천적으로 내기를 운용하는 방법을 깨닫는 법.
차크라 발현이라고 하는 괴이한 내공심법을 쓰던 신월단주. 그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천마조차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던 놈이었다.
“아무래도… 하나하나가 현경급인 거 같은데?”
두근두근. 두근두근.
타악!
도약하는 천마의 가슴이 뛰었다. 고만고만한 잡졸들이 아닌, 하나하나가 자신과 비슷한 역량을 가진 이들.
퍼억! 푸욱! 파악!
그 수가 거의 백에 가깝다. 놈들의 수에 맞춰서 늘린 분신이, 한 수 차이로 여기저기서 도륙당하는 상황.
하나하나가 허상이면서 실제. 그런 천마군림보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라 해도 진작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말았으리라.
“하하하! 아하하하!”
하지만 그랬기에 천마는 즐거웠다. 일순간에 수십의 영웅을 쓰러뜨리고, 동시에 자신 또한 수십 번 죽어 나가는 느낌.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한 자락.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기감은, 평생 그가 추구해 온 자극이었기에.
쐐애액! 쇄쇅. 타다닥.
화살이 마법처럼 휘어져 날아온다. 피해서 옆의 노인을 집어 들어 막은 천마. 그는 몸을 도약해서 적의 머리위로 날아 올랐다가 잠시 멈칫했다.
“……!”
상대는 십 대로 보이는 여자아이. 그 동그란 눈에 몸이 굳는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 천마는 바로 검을 내던져 그 어린 가슴을 궤뚫어 버렸다.
퓨우욱!
“하, 정말.”
타닥. 파바바박!
더러운 손맛을 떨쳐 내듯 그는 질주했다. 겉모습에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미 진작에 경험했듯, 지금 그가 상대하는 이들은 하나하나가 최소 현경급.
그런 놈들의 수가 수십을 넘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바알인지 발랄인지 하는 놈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이해가 갈 지경.
“근데 말이지! 겉절이들이라고!”
푸와아악!
암흑대천공.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서 잘 펼치지 않던 심법.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극도로 살의가 집중된 천마는 주저없이 패를 던졌다.
푸와아악! 푸와아악! 푸와아악!
사방 천지에서 시커멓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암흑대천공. 천마군림보는 환상이자 실체다. 천마의 본신 하나가 암흑대천공을 펼친 순간, 나머지 사십에 달하는 다른 천마들 역시 동시에 같은 심법을 펼쳤다.
우오오옹. 우오오옹. 푸학! 푸학!
사위가 어두워졌다. 잠시 잠깐, 저 바알인가 하는 놈이 나타났을 때처럼 빛이 차단되고 암흑이 퍼져 나갔다.
그 가운데서 천마는 한 손을 위로, 한 손을 아래로 한 천지건곤의 자세를 취하고 사자후를 토해 냈다.
“오~ 랜만에 써 본다! 천지 멸절!”
-천지 멸절!
꽈—드드득!
암흑이 부풀어 올랐다. 암흑대천공을 운공하는 수십 명의 천마. 그들이 동시에 합을 맞춰서 증폭시켜서야 쓸 수 있는 최강의 강기무공.
퍼억!
파가각. 파가각. 파가가각!
부풀었던 암흑이 폭사한다. 사방으로 검은빛의 빛살이 날고, 그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 낸다. 천마고 바알의 영웅이고 가리지 않고 다 부숴 버리는 그 힘은, 수십 장을 넘어 근 백 장에 가까이 여파를 터뜨렸다.
“이… 이 무슨! 어떻게 필멸자가 이런 힘을!”
“하핫!”
멀리서 바알이 경악하는 것이 들렸다. 천마는 호탕하게 웃다가 말고, 지끈! 골이 울리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할. 이게…….”
무럭무럭.
시야가, 인지되는 세상이, 진한 암흑으로 물들어 갔다. 피에 물든 대지. 오로지 죽음으로 가득한 땅.
우워어어어엉---
흐끄무레한 신형 수십이 나타나 귀곡성을 흘린다. 오로지 천마가 보는 세상이 그랬다.
검고 농밀한 죽음. 아직 경지가 안 되는 몸으로 암흑대천공을 난사한 부작용이다. 아니, 정확히는 부작용이 아니라 깨달음일 터.
초극에 달한 무예는, 정사 가리지 않고 시전자를 초월에 이르게 한다. 무당의 장삼봉이 검무를 추다 태극의 묘리를 깨달아 선경에 올라 버린 것처럼.
한없는 죽음과 파괴를 형상화한 암흑대천공은, 전신의 피가 끓게 하고 마기를 폭증시켰다. 이대로라면 일권에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피어오르는 것을.
“흐이---짜!”
터엉!
천마는 손으로 양쪽 귀를 후려쳐 지독한 통증을 맛보며 깨뜨렸다. 우화등선에 반대되는 암흑영락을 자력으로 벗어난 것이다.
하아… 하…….
후드득.
소리가 사라졌다. 고막이 터졌을 터다. 아마 내이까지 타격을 받은 것인지, 세상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시부레… 이깟 가짜에 또 넘어갈 것 같아?’
천마는 씨익 웃으며 또 한 번의 사마를 여유롭게 넘겼다.
신마경.
정파에서 주로 부르기로는 신화경.
현경을 넘어서는 제3의 경지로 무의 궁극이다. 하지만 겪어 본 바에 따르면 그건, 전설도 되지 못한 낭만이었다.
현실적으로 도달한 자가 아무도 없고, ‘도달하면 이럴 것이다’조차 아니라, ‘이런 게 가능했으면 좋겠다’라는 수많은 무인들의 ‘바람’만 덕지덕지 붙은 경지이기에.
그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
탈마를 넘어서서 극마로, 그리고 극마를 넘어서서 신마로. 그 와중에 얻을 수 있는 수많은 깨달음과 이능. 그것들은 천마를 헷갈리게 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사람의 심상을 완전히 전달하기에, 언어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다.
때문에 경지에 이른 무인은, 다른 무인의 깨달음을 갈무리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류귀종이라는 말도 있지만, 백인백색이라는 말 또한 있는 법.
화산의 무예를 펼치면 매화의 향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고 매화삼십육검을 청성의 고수가 극한으로 단련할 때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까? 아니다.
원류의 무공이 가르치는 길이 있다 해도, 개개인이 얻은 심득과 경험에 따라, 경지의 방향은 다를 수 있다. 마공 또한 그랬다.
애초에 마교의 마공은, 수많은 도피자들의 한과 집착이 서린 것이다. 정파와 달리 초반에는 쭉쭉 빠르게 치고 올라가지만, 가면 갈수록 광마에 빠지기 쉬운 까닭이 그 때문이다.
더 강한 힘.
더 초월적인 어떤 것.
피 묻은 삶을 근간으로 한 마교도들의 심상은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그들은 인간을 넘어선 강함을 추구했고, 그 추구하는 강함은 애초부터 마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로지 검. 그 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
처억. 부우웅!
브로큰 듀랜달. 검은 대검을 휘두르는 천마.
아마도 천마신교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비급을 다 읽고, 그 무공들이 추구하는 궁극이란 궁극을 전부 겪어 본 것은 그가 유일할 것이다.
탈마에서 신마로 향하는 동안,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염력에 빠진 적도, 광마에 들어서서 다 죽이고 날뛴 적도 많았다.
경지의 상승인 척하며, 수많은 유혹과 영락을 내미는 것이 탈마-신마경의 구간이다. 오죽하면 그의 직전 시도가, 정파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것이었겠는가?
“권능이니 자격이니, 그딴 인외의 힘은 필요 없어. 나는 오로지 무로서 끝을 본다.”
현경에서 신화경에 이르기까지, 정파의 무인들은 수도 없이 우화등선의 기로로 접어든다. 그건 안온한 길이며, 속세의 모든 다툼을 벗어나는 수도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마인이었다.
탈마에서 신마경으로 향하는 길은, 탈마의 근본.
말 그대로 완전히 마를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천마는 가느다란 선 하나를 남겨 두고 있는 상태였다. 어찌 보면 바로 닿을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영원히 이 상태로 다음 경지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붙자, 마왕. 네 수집품들은 더 없지?”
“…이, 이럴 수가.”
눈앞의 바알.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와의 싸움이 더더욱 귀중한 경험이 될 터였다. 극한의 마를 보고 경험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으리라.
“멸절공!”
남은 수는 서넛. 바알을 호위하는 마지막 망령들을 베어 죽이며, 천마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