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1)
퍽. 파바바바박!
껍질을 뚫고 들어가 살점을 뭉텅이로 바순다. 베고 찢고 가른다. 집 몇 채쯤 되는 단단한 살을 바수고 끊기를 한참, 갑자기 제멋대로 쭈욱 당겨지며 공간이 생겨났다.
우득! 쫘아아악!
-끄아아아아!
둔하게 들리는 비명이 몸으로 전달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마가 침투한 자리는 어쩌다 보니 발목 뒤꿈치 힘줄이었다. 서역의 말로 아킬레스건. 끊어지면 제멋대로 수축해 버리는 곳.
부우욱!
“푸하! 하하핫!”
온 전신이 피에 물든 채로, 천마는 검을 팔랑개비처럼 휘두르며 솟구쳤다.
발뒤꿈치 힘줄은 끊어지면 얼추 종아리까지 수축한다. 쉽게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부드러운 층인 셈이다.
퍼버벅! 퍼벅! 파박!
“흡!”
피와 살점의 소나기. 다시금 숨을 참는다. 천마는 바알의 종아리 어림을 곤죽으로 만들며 위로 위로 올랐다.
살과 피. 그리고 뼈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끈적끈적하게 몸을 붙잡아 왔지만, 내공으로 상승시킨 완력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쿠우웅! 왈칵!
갑자기 둔한 충격이 일고, 옆에서 어마어마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바알. 놈이 제 몸을 후려친 모양이다. 엄청난 압력이 몸을 눌렀지만, 천마는 찌그러지지 않았다. 애초에, 제 몸을 후려치며 갈기는 일격이, 천마에게만 전해질 리가 없었다.
두우웅!
거센 진동이 사방에서 엄습한다. 압력은 분명히 높아졌다. 하지만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우읍!’
콰드득! 빠지직! 철퍽!
다만 숨이 거슬린다. 천마는 극성에 달한 호신공을 전신으로 뿜어냈다. 극한의 음기를 지닌 빙결 속성의 호신공.
‘영원빙백공.’
우드득! 와드드득!
집채만 한 얼음층이 바알의 몸 안에서 생겨난다. 몸 안에 작은 돌 하나만 생겨도 찌르듯이 아픈 법이다. 그런데 살을 찢어발기는 거대한 얼음이면…….
-크아아아아악!
어지간한 사람은 혼백이 나갈 터. 예전에 신이었니 뭐였니 하더라도, 육신을 가지게 된 이상 아마 끔찍한 고통을 맛보고 있으리라.
우드득! 뿌드드득!
“푸흐으!”
두터운 얼음층이 약간의 공간을 제공했다. 숨 쉴 시간을 얻어 내고, 천마는 다시금 사방을 베어 넘기며 도약했다.
몸속.
그것도 인간의 몸에 가까운 육신으로 재구성된 전장이다. 천마는 끈적끈적한 피와 살점의 거품을 만들어 내며 솟구쳤다. 학관 수업시간에 들었던 설명이 떠올랐다.
‘폴리모프.’
형태를 바꾸는 마법. 마법이라기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아, 권능에 가까운 능력이다.
이걸 쓸 수 있는 존재는 대마법사 내지는 드래곤 정도. 평범한 인간은 알아도 쓸 수 없는 계열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아는 이 자체가 적었다. 지금처럼 초월적인 종족과 대적하는 경우는 그저 대피만이 방법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적의 몸 안에 파고 들어가서 다 터뜨려 버리는 공략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천마처럼 막 나가는 이가 아니라면.
‘조금 더. 더 위로.’
파가가각! 쏴아아악!
폴리모프로 구성된 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체다. 바알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의 육신을 구현했건, 일단 변한 이상 놈의 몸은 인간의 몸과 구조가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신체에 대해선, 천마는 어지간한 의원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강한지.
우드득! 뻐억!
질퍽거리는 살 더미를 베고 찢으며 지나가던 중, 갑자기 강한 반발력에 부딪혔다. 천마는 검을 당기며 단단하게 버티는 층을 더듬었다.
‘무릎 연골.’
어느새 종아리를 다 작살내고 무릎까지 온 모양이었다.
연골은 신체 내부 중에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체중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관이니 강도는 예상 이상.
더 파고 들어가면 뼈에 닿는다. 천마는 머릿속으로 인체 모형도를 그리며 방향을 틀었다.
콰드득! 와드드득!
-으아아아아!
꽝! 꽝! 꽝! 삐이-!
갑작스러운 신경통(?)에 바알이 제 무릎을 두드리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불규칙적인 압력과 충격을 버티며, 천마는 한참이나 놈의 무릎 안을 헤집었다. 그러기를 잠시.
투둑! 퍽!
쫘아아악!
‘됐다.’
거칠고 강한 격류가 그의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예상했던 자리다. 하지대정맥. 종아리에서 출발해서 허벅지를 지나, 심장까지 흘러가는 거대한 혈류의 강.
꿀럭꿀럭! 꿀럭꿀럭!
막대한 압력이 천마의 몸을 올렸다. 맥박 치는 혈액을 타고 이동하며 천마는 숨을 죽였다.
거대해진 바알의 대정맥은, 사람 하나는 우습게 지나갈 정도의 엘리베이터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알아서 심장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어디냐! 어디야! 이런 미친놈! 나오지 못해!
쿠웅! 투웅! 퍼엉!
다시금 거센 압력이 몸을 두드린다.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 아마 바알 또한 천마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터.
하지만 손쓸 방법이 없으니 정말로 미치고 펄쩍 뛸 거다. 그 누가 몸에 파고든 기생충을 상대하는 방법 같은 걸 만들었겠는가. 그것도 그 기생충이 탈마의 고수면.
쿵쿵! 쿵쿵! 퍼엉!
기껏 제힘으로 만든 몸을, 제힘으로 두들길 뿐이다. 그조차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했다. 신성이 마성으로 변질되면서, 바알의 육체는 어마어마한 강도를 가지게 되었으니까다.
꾸르륵. 꾸르르륵!
‘어디쯤이지?’
그래서 천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신경 쓰이는 것은 하나. 혈류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지금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다는 것. 지금으로서는 목표인 심장에 도달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어디쯤 왔나 주변을 확인하려고 움직이면, 그 움직임으로 위치가 탄로 날 터이므로.
-주인이시여.
‘오.’
거기서 뜻밖의 존재가 말을 걸어왔다. 광기와 만월의 주인, 그림자의 정령왕 페이탈리스트다. 지난번에 꽤 큰 타격을 받아 스며들었던 놈이 힘을 좀 회복한 모양인가?
‘오랜만이다. 너, 지금 내가 어디쯤이지?’
-하복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심장을 노리실 생각입니까?
‘그래.’
척하면 착. 묻는 말에 바로 답해 오는 녀석이다. 그런데 존재감이 제법 늘었다. 천마가 보기엔 왠지 페이탈리스트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주인께서 기회를 주신 덕입니다. 마왕의 피라니. 이보다 더 제게 근사한 만찬이 있겠나이까.
‘아하.’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확실히 그림자의 정령, 광기와 만월의 주인인 녀석은 ‘마공’ 그 자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의 힘. 그런 녀석에게 바알이라는 마왕의 피는, 나무가 빨아들일 물 같을 터.
‘흡수할 수 있겠어?’
그걸 떠올리니 또 한 가지 해법이 생겼다. 천마의 물음에 페이탈리스트의 정신 파동이 잔잔하게 웃음을 짓는 듯했다.
-당연합니다. 양이 좀 문제겠군요.
‘적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런데 좀 아쉽네. 나도 가능한가?’
-가능은 하나 권할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아.’
천마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하고 물었는데 역시나였다. 마왕의 피. 그건 오염된 영약과 같았다. 정신체도 아닌 육신을 지닌 천마가 마공으로 흡수한다면, 그만큼 강력한 힘을 얻을 테지만 미쳐 버리고 말 터.
예전에 페이탈리스트가 보였던 모습. 마성에 물들어 버린 검은 천마. 그게 현실로 될 뿐이다.
‘할 수 없지. 나 대신에 잔뜩 처먹어라. 잔뜩. 지금 어디쯤이지?’
-상복부입니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콰아아아!
페이탈리스트의 말이 전해지기 무섭게, 몸을 이끄는 혈류가 더욱 강해졌다.
복부대정맥. 혈관의 너비가 가장 넓어지고, 두께도 두터워지는 곳이다. 급속도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천마는 몸에 긴장을 유지했다.
두둥! 두둥! 두쿵!
심장은 음의 압력으로 피를 끌어들인다.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체. 그걸 운용하는 심장의 흡입력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폭포의 물줄기와 같았다.
쫘----아아악! 두쿵! 쿠쿵!
‘왔다.’
거의 다 왔다. 혈관은 이제 어지간한 강만큼이나 거세고 두터워졌다. 천마는 이 피 웅덩이 안에서 언제든 폭발을 일으킬 수 있도록 기감을 돋웠다.
한데.
‘…으?’
덜컥!
이제 곧 맹렬하게 빨려 들어갈 길만 남아 있던 그는 갑자기 거센 반발력을 느꼈다. 마치 유리창처럼. 분명히 눈앞에 보이는 물건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딱딱하고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그런 것처럼.
‘이… 무슨?’
-차원 장벽! 주인이시여! 놈이 제 심장에 차원 간 게이트를 위치시켰습니다.
아무래도 바알, 그놈이 궁여지책 가운데 뭔가 수를 짜낸 모양이었다. 인체라면 심장의 판막, 그곳에 해당할 지점에 검고 반들반들한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두두둥.
들켰다. 그렇다면.
“제에기랄! 다 빨아 먹어!”
부그륵!
피의 강물 속에서, 천마는 육성으로 호통쳤다. 그와 함께 멸절공을 극상으로 끌어올렸다.
푸화아악!
극강의 열양공. 그것이 사방의 혈액을 부풀리고 증발시켰다. 액체가 증발하여 기화가 일어나면, 그 부피의 변화는 근 3백 배에 달한다. 직전의 대동맥에서 일어나는 기화는, 충분히 심장을 터뜨릴 만한 압력이 될 것이다.
쫘아아악!
동시에 한쪽에서 급속히 사라져 가는 혈액. 그림자의 정령왕은 제한 없이 마왕의 현계한 육신에서 피를 탐했다.
“끄으으윽!”
바알은 속수무책으로 몸을 떨었다. 아무리 마의 힘과 신성의 힘을 동시에 지닌 그라도 이것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실수한 거였다.
심장. 육신을 지닌 이상 대비할 수 없는 약점. 그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간악한 인간은 한쪽에서 심장을 터뜨릴 듯 강한 폭발을, 동시에 한쪽에서는 심장을 쥐어짜 오그러뜨릴 듯한 흡입력을 동시에 일으키고 있었다.
“노옴… 이까짓 잔재주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압력이 일어나는 것을, 바알은 가진 권능을 총동원해서 심장을 보호했다. 차원 간 게이트. 어둠나무에 깃들어 있던 현상. 그걸 끌어내서 차단막을 펼친 것이다.
드드득. 드드드득.
고룡 쉐이크. 지금의 바알이 폴리모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언데드 드래곤의 물성 때문이다. 죽은 몸에 담긴 사령 마력을 뒤틀어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던 바알.
그는 마왕이라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은 지배력으로 전신 혈류를 느리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심장에 차원 간 게이트를 열어 급속한 혈류의 흐름을 우회시켰다.
“어리석은… 그대로 날려 버릴 것이다……!”
드드드득.
모를 때는 몰라도, 놈의 목표가 심장임을 알게 된 이상은 방법이 있었다. 그냥 날려 버리면 된다. 게이트를 통해 놈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 버리는 것.
창졸간에 짜낸 방법이었지만, 충분히 괜찮은 술수였다. 지금 이 몸에 깃든 마력을 다 쓴다면.
“……?”
다 쓸 수 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뜨득! 뜨드드득!
“이… 무슨?!”
하지만, 거기서 생각도 못 했던 존재의 방해가 들어왔다. 신체를 구성하는 어둠의 마력. 그게 거칠게 요동치며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뜨드득! 푸확! 빠지직!
바알의 눈이 크게 뜨이고.
“네 이놈… 리치… 킹---!”
갑자기 어부지리를 취하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