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2)
중원인들이 말하는 기(氣)와도 개념적으로 비슷하다. 천지간의 모든 생물체, 혹은 무생물에도 존재하는 마력.
그대로는 별 의미가 없다. 조금 비정상적으로 강하거나 약한 생물, 혹은 사물은 그 마나의 밀도가 높을 뿐이다. 하나 여기에 ‘의지’가 깃들게 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마법. 마나를 이끌 수 있는 모든 행위의 총칭.
마법은 곧 정신이다. 고도로 발달된 정신체가 아니고서는 마법-마력을 사역하는 행위가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는 의지, 혹은 사념이 전제된다.
생물이라 할 수 없는 언데드. 특히 유령 계열 몬스터의 대표 격인 레이스(Wraith)는, 원망이나 분노 같은 강한 사념이, 마력이 많이 고인 곳에 깃들어 자연 발생한다.
그리고 자연 발생이 가능할 정도니, 인위적인 흐름- 마법이나 주술이 함께하면 강해진다. 그리고 많아진다.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콰콰콱! 스와아악!
따라서 아무리 바알이 마계의 대왕이라 해도, 그가 몸을 담은 육체가 리치왕의 의지에 따라 멋대로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본 드래곤의 힘의 원천은 사령 마력. 이는 아크 리치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주무기이기도 했으니.
-놈! 당장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이냐!
바알의 격 높은 정신파에, 음울한 그림자 같은 심상이 대꾸했다.
-무슨 짓인지는… 귀하에게 물어야겠군. 마계의 마왕이여. 이 차원 ‘중원’은 지금 내가 거하는 곳이다.
강제적으로 동면에서 깨어난 리치왕이 대꾸했다. 베이스는 분명 인간. 필멸자 중에 가장 연약하고 흔한 존재였으나, 그 스스로 깎아 만든 의지에는 냉랭하고 차가운 불쾌감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내 권속의 몸을 빼앗고, 내 정벌지에 현계까지 하다니. 바알, 진정 나와, 그리고 내 위에 계신 분을 적대하려 함인가? 귀하는 정벌자들의 불문율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
정벌자.
차원 침공이 가능한 모든 자들을 일컫는 말.
대개는 마왕이지만, 때로는 천족이나 신적인 존재가 타 차원을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는 때도 있다. 물론 그들의 표현으로는 ‘해방’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이런 차원을 넘나드는 정벌자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하나의 묵계가 있었다. 먼저 손을 대고 있는 차원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선한 존재든, 악한 존재든, 정벌자들은 강력한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만큼 자존심도 높고.
누군가가 정벌을 하고 있는 중에 뒤치기를 하는 행위는 파렴치한 짓으로, 여차하면 다른 이들에게 찍혀 수십이 몰려드는 징계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하! 새파랗게 어린놈이! 나는 이미 수십 번의 요청을 했다! 마계의 대왕인 내가! 그럼에도 묵살하고 대꾸 한 번 없었던 네놈이야말로 경우 없는 것이지!
-묵살……? 대체 무슨 말을 내게 보냈다는 것이지?
바알의 격한 분노에, 리치왕의 사념이 조금 누그러졌다.
바알은 마계의 첫 번째 대공.
스스로를 마왕이니 대왕이니 칭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그가 이미 여러 번 자신에게 전언을 보냈다면… 이건 리치왕 또한 예우를 하지 못한 무례로 비칠 수 있었다.
중원의 강호로 치자면 소림이나 무당의 장문인이 서찰을 보냈는데, 중소 문파가 씹고 대꾸도 안 한 격이다.
-꽤나 많은……. 나는 이제껏 힘을 다듬고 있느라 바빴소. 대체 무슨 일이시오.
아무리 율법이 있다 해도 때로는 주먹이 더 가까운 법.
태생적으로 폭력이 수반되는 정벌자들 사이에서, 뒤치기는 분명 지탄받을 일이다.
하지만 바알, 대마왕을 자칭할 정도의 정벌자가 여러 번 대화를 청했는데 그걸 씹어 버린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긴 했다.
리치왕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해도, 그는 어렸다(?). 정벌자들 사이에서 고작 삼사백 년으로는, 풋내 나는 어린애 정도 취급이다. 조금은 어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수십 번 했던 말을 다시 하지! 이 차원에서 벌어지는 낭비를 멈춰라! 인간의 생명들을 아껴!
하지만 돌아온 바알의 노성은, 리치왕의 상궤를 벗어난 말이었다.
-……? 지금 뭐라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유분수지. 리치왕은 자신의 귀가-이미 썩었지만-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명을 아껴라? 이게 마계의 대공이자 수많은 파멸의 근원이 할 소리던가?
-귀가 썩었느냐! 아니면 뇌가 삭은 것이냐! 다시 말하지! 이 차원에 사는 인간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마라!
-…….
하지만 리치왕의 생각과 달리, 바알은 진심이었다.
* * *
중원.
바알이 처음에 그 차원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을 그리워하던 무의식의 발로였다. 무심결에 한 바퀴 둘러보다가 얻은 정보가 콕 뇌리에 박혔으니까.
-인간이 갑자기 이렇게 많이 절멸했다고?
그는 한때 신이었던 악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던 그를, 파멸과 파괴의 마왕으로 영락시킨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었다.
찬양하던 기도가 억눌리고.
음습하고 위험한 저주에나 쓰이게 된 이름.
히브리 일족의 지역 신은, 집요할 정도로 셈족의 지역 신을 탄압했다. 그로 인해 바알은 찬란하던 신성이 오물에 던져졌다.
때문에 바알은 인구가 곧 자원이고, 인간이 보내는 신앙심이 곧 힘이 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존재였다.
심지어 공포와 혐오조차도.
신앙이 플러스의 감정이라면, 공포와 혐오는 마이너스의 감정이다. 원래라면 그저 흩어질 막연한 감정.
하지만 미미한 모래알들조차도 쌓이고 쌓여 수십 수백 년이 지나면 사암으로 변모한다. 감정 또한 이와 같았다.
악마, 그리고 신.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감들.
살아가면서 잊을 만하면 떠올리는 마음이다. 원래라면 휘발되고 말겠지만, 이런 대수롭지 않은 상념조차도 사람이 너무 많다 보면, 쌓이고 쌓여 세상에 변화를 불러온다.
그렇기에 ‘중원’이라는 차원은 바알이 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현 추정 인구 근 1억……?!!!
마왕조차 눈이 다 둥그레질 숫자였다.
심지어 그조차도 대격변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을 만나, 죽을 놈은 죽고 강해져서 살아남은 이들의 숫자라니.
당시 최대로 융성했을 때의 인간 수는 물경 10억에 가까웠다고 했다.
이건 주인 없는 보물이었다. 바알은 그렇게 판단했다. 정확히는 주인이 있기는 있되, 보화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어린 정벌자였다.
리치왕.
이미 인간을 벗어난 주제에, 여전히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으로 드래곤에게 분풀이를 하는 반푼이.
그의 등장으로 대격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이 차원의 인간들 9억가량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걸 알게 된 바알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걸… 이걸! 이런 낭비가 있나!
인간 9억.
얼마나 값어치 있는 자원인가.
이종족이 별로 없고 몬스터가 없는 세상이라 그런지, 이 차원에서 인간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 그리고 풍요는 욕망과 욕구에 따라서 일어난다.
어찌 보면 탐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작물. 더 커다란 가축 무리. 그를 위해 노력하고, 질투하고, 때로는 분노하는 인간들의 감정.
그것이 바알의 태생이었다. 가장 좋은 양분이었다.
-10억의 인간이라니……. 백 년만 관리하면 100억도 노려볼 수 있겠거늘…….
인간 100억.
그들에게 신앙을 뿌리고 전파하면, 마왕으로 영락해 버린 바알이 신위를 되찾을 터, 아니, 그걸 넘어서서 한 차원의 대신 격으로 만들 만했다.
관리만 잘한다면.
그런데 리치왕은?
그 많은 인간을 수용하기는커녕, 죄다 죽여서 썩은 시체나 원혼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하려고 했던 바알이 ‘중원’에 손을 뻗게 된 까닭은 그 미친 듯한 ‘낭비’ 때문이었다.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
누가 보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는 어찌 보면 바알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애주가가 귀한 명주(名酒)가 엎질러져 콸콸 흐르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진귀한 술이 바닥에 쏟아지는 걸 보면 척수 반사적으로 병을 일으킨다.
검객의 경우도 그렇다. 천하의 명검이 오물에 빠져, 천천히 녹슬고 썩어가는 것을 본다?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 건져서 깨끗이 씻고, 닦고, 제가 쓸 것이 아니라 해도 그 검의 쓰임새와 가치를 회복시킨다.
바알이 이와 같았다. 그는 풍요와 다산의 신. 그리고 풍요는 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노력하는 지혜가 바탕이다.
-리치왕! 이 무의미한 죽음을 멈춰라!
-이런 상도덕도 모르는 정벌자야!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대답 않느냐! 이놈! 지금 이 바알을 무시하는 게냐!
그래서 그는 훈수를 두게 되었다.
리치왕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보는 바알은 뒷목을 붙잡을 정도였다.
보릿고개를 겪은 인간의 노인처럼, 음식 아까운 줄 알라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격.
흔히 말하는 꼰대질이었다.
* * *
-바알, 귀하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나는-
-상관할 바다! 이 어린놈아! 대체 차원 간 정벌이 왜 일어나는 건데! 대자연적인 섭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천둥벌거숭이가!
-이런 것에 나이를 따지는 게 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소. 나는 엄연히 사유가-
-그 사유라는 게 네놈의 같잖은 복수심 때문 아니더냐! 대체 드래곤 하나 못 잡아서 기백년을 쓰고 있으니! 이 능력도 없는 것이!
-……!
-이 차원에 뭔 개민폐를 끼치고 있는 거야! 네놈 같은 놈들 때문에 마계가 다 말라 비틀어진다! 어른 존중도 모르는 놈이!
-…….
바알도 바알이지만, 리치왕도 뒷목을 잡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계의 대공이 민폐? 마계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장본인이 할 소리인가?
-말이 안 통하는군. 더는 존중할 필요를 못 느끼겠소.
바알을 향한 리치왕의 심상에 노기가 서렸다.
분명 출신이 한 지역의 풍요의 신이었다 하나, 마치 지금도 제가 천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아닌가.
지금 그의 행위는 선을 넘는 것이었다. 특히, 리치왕의 존재 이유인 확장된 복수. 모든 드래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그의 다짐을 비웃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거론합시다. 나가지 않겠소.
-뭣? 이놈! 지금 나를 무시…….
푸콰아악!
마력이 들끓었다. 주인이 손을 휘두르니, 멋대로 남의 재원을 강탈해서 사용하고 있던 이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옅어졌다.
-이노오오옴---!
희미해져 가는 상념 너머로, 끔찍한 분노가 번져왔다. 새파란 풋내기에게, 문전박대도 모자라 강제 퇴거까지 당하는 바알의 분노는 대단했다.
리치왕은 혀를 찼다. 그리고 급격히 몰려오는 수마에 다시 몸을 맡겼다.
-기도 안 차는군. 다시는 결코, 이런 시비에 휘말릴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144년. 완전수 12의 제곱은, 단순히 힘의 회복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알과는 달리, 그 또한 신마의 격을 얻기 위해 신체를 재조립하는 과정이었다.
그 수가 모두 갖추어질 때.
리치왕은 바알도 함부로 못 하게 될 대마신이 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