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72화 (273/310)

272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3)

쿠르릉. 과아아악!

공간이 뒤흔들렸다. 어마어마한 흐름이 휘몰아쳤다.

“으읍!”

“우와악!”

킬로미터를 넘는 본 드래곤의 거체. 그건 재앙이다. 그런 재앙이 사라지는 것 또한 또 다른 재앙.

엄청난 양의 사령 마력이 허공에서 증발했다. 단순한 마이너스의 기운이 아닌 허수(虛數)의 마력.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대폭발을 일으킬 힘이었다.

“주, 죽는다…….”

그걸 감지한 마법사 하나가 무너져 내리며 탄식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딱! 하고 뒤통수를 후려 맞았다.

“헛소리하지 마! 멍청아!”

“…어 …어?”

적당한 물리적 충격은 특효다. 공황에 빠져 있던 마법사는 자신도, 자신을 후려갈긴 동료도, 그리고 이 주변 환경마저도 아까와 같다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이론에 불과한 것이지만, 저 정도의 마력장이 허수로 발현될 경우, 거대 도시 하나도 증발시키고도 남을 텐데…….

“어째서?”

쿠우우우우!

사령 마력의 격렬한 흐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느낀 마력의 허수화가 착각이었다는 듯. 그 대신,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마수와 몬스터들이 몰려오며 이를 드러냈다.

크에에에…….

취르르르…….

“전투 준비!”

“놈들의 총공세다!”

우와아악!

바쁘게 명령이 하달되고, 천무학관의 레이드 공격대는 긴급하게 대형을 바꿨다.

* * *

“해치웠나…….”

구우우우웅…….

검은 은하수 같은 것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제운비가 증발하는 검은 흐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야! 그 말 좀 닥치라고! 또 튀어나올라!”

“아참.”

뇌천벽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제운비에게 노성을 질렀다.

플래그라던가? 학관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괴상한 이야기가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적을 쓰러뜨리고 난 뒤에 저 말을 하면, 반드시 더 강하게 부활한다던가.

농담처럼 웃어넘겼던 건데 뇌천벽도 제운비도, 그 징크스가 현실이 되는 걸 오늘만 해도 수도 없이 보았다.

세 번이 넘어갈 때부터 뇌천벽은 경기를 일으켰고, 이제는 제운비도 자기가 그 말을 해서 이런 난리가 끊이질 않았는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잠잠한데……. 어쩌면…….”

“방심하지 마! 아니, 입 자체를 열지 마! 마가 낀다고!”

뇌천벽이 울먹이듯 발작하면서 고함을 질렀지만, 그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제까지 몇 번을 주저앉았던가.

일단 불온분자였던 유장위. 그가 정말로 신화경에 올라 신위에 가까운 힘을 보였을 때.

그리고 그런 그가 천계의 빛까지 뿌려 내고도 기어코 거대한 악을 멸하지 못하고 스러졌을 때.

설마설마했던 마왕이라는 존재가 기어코 현현했을 때.

거기에 또 탈마의 고수인 천마가 나타나 마왕을 상대하다가 백에 가까운 현경급 영령들이 등장 했을 때.

마지막으로 고룡 쉐이크의 몸을 구성하던 사령 마력, 그것이 거대한 거인의 육신으로 변했을 때도.

멀리서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던 그들은 그저 무릎이 무너져 내리기만 했다.

누구보다 열띠고 있던 뇌천벽이었기에, 누구보다 많이 좌절했고, 그래서 이제 그는 거의 자포자기였다.

“하… 진짜, 낄 여지도 못 보고. 내가 진짜 서러워서…….”

살면서 이런 무력감을 이토록 많이 겪은 적이 있었던가.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가 이처럼 하찮게 여겨지기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현경. 탈마경. 신화경. 신마경.

도무지 비벼 볼 구석도 안 보이는 괴수 대전투의 관람이었다.

벼락이 치고, 어둠이 사위를 가리고, 천상의 빛이 파사의 광명을 내리는가 하면, 온 세상이 암흑에 물들고 가없는 황충의 파도가 세상을 덮기까지.

아는 만큼 많이 보이는 법이다. 차라리 저 뒤에 있는 파릇파릇한 애들이라면 몰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던 화경급 고수 다섯은, 얼이 빠졌다.

레이드 공격대에서 가장 경지가 높은 이들이다. 그저 지켜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산산이 꺾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종의 심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향상심 높은 무인이라 해도, 너무 고도의 경지를 보고 나면, 학관생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현타’를 경험하게 된다.

“후우… 너무 부질없군. 그냥 이번 일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을까 싶어.”

“야! 씨발놈아! 그것도 하지 마!”

한탄하는 제운비에게 뇌천벽이 발작하듯 욕을 박는다. 난데없는 욕설에 당연히 제운비의 얼굴이 굳었지만.

“…혹, 이것도 그건가?”

“그래! 이 자식아! 그 외에도 누구한테 고백하겠다느니! 결혼하겠다느니! 그런 말도 금지! 그거 하면 죽는다고! 어? 너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죽는다고!”

뇌천벽은 거의 울상이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그간 학관생들이 생성해 낸 수많은 괴담과 징크스들이 혼란의 도가니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러니 제발! 그만 좀 가만히 보자고! 어? 5분만! 좀 입 닥치고 있자고!”

“…어흠, 알겠네.”

제운비는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평소 같으면 그도 이런 미신 따위 웃으면서 무시했겠지만, 아니, 그보다 뇌천벽이 더 웃어넘겼겠지만, 거짓말처럼 그가 ‘해치웠나?’를 말할 때마다 가공할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괴물이 드러나고, 악마가 강해지고, 해결사가 나타났다가 위험에 처하고.

그게 연거푸 다섯 번? 뇌천벽에게 욕먹는 게 부당하다고 여겨도 이쯤 되면 안 하는 게 나았다. 지금의 엄청난 마기의 소멸. 저게 계속해서 증발까지 이어지기를 조마조마하게 기원할 뿐.

툭. 투둑.

“…어, 저기.”

그런데 한참 그렇게 지켜보고 있던 중.

휘이이익. 쿵.

거대한 검은 기류의 회오리에서, 무언가가 빠져 나와 땅을 뒹굴었다. 흐릿한 무언가에 감싸여 있었지만 분명 그것은.

“마교주다! 천마 구옥경!”

“살아… 남은 건가? 저 속에서?”

분명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확인하러 가세! 어서!”

“포션! 포션 챙겨!”

타다닥!

이제껏 멀리서 주저앉아만 있던 이들이 급히 내달렸다.

* * *

치이이이익---!

“크으… 악…….”

땅에 반쯤 파묻힌 천마. 그의 모습은 꽤 처참했다. 일단 온몸이 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알의 피. 그것도 심장의 판막 옆에서 전력으로 멸절공을 터뜨렸으니, 하지만 문제는 이 피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제기랄…….”

체내에 들어온 천마를 녹여 버리려고 했던 걸까.

마지막에 마왕 바알의 육신은, 혈액을 강한 산성으로 바꾸었다. 갑자기 전신이 독에 절여져 버린 천마는, 몸을 보호하기 급급해서 호심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자칫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릴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혈류를 타고 탈출할 수 있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크흐흐흐… 크흣. 크크크... 어둠… 어둠이다… 내 오른손에서 불타는 검은 용이…….

“제기랄! 정신 차려! 임마!”

화르륵. 화르르륵.

천마의 온몸에서 검은 불길처럼 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짙은 그림자.

그림자의 정령 페이탈리스트였다.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이다.

천마를 따라 심장까지 침투한 페이탈리스트. 그는 육신을 가지고 현계한 바알의 피를 마셨다. 마왕의 피니 어둠 속성 정령인 그에게는 말 그대로 영약.

하지만 아무리 영약이라 해도, 과용하면 사람이 죽는다.

페이탈리스트는 어지간한 정령사 수천 명분의 어둠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가 짧은 시간 들이켠 피는 마계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마왕 바알의 것.

수십만 명, 아니, 수백만 수천만 명을 넘을 어둠이 들어오니 정령왕이라 해도 미칠 수밖에. 그릇이 터지다 못해 작살이 나고도 남을 어둠의 영기였던 것이다.

-크하하하! 킥킥킥킥! 우헤헤헤……!

“약 빨았네. 약 빨았어. 아주…….”

그리고 정령이 미쳐 날뛰면, 당연히 정령사에게도 타격이 간다. 천마는 온몸에 입은 내외상에, 페이탈리스트의 발광까지 겹쳐져 아주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눈앞에 헛것이 보이고, 미칠 듯이 분노가 폭발하다가, 갑자기 세상의 온갖 미녀들을 모아 환락의 궁을 만들고 싶은 정신 나간 육욕이 들끓었다.

“와. 이거 안 되겠다… 흐읍!”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오염시키는 마력. 아무리 천마라 해도, 정기신을 동시에 수비하는 것은 힘들다. 그는 잠시 숨을 참고 강하게 심장 인근의 혈을 급히 두드렸다.

툭. 투둑. 푸욱.

“…크.”

두근. 두근… 두근…….

발광하던 심장이 멎고, 과하게 뿜어지던 혈류가 느려진다. 인위적인 가사 상태. 아직 주변은 위태롭지만, 지금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까딱하면 죽거나 미칠 테니까.

다행히도 극단적인 조치가 잘 들어맞았던 걸까. 몸의 흥분이 멈추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런 와중에 천마는.

“크으… 이… 거……?”

뭔가 모를, 낯설지만 뭔가 익숙한 시선. 그걸 느꼈다.

분명히

…….

벌떡! 파밧!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을 차림과 동시에 천마는 방어에 전력을 가했다. 몸을 잔뜩 감고 있는 무언가를 뿌리쳤다.

퍼벙! 펑!

폭음이 일었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이불. 그리고 깃털.

“엥?”

혹은 거무죽죽한 붕대 같은 것들이 한 무더기나 쏟아졌다. 비 오듯이. 그리고 그걸 왕창 뒤집어쓴 흑객이 황망한 얼굴로 천마 앞에 고개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교주님.”

“어… 그래.”

조금 머쓱한 얼굴로 천마가 볼을 긁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정신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우당탕. 와당탕! 방금 뭐야! 모두 모여!

“어…….”

그리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왁자한 소음들. 눈을 들어보니 낯선 천장… 아니, 천막이다. 천마가 일으킨 난리에 반쯤 폭격 맞은 꼴이 되어 있긴 하지만.

“어떻게 된 거냐?”

조금 계면쩍어진 그는 일단 물었다. 화제 전환이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어찌 되긴요.. 당연히…….”

그리고 그에 흑객이 씨익 웃었다. 온통 환한 얼굴로.

“대승입니다. 다 물리쳤습니다.”

“그래……?”

“예. 교주님께서 천계의 신장 같은 무위로 거악을 물리치시고 난 후…….”

천무학관은 중원 제일의 학관이다. 그런 그들이 레이드 공격대를 짜서 어둠나무의 땅으로 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차원 간 게이트의 존재와, 마왕 바알의 개입이라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천마가 바알의 화신체를 쓰러뜨린 후 몬스터들은 지휘 계통을 잃었다.

“일대의 모든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몰려 오더군요. 거의 파도가 일대를 쓸어 담는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다들 힘을 냈습니다. 이 일대는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

“…….”

“피해도 얼마 없고요. 다 교주님의 위업입니다. 하핫. 이걸로 완전히 본 교는…….”

“내가 아냐.”

천마가 불퉁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러자.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어떻게?”

툭툭.

의아해하는 천마에게, 흑객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이 안에 있는 녀석이 설명해 주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교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에…….”

후욱.

그리고 갑자기, 성심으로 빛나던 흑객.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풍기던 분위기도 뭔가 끈적끈적한 사기가 깃든, 요물의 것으로 변했다.

“대단한 싸움이었다. 필멸자, 구옥경.”

“…드라쿨인가. 오랜만이군.”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녀석이라면 이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만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천마는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리치왕, 그놈 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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