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4)
천마가 의식을 잃기 직전.
그는 기묘한 시선 같은 것을 느꼈다. 잘 정제된 살기. 혹은 분노 같은 것을.
그건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의 그는 바알이라는, 어처구니없이 강한 존재와 싸움을 끝낸 직후였으니까.
천마와 바알. 두 초극의 강자 외에는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끝끝내 천마는 바알은 쓰러뜨렸다.
그럼 남은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시선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을 주었던 까닭은?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발인가 손인가 하는 놈. 그거 내가 마무리를 못 했어. 솔직히… 너무 세고 컸거든.”
현계화. 그리고 신체화.
덩치가 크면 강하다. 생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개 한 마리를 죽이는 데에도 몽둥이찜질 수십 번이 필요하다. 그럼 소라면? 몽둥이로 하루 종일 때려도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발악하며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그럼 킬로미터를 넘어가는, 거대한 신체를 가진 바알은? 그 생명력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거대한 만큼, 불사에 가까운 끔찍한 전투 병기다.
생각해 보면 바알, 놈이 자신의 마력으로 거대한 악마의 육신을 만든 방법은 원래라면 필살과 필승의 조처였다. 신체의 힘, 크기가 가지는 힘은 지극한 정석.
천마가 놈의 몸에 파고 들어가 타격을 주긴 했지만, 그건 천마 본인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 할 일이지.”
블라드가 끄덕였다.
내공이든 탈마의 경지든, 거대한 신체를 지닌 악마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심장을 터뜨린다는 발상.
그 자체가 범인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천마도 아슬아슬하게 놈의 심장을 터뜨리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 거대한 육체가 심장 하나 터졌다고 죽긴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에 숟가락 얹은 놈이 있었어. 그리고…….”
전혀 다른 존재.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 그러면서도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어떤 놈.
“언뜻, 녀석이 리치왕을 부르는 걸 들었고.”
사실, 다 필요 없이 이것 한마디로 답은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근근이 버티고 있던 적이 갑자기 무너진다? 그리고 그놈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리치왕을 부른다?
뻔해도 너무 뻔했다. 다만, 뻔히 나와 있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천마가 물은 것은.
“14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녀석이, 갑자기 잠결에 뒤척이기라도 했나. 어떻게 된 거야?”
“흠.”
투욱.
블라드는 거만한 모습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꿈틀.
그에 천마의 눈썹이 솟구쳤다.
속 내용은 마계의 귀족이지만, 흑객의 몸으로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꽤나 기분이 묘했다. 정확히는 짜증이 났다.
“너, 이 새끼…….”
“잠시만. 곧.”
막 천마가 뭐라 하려던 순간, 흑객의 몸을 한 드라쿨, 그가 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 폭음은… 헛!”
“으헛! 마교주가 일어났다! 다들…….”
“이봐! 언사를 조심해!”
우르르르!
천무학관의 교두급 인물들이 몰려와 천막을 왕창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에 천마가 인상을 더 쓰고.
딱. 딱.
블라드가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기왕 할 이야기라면, 다들 모였을 때 한 번에 끝내야지.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하는 것도 못 할 짓이라서.”
“…….”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인 순간. 그는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정벌자. 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지 모르겠군.”
* * *
정벌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대량의 자원을 약탈하거나, 수많은 죽음을 부르는 초월적인 존재를 이르는 말이다.
이름 그대로의 정벌.
한 행성. 보통 차원으로 일컬어지는 땅 전체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것은 보통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흔히 말하는 ‘신’급의 힘이 필요하다. 바알 같은 마계의 대마왕이거나. 혹은.
“다른 세계의 신. 그 정도는 되어야 해.”
“…신? 신이라고? 내가 아는 그 존재가 맞소?”
교두 오월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튀는 탓이다. 정벌자라니. 분명 대악마라면 할 만한 일이기는 한데, 여기서 신의 존재가 왜 나오는가?
“내가 보기에는 신이나 악마나 거기서 거기거든.”
하지만 블라드는 간단히 정리했다.
신이든, 악마든, 결국은 자기 영향력을 투사하려고 한 차원, 혹은 한 행성을 먹어 치우는 자들이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피를 얼마나 많이 흘리는가.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지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악마는 보통 많은 목숨을 앗아 간다. 수많은 죽음. 전쟁. 그로 인한 황폐. 그 가운데 발생하는 죽음이나 절망 같은, 가장 음울한 사념만을 모아 수급한다.
말 그대로 악마적.
하지만 신이라고 딱히 뭐 다를 것은 없었다. 신은 보통 자신에 대한 신앙이나 추앙을 수급한다.
“그러면서 신도 신앙심, 자신에 대한 의존, 그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내려 주기도 하지. 신성력이나 마법, 혹은 아주 강력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놀라운 이능.”
스윽. 쿡.
말을 하며 블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천무학관의 교두 하나를 가리켰다.
“너희가 무공이라 부르는 그 힘 같은 것 말이다.”
“무공……? 착각하는 것 아니오? 우리는…….”
“반박하기 전에 먼저 생각부터 해 봐.”
블라드는 어이없어하는 교두를 보고 오히려 어이없어했다.
불타. 석가모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과거의 초인. 그가 남긴 말을 따르고 수련하는 소림의 몽크들.
그리고 상제니 장자니 하는 전대의 초인을 섬기며 그들이 가리키는 검범과 호심법을 수련하는 도가의 인물들.
“신의 힘을 받은 적 없다? 공경한 적 없다? 글쎄. 내가 보기엔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서라면, 이들은 저 신들의 사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인간이 자연의 힘을 알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다.
“…….”
“…….”
블라드의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한참 숙고하고 있던 천마였다.
“재미있네. 그럼 뭐야. 우리 세상은 이미 예전에 그런 정벌자의 정벌 대상이었다고?”
“예전만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현재라… 리그웨더?”
“대표적이지 않나.”
“흐음.”
블라드의 말에 천마는 턱을 쓸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세상의 격변을 몸소 체험하고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140년 전.
대격변 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을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무예의 부분에선 구파일방과 정사마의 대합작이 이루어졌고, 마법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힘의 투사가 가능해졌다.
냉장고, 마법 아이템, 그리고 정령의 목걸이 등.
이로 인한 일상생활의 변화와 무궁무진한 발전은 천마 같은 초인으로서도 생소한 것이 매일매일 있었을 정도.
즉, 리치왕과 그 부하들을 악마로, 그리고 그들에 대항하는 인류 연합의 수뇌인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를 신으로 생각하면 구도는 대단히 단순해진다.
“…그렇군. 생각해 보면 무예의 극한은 또한 철인들의 가르침에 닿아 있기도 했고.”
또한 천마는 마교 출신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무인들에 비해 현재의 학관 연합의 태도. 그리고 140년 전의 정파 무림맹이 취했던 태도의 차이도 알고 있었다.
-네놈들을 죽여 악의 뿌리를 뽑겠다!
-우리가 바로 하늘의 뜻이니라!
광신. 아전인수.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들이 정의라고, 하늘의 뜻이라고 믿을 수 있는 맹목은 과도한 신앙에서나 볼 법하다. 쓰린 부분이 있지만 마교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의 가르침.
소림의 무승은 무예의 단련과 별도로, 불법의 수행과 그 신실함에 따라 경지가 깊어진다. 도가 계열이라 불리는 무당, 청성, 화산 또한 이는 마찬가지.
블라드가 말하는 ‘신의 이름’ 대신 자연의 섭리와 그 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했을 뿐. 하나 이는 그 ‘종사’의 가르침과 성격에 따라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방향인 것이다.
“그게…….”
“…믿을 수가 없군.”
천마 다음으로 제운비와 뇌천벽, 그리고 고위 마법사들 또한 신음했다. 그들 또한 강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뿐, 바보가 아니다.
애초에 자신을 객관화시킬 정도의 냉정과 상상력이 없으면, 화경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한다. 평소라면 당연한 시야,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 관점을 바꾸어서 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야? 애초에 우리 차원은 구멍투성이였다고?”
대격변의 날.
리치왕의 대두가 있기 전에는, 중원은 그런 ‘정벌자’의 손속에서 안전하고 자유로운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블라드의 말을 들어 보면, 중원은 이미 예전부터 수많은 정벌자들의 손이 타고 있었던 무인 지대인 셈이다.
그 대상이 천신, 상제, 혹은 부처 등으로 불리웠을 뿐.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리치왕이 있다고 해서 다른 놈이 안 들어 올 것도 아니라는 거지. 당장 귀하도 보았던 것 아닌가.”
천마의 말에 블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원 간 게이트.
다른 세계. 다른 초월자의 존재들이 사용하는 통로.
크기는 담벼락 옆에 있는 개구멍 정도지만 그 개구멍으로 자신을 믿는 자. 혹은 추앙하는 자를 보내 점점 그 크기를 불려 나간다.
그리하여 신앙이나 힘의 주체가 되는 존재의 본체를 소환하기까지 할 수 있다.
“바알은 어제오늘 처음으로 진입한 게 아니야. 이미 100년 전. 그때부터 몸을 깃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
“…….”
“흐음.”
주변의 다른 이들은 아득하게 여겨질 정도의 말이었지만, 천마는 손쉽게 납득했다.
이제껏 차원 침공은 겪은 적이 없고, 있다고 해야 딱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천마는 외적이 하나든 둘이든 혹은 서넛이든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은, 다른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이야기가 빠르군.”
즉.
다른 외적은 이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 이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마침 바알의 경우는 어둠나무의 몸체에 깃들어 있는 것을 천마가 때려잡고 리치왕이 마무리를 했지만.
“하기에 따라 새로운 우군을 맞아들일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다.”
합종연횡. 원교근공.
단순히 인류 연합과 리치왕과의 양강 구도가 아닌, 다자간의 구도를 찾아, 그들의 협조를 구해 원군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흑객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블라드, 그가 말하는 바였다.
천마는 잠시 숙고해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나쁘지 않군.”
“교, 교주…….”
“이건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자식들아, 반대하기 전에 우선 생각들부터 해 봐. 이이제이는 훌륭한 전술이라고.”
천마는 우우 일어나는 반발에 대해 한마디로 눌러 버렸다.
“적의 적은 친구다. 이게 뭐 어렵냐?”
애초에 이런 통치는 중원에서 수도 없이 많은 왕조와 군벌에서 하던 일이다. 지금 상태랑 뭐가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