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5)
웅성웅성. 수군수군.
소란이 한참이나 일었다. 정벌자. 그리고 바알과 리치왕의 대립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그 말은 우리 세상이…….”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오!”
그리고 천마의 과격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격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것들아. 나가. 나가!”
“…교주?”
“아니, 저희는 지금…….”
“지금이고 뭐고, 여기가 회의장이냐? 내가 이 몸으로 너희들 아우성까지 들어줘야 해? 닥치고 나가지 못하겠어? 죽는다?”
짜아악.
천마가 성질 잔뜩 담아 노려보자, 그제야 천무학관 교두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환자용 개인 천막이다. 그리고 천마는 어마어마한 적의 수장을 물리치고 크게 기진해서 며칠이나 의식을 잃었던 몸.
당연히 안정을 취하게 해 줘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한 것이다. 자그마치 거대 학관의 교두라는 사람들이!
“죄, 죄송합니다.”
“저, 저희는 그만 물러 가겠습니다…….”
우르르르. 우르르!
정신을 차렸는지, 그제야 화급히 빠져나가는 천무학관의 교두들. 그에 천마는 끌끌 혀를 찼다.
“쯧. 하여간에 먹물 새끼들은…….”
“…죄송합니다. 교주님.”
뒤늦게, 눈동자가 변한 흑객이 고개를 숙여왔다.
“네가 뭘? 저놈들이 문제지, 네가 문제냐?”
“하지만 제 몸입니다. 제가 아직 다스리지 못한 놈이고요. 저 때문에 본 교의 지존께서 이런 난잡한 꼴을…….”
괜히 혼자 침울해지려는 흑객에게, 천마는 손사래를 쳤다.
“됐어. 인마. 신경쓰지 마.”
거만을 떨고 난장판을 일으킨 건 흑객이 아니라 그의 몸에 깃든 이물이다. 딴에는 미안해할 수도 있지만 천마가 보기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흡혈귀 블라드.
놈은 충분히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못 하는 건 그냥 못 하는 거야. 약한 놈이 강한 놈 당해 내지 못하는 걸로 뭐라 할 사람으로 보이냐? 내가?”
“…….”
그 말에 흑객이 쓴웃음을 지었다.
탓하지 않는 걸 좋다고 하기엔 좀 마음이 상했다. 천마가 하는 말은, 넌 어차피 상대도 안 된다는 무시로도 비칠수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교주는 이런 곳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는 말을 하는 인물이 참 아니다 싶었다.
“됐고 호법이나 서. 정리나 좀 해야겠다.”
펄럭. 추우욱.
천마가 이불을 깔아 놓고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와공이다. 평상시에 가부좌를 틀고 오심향천을 하는 자세가 아니라, 누워서 천지 교태를 받아들이는 운공법.
그에 흑객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누굴 시킬까? 제운비? 뇌천벽? 자각 좀 해라. 인마. 지금 이곳에서 너는 나 다음가는 2인자야. 천마신교의 2인자.”
“…….”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놈이 너다. 되도 않은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할 수 있는 거나 해.”
“…알겠습니다.”
흑객의 얼굴이 진지해지고, 천마는 누운 그대로 깊이 숨을 쉬었다.
“후읍… 후우… 흐으으…….”
차분하던 호흡 소리가 점차 느려진다. 처음에는 일 분에 서너 번 하던 호흡을, 점차 한두 번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반각에 한 번 정도의 호흡으로 이어졌다.
스으으윽.
그리고 그와 함께 천천히, 손발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반대로 천마의 얼굴에 붉은 기가 서렸다.
“…이건.”
흑객은 경외 어린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반혼어심법? 아니, 그와는 달랐다. 치료를 위해 전신의 생기를 다 끌어모아 가사 상태로 빠져드는 방식이 아니다.
흑객은 그간 실전되었던 천마신교의 신공 중의 하나. 그냥 이름만 알고 있는 심법 하나를 떠올렸다.
‘몽마경심법…….’
꿈.
의식을 깊은 바다 속처럼 아래로 내려보내어, 찰나 간의 시간을 수십 수백 배 빠르게 느끼는 것.
흑객으로서는 처음 보는 신공이었지만, 마침 그의 몸에 깃든 블라드. 피에 대해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녀석의 지식이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려 주었다.
돌고래, 혹은 고래. 수중 생물 중에서 잠수 기간이 엄청나게 긴 녀석들이 있다. 물고기처럼 아가미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폐호흡을 하는데도 짧게는 이각(삼십 분), 길게는 한 시진 가까이 물속에서 활동하는 녀석들.
‘인간이… 이게 가능한 것이었나. 대단하다…….’
그 비결은 혈액이다. 평소에는 온몸에 퍼져 흐르는 혈액을 일순간 머리 쪽으로 모아 저산소증을 방비하는 것.
툭. 투둑. 투두둑.
천마의 전신은 미동조차 없지만, 대신 그의 눈동자는 감은 눈꺼풀 뒤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 * *
“허,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그러게 말이오.”
천막을 나선 교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혀를 찼다.
추태를 보였다. 이야기와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다고는 하나, 이제까지 수련해 왔던 평정심의 바닥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바알. 마계의 대마왕. 그 존재를 처단한 것이 천마다.
며칠간 기절했다가 다행히 멀쩡하게 깨어나긴 했지만, 그도 분명 어마어마한 내상을 입었을 터.
그런 이에게 몸조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니.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그나저나. 물을 것도 못 물었는데…….”
“뭐 말씀이오?”
“당연히, 전후 처리 말이외다.”
교두 월산이 턱을 쓸었다.
그간 꼬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레이드 공격대는 본래 목적을 달성했다. 고룡 쉐이크는 처단했고, 그 김에 어둠나무들도 함께 제거했다.
비록 그 과정에 바알이라는 대마왕이 갑툭튀 하고, 마교주 구옥경이라는 거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현경의 고수인 유장위가 산화되고. 리치왕이 잠결에나마 뒤척인.
“보고서는 보냈소?”
“학과장께? 당연히 보냈소. 그런데 다시 보내야 할 것 같소이다.”
“하아… 그러게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런 예상 외의 사소한(?)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 것들이, 하나하나가 중원의 명운이 걸려 있는 거대한 스케일이라는 거였다. 대마왕과 리치왕의 반목. 신계와 마계의 개입.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일단은 아는 대로 적어 보냅시다. 뭐, 길은 학과장께서 찾아내 주시겠지.”
“…그 수밖에 없다는 게 허망하군. 말이 교두지, 이래서야 세간의 장삼이사와 다를 게 뭐가 있소?”
누군가의 탄식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학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세상에 닥쳐올 위험을 막아 내고 있는 이들.
리치왕의 세력에 대비하는 중원인들의 마지막 보루.
그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세상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오늘 겪은 일을 보니, 그간 가지고 있던 자부심이 흔적도 없이 증발할 지경이었다.
정벌자.
이야기가 너무 커졌다. 그냥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라고 웃어넘겼을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
“차원이 달라… 차원이…….”
“아마… 학과장님께서는 이걸 다 알고 계셨겠지요?”
“그렇지 않겠소. 당연히…….”
제운비, 뇌천벽, 그리고 화경급의 수많은 고수들. 딴에는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는, 고귀한 영웅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거대한 코끼리 앞의 개미처럼 여겨졌다.
대체 이런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인간 연합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학관이라는 무력 단체가, 마왕 같은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제대로, 아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처음부터 끝까지, 회의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소. 리그웨더 학과장께서 현경, 그 급의 고수들을 항상 확보하려고 하신 이유를.”
“그러게. 현경의 무력이 문제가 아니었소. 이제 보니.”
초월자.
그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같은 초월자의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
“신화경에 들지 못하면, 싸움의 성립 자체가 안 되니까.”
현경의 전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최소 현경에 오른 이들이 신화경-혹은 신마경에 오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천외천.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까마득하기 짝이 없어 이걸 140년간 품고 고민한 리그웨더가 사람처럼 안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아니었지만.
두웅.
“…음?”
“방금… 느끼셨소?”
홱. 홰홱.
그렇게 고민하던 중, 갑자기 교관들의 고개가 확확 돌아갔다.
후르르. 파르르릇!
빳빳하게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막사.
천마가 있는 곳으로.
* * *
쿵. 쿵. 쿵.
‘이즈음… 에서…….’
의도적으로 꿈의 세계에 빠져든 천마. 그는 의식을 잃기 전의 사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고수일수록 생사결의 순간에서 얻는 것이 많다. 수행자가 만나는 벽은 가면 갈수록 높아지고 두터운 법.
당연히 고수일수록 한계에 달한 순간 떠올리는 생각과 감각이 많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세월.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찰나.
보통은 백을 얻어도 열을 간직하기 힘들다.
그러나 천마는 달랐다. 지금 전신의 혈액이 대뇌로 모이며, 그는 수십 수백 배의 시간을 가속하고 있었다.
장자의 호접몽.
그건 단순히 철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꿈의 순간, 인간은 현실에서 찰나의 시간을, 꿈속에서 십 년의 삶처럼 늘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몽마경심법.
평소보다 수십 배로 강화된 사고력으로, 천마는 기억을 재구성했다.
쿵! 쿵! 쿵!
시야는 검었다. 거칠고 빠른 흐름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당연하다. 한참을 바알의 혈관 속으로 흘러가던 중, 강력한 압박이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꾸욱.
‘여기서…….’
천마가 떠올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차원 간 게이트. 그에 막혀 버렸던 순간이다.
-크워어어어!
천지를 뒤흔들던 바알의 포효.
놈이 허를 찔린 순간, 자신의 심장에 위치시켰던 차원 간 게이트.
꾸드드득.
그건 천마의 내공으로도, 페이탈리스트의 보조로도 뚫을 수 없었던 ‘벽’과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벌자라고…….’
차원의 경계. 그걸 찢어발길 수 있는 거대한 힘.
불완전할 경우, 물질을 에너지화시킬 정도의, 버섯구름을 일으킬 정도로 강대한 힘.
꾸드드득.
그 힘의 역장을 천마는 뚫지 못했다. 아무리 내공이 깊어도, 강대한 힘을 가져도, ‘차원’이 다른 힘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했다.
그건 원래라면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까. 혹여 경험을 하는 자라면, 그 압도적인 힘에 의해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마니까.
‘다시.’
꾸드드득!
하지만 천마는 찢겨 나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운이었지만 그의 심후한 내력과 깊은 깨달음은, 육신이 파괴될 뻔한 순간 반사적으로 무언가를 끌어와서 자신을 방비했다.
그 무언가.
그게 지금 천마가 찾고 있는 어느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유장위는 어둠나무의 진체를 꿰뚫은 다음, 갑자기 발광했다.
단 한 번.
죽음과 삶의 경계. 그 역시 원래라면 전신이 터져 나갔을 거대한 자연현상을 겪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친 듯이 집착한 것이었다.
차원 간 게이트가 가진 힘.
그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이자, 강대한 벽이었다. 그걸 자신의 베기로 부숴 낼 수 있다면, 그는 반쪽짜리 신화경이 아닌 진짜 신화경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꾸드드득.
하지만 당연히 그 과정은 쉽지 않다. 현경의 극에 달한 고수에게, 진정한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하는 벽은 애초에 세상에 많지 않은 법이다.
거꾸로 그랬기에, 유장위는 죽어라고 매달렸다.
게이트.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면,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경지로 녹여 낼 수 있다면, 하고.
그래서 바알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아스라한 끄트머리에 겨우 손을 대었다. 그리고 산화했다.
육신이라는 제한된 그릇 안에서, 그건 너무도 거대한 깨달음이었기에. 단 한 번의 경험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몸이 죽은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그와 달랐다.
‘다시.’
꾸드드득!
그는 꿈의 세계에서 게이트. 그 막막하던 벽의 본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계속해서.
우드득! 빠드드득!
‘음…….’
느리게. 더욱 느리게.
당시 멸절공. 자신이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내력을 쏟아냈던 육신. 진기가 어떻게 흐르고, 쏘아져 나간 흐름이 어떻게 틀어막혔는지 몸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익!
쉽지 않았다.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그 당시의 긴박감. 위기감에 휩싸인 상태로, 모든 것을 다 감지하기에는 모자랐으니까.
하지만 수십번 수백번을 꿈속에서 되돌린 끝에.
‘…이거다.’
그는 게이트. 자신의 전력으로도 부수지 못한 벽의 존재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