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6)
쏴아아아!
그날은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다다다닥. 다다다닥.
지붕을 두드리는 장대비에 기와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쏟아져 내리는 폭우. 거기에 천지를 울리는 뇌명.
꽈르릉! 꽈광!
가까이서 터진 뇌성벽력에, 야간 불침번을 섰던 사람 여럿이 엄하게 깨서 투덜거렸다.
“끄으응… 뭐야.”
“아, 젠장…….”
축축하고 습한 이불 안으로 파고 들었지만, 뇌성은 계속해서 그들의 귀청을 괴롭혔다.
꽈르릉! 꽈르릉! 꽈르릉!
습한 대기는 폭음을 계속해서 메아리처럼 울려 댔다. 그 뇌성 때문인가, 학과장실에서도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바스슥. 파밧.
“…흐으윽!”
이불을 젖히고, 격하게 몸을 일으킨 금발 벽안의 미녀.
천무학관의 학과장인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였다.
하지만 어느 무슨 때이든, 태평해 보일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던 그녀가, 지금은 진땀을 송글송글 이마에 흘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 무슨…….”
새파랗게 질린 낯빛. 한참이나 멍하게 질려 있던 그녀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 때문이었다.
“악몽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지?”
꿈.
드래곤은 꿈을 꾸는 일이 없다.
애초에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원한다면 몇 년이고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고, 혹은 몇백 년 동안 숨만 쉬며 누워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리그웨더는 굳이 밤이면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건 학관의 학과장으로서 ‘인간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물론 그녀의 본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천무학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걸 그냥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경외는 가질지언정 신뢰는 가지기 힘들다. 그 때문에 실제로 잠이 필요하지는 않으나, 리그웨더의 생활에는 ‘취침’이 생겼다.
인간으로 치면 부모가 애들이 잠들 때까지, 10분 정도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것만으로도 애들은 금방 잠이 드니까.
그런데.
조금 전 그녀는 정말로 잠이 들었고,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인간처럼.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톡. 톡. 톡.
“리치왕…….”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는 팔을 손가락을 두들기며 한참이나 꿈의 내용을 되짚었다.
인간의 악몽이 대개 그렇듯, 그녀가 꾼 악몽의 내용은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경험이었다.
한 차원의 조율자이던 드래곤이 떼로 몰살당하고, 마지막 남은 그녀가 다른 차원으로 도망쳤던 때.
등 뒤에 악령이 달라붙은 채로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그 소름 끼치는 기억이었다.
“누군가를… 불렀었지.”
자그마치 140년이나 지난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드래곤. 망각이 없는 골드 래곤은 그 당시의 참혹했던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주마등이라 할 만한 기억을.
동족의 죽음. 그로 인한 패퇴.
그리고 이 차원 - 중원이라 불리는 세상에 넘어올 때 있었던 작은 해프닝 또한.
-들리십니까? 제 말이 들리시나요?
당시 리그웨더는, 공간 이동 전에 자신의 여력을 모두 모아 다른 차원에 외쳤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차원 이동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텔레포트조차 당장 위험하다고 무작위로 썼다가는 숨 쉴 곳 없는 암벽 속에 틀어박혀 죽을 수도 있다.
하물며 아예 다른 세계로 움직이는 차원 이동은? 잘못하면 공기가 없거나, 뜨거운 용암, 혹은 독지가 가득한, 환경 자체가 생명에 적대적인 곳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곳으로 도망쳐 봐야 마력은 마력대로 소모하고, 뒤쫓아온 리치왕에게 도륙당할 터. 그래서 리그웨더는 ‘응답’이 필요했다.
‘용사의 존재.’
자신의 정신파를 들을 수 있는 고등한 존재가 있다면, 설마하니 단 한 명만 있지는 않을 터다. 적지 않은 문명의 발달을 이루고 있을 테고, 몸을 의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무작위로 쏘아 낸 정신파에 답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중원.
‘분명 응답이 있었다. 대단히 당황해하는 것 같았었지만.’
그녀가 보낸 정신파에 응답한 존재는, 다소 거칠긴 했으나 분명 신성의 일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방향을 정한 리그웨더는.
차원 벽을 넘는 순간 죽을 뻔했다.
방벽의 밀도가 어마어마했다. 고래가 그물에 걸린 것과 같았다. 빡빡하고 단단한 차원의 장벽은, 격이 높은 골드 드래곤의 거체를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으려 들었다.
급히 폴리모프를 써서 인간형으로 크기를 낮추었지만, 그 와중에 본체에 입은 피해는 끔찍할 정도. 최소 수 백년은 치료에 힘써야 할 만큼 큰 상처였다.
우습게도 그건 그녀를 뒤쫓은 리치왕도 마찬가지였다. 차원 방벽을 넘어오며 본신의 힘 대부분을 상실하고,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강제로 차원의 벽을 벌리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직속 수하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당시 일어났던 수많은 굴혈과 던전은 그 여파였다.
‘그자의 성정이 폭급해서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 그가 점잖게 이 차원에 정착한 후 ‘이런 이런 자를 본 적이 있소?’라고 원주민들에게 물으면서 돌아다녔다면, 늦어도 1년 이내에 리그웨더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 찬 그는 너무도 급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차원의 원주민들을 겁박, 혹은 폭압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끌어모으며, 리그웨더의 존재를 물었다. 그래서 일이 꼬였다.
중화인.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이들.
피부색만 달라도, 색목인이니 뭐니 하며 오랑캐 취급하고, 사람 대우를 안 해 주는 인간들의 세상이 이곳이다.
그들은 리치왕이 부리는 끔찍한 괴물과, 특히 언데드-죽은 시신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보자마자, 즉각 사악한 사마외도의 존재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내게는 다행이었지.’
당연히 리치왕도 리치왕이라, 먼저 주먹부터 날리고 보는 이들에게 허허 웃으며 말로 하자고 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달려드는 족족 인간을 처죽였다.
그리고 차원을 넘으면서 소모한 힘을 보충할 겸, 중원 전체를 테라포밍하며 사령 마력을 끌어모았다. 수많은 시체와 위험한 괴물을 부리며 땅을 변환시키던 그는.
갑자기 어느 순간 활동을 멈췄다.
위치는 십만대산.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마교’라는 정교일치의 강력한 무력 단체와 충돌한 끝에 잠에 빠져든 것이다. 나중에 그걸 알게 된 리그웨더는 확신했다.
‘용사와 마주쳤다. 틀림없어.’
중원.
마법과 정령의 힘이 없는, 인간이 대부분인 세상.
하지만 이곳에도 신성과 유사한 파사현정의 힘이 있었고,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 까마득한 옛날에 차원을 넘어섰을 초월자들의 흔적도 있었다.
특히 무인들. 그중에서 구파일방이라 불리는 정도 무림맹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 소드 마스터급 강자의 존재는 즐비했고, 개중에는 그라나다 대륙 기준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강자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라, 난데없이 침략해 온 리치왕의 존재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다. 남자는 싸우고, 여자와 어린이는 도망쳤다. 힘을 잃은 노인이나 부상자들은, 후방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며 리치왕의 수하들과 대적했다.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리그웨더는 거기에 개입했다.
정도 무림맹의 맹주와 군사에게 마법과 정령의 존재를, 그리고 중원인들에겐 생경한 몬스터들의 약점을 알려 주며 대응법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균형이 이루어졌다.
대명제국은 무너졌다.
중원 전역에 일어난 대참변에 관도는 파괴되고, 막대한 세금을 걷어들이던 중앙 행정부는 철저하게 영향력을 잃고 몰락했다. 하지만 각 지방의 제후나 지역 유지들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무인과 지역 군벌이 손을 잡고 조직을 통합하고, 각기각곳에서 자력 갱생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리그웨더는 무림맹에 새로운 군사 학교의 개념을 제창했다.
바로 ‘학관’의 존재였다. 몬스터라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 앞에 인간들은 일치단결했다.
그 이후로 140년.
문화가, 기조가 바뀌었다.
이종족이 없었기에 중원인들은 서로서로가 경쟁 상대였다. 그래서 문파의 비전과 비기를 서로 숨기는 습성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세월이 가며 점차 느슨해졌다.
인류는 중원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고, 폐쇄적이던 무가와 문파들은 고대의 비전과 비술을 아낌없이 공유했다. 그리하여 강해졌다.
화경급 무인의 수는 수십 배로 늘어났고, 현경급 무인들의 수는 한 자릿수를 넘었다. 고작해야 2세기도 지나가기 전에, 인류는 시련에 적응하고, 흉악한 몬스터들의 본거지를 처리하며 본토 수복에까지 접어들 정도였다.
‘그래 봐야 리치왕이 부활하는 순간. 모든 건 끝난다.’
하지만 리그웨더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완전수 12의 제곱. 144년의 웅크림의 의미를 아는 존재였다. 한 세기 반을 절치부심하며 힘을 기르고 있을 리치왕. 그가 다시 나타날 때, 인류는 지난번 대격변보다 더한 피해를 입을 터.
그랬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인재를, 인물을 찾았다.
필요 조건은 최소 현경-그라나다의 기준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강자다.
그들 중 진정한 벽을 넘은 초월자(Overcomer)가 나타나야, 리치왕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은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늘.
“후우…….”
분명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해 왔다. 그래서 당장은 평화롭다. 작금의 중원은 140년 전의 대격변 때에 비해, 월등히 강한 전력을 가졌다.
정보가 정확하다는 한정하에, 지금의 인류가 몬스터들과 싸울 경우 승산은 8할 이상. 세칭 ‘대반격의 날’에는 많은 피가 흐를 테지만 그래도 이겨 낼 것이다.
‘하나 여전히 비대칭전력은 부재다.’
문제는 리치왕이다. 그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 전세는 역전 정도가 아니라 삽시간에 박살 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의 끔찍함을 모른다. 실제로 그와 마주쳐 본 이는 전부 죽었고, 멀리서 그 위용을 본 이들의 서술은,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나 그저 전설처럼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현 시대에 리치왕의 진정한 힘을 아는 이는 오직 리그웨더뿐.
그녀는 망각을 모르는 드래곤이며, 그와 직접 맞부딪히고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학관의 전력 상승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는, 옛 ‘마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하던 리치왕.
그의 폭급한 발걸음을 멈춰 세웠을 ‘용사’의 자취를.
“흑객이라 했지… 나이에 비해 강하긴 했지만 그는 아니다.”
얼마 전 멸문했다던 마교의 전승자 하나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겐 실망스럽게도, 흑객은 용사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계승자도 아니었다.
리그웨더가 추정하기로 최소 반신급.
중원의 신화경이나 신마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자가 필요한데, 흑객에겐 그만한 힘이 없었다.
그나마 핏속에 마계의 귀족이 깃들어 있기는 하나,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전장에서나 위력을 발휘할 뿐.
또 그만한 피가 흐르는 곳이라면, 사체와 사령마력 또한 엄청날 터. 여러모로 리치왕과 붙기엔 모자란 이다.
“앞으로 4년… 혹은 3년… 그 안에 찾을 수 있을지…….”
쿵쿵쿵! 딱딱딱딱!
긴 탄식을 쏟아 내던 리그웨더. 그런 그녀의 귀에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손을 흔들어 문을 열어 주자마자, 급박하게 들이닥치는 교무처장 구용천.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흥분이 가득했다.
“학과장님!”
“갑자기 웬일인가요. 처장님? 이리 급박하게…….”
“급보입니다! 고룡 쉐이크 토벌대의!”
펄럭!
그가 내민 반쯤 접힌 서신은, 비에 젖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이었다. 갸웃하며 그 서신을 읽어 내리던 리그웨더는.
“아……!”
점차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타났구나… 이제야.”
그것은 오랜 시간 기다리며 갈구하던 자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