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8)
솨아아아. 쿠릉. 쿠르릉.
폭우가 계속 쏟아졌다. 뇌명도 있었다.
이따금씩 하늘을 하얗게 물들이는 뇌운은, 단련된 무인들까지도 어깨를 움찔하게 했다.
빠지직! 꾸르르릉!
꽈아아앙!
“어우! 씨!”
벼락 한 줄기가 선명하게 천지를 밝혔다. 아무래도 가까운 산이나 나무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 정말 시끄럽네.”
“몸들 조심해. 쇠붙이 관리 잘하고.”
짐짓 대담한 척, 무심한 척을 하면서도 무인들은 주춤주춤 어깨를 낮췄다. 그러면서 허리춤에 찬 검이, 기름 먹인 종이에 잘 봉인되어 있는지도 확인했다.
“흠흠. 으흐흠!”
벼락은 쇠에 잘 이끌린다. 오래전부터 학관에서 이리저리 알린 탓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식이다.
“비가 거세다! 다들 발걸음에 주의하라!”
“미끄럼 주의! 비가 거세다!”
철벅. 철벅. 철벅.
우중행군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이, 상급 표사들의 외침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백년 전만 하더라도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던 기초 지식이, 이제는 누구나 아는 것이 되었다.
-향후 백 년.
학관 때문이었다. 그들의 근본 목적은 언제고 찾아올 반격의 때를 위한 전력 양성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모름지기 군사력은 풍부한 물산에서 나오는 법. 풍부한 물산은 민간이 안정되어야 보장된다.
당장 가족이 굶는데, 몇 년 뒤에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며 학관에 몸을 담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번에 일 마치고 나면, 한동안 집에 좀 들러야겠어.”
“아, 자네 여동생이 이제 열여섯이지?”
자박. 자박. 자박.
특히 본인은 배고픈 것을 참아도, 내 자식, 내 동생, 내 부모가 힘들어하는 것은 더욱 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학관은 여러 가지를 민간에 베풀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식의 독점을 유지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큰 물결 앞에는 휘말려서 섞이고 말았다.
학관연합.
특히 그중에서도 천무학관은 유달리 멀리 보고 배움을 공유하려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연금술과 마법을 통해, 기본적인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치고, 그에 따르는 위생, 영양학, 의학 등에 대한 지식도 민간에 많이 퍼뜨렸다.
“계속 쏟아지네. 장마가 되려나…….”
“시기상으로 좀 이른데. 농가에서 둑 관리를 잘해야겠어.”
덕분에 예전 같으면 밥벌이에만 급급했을 표국의 무사들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이 풍족해져야, 무를 단련할 사람이 늘어난다. 무를 단련한 사람이 늘어나면, 더 많은 땅. 더 많은 저수지를 권역에 둘 수 있다.
선순환이다. 기본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이치와 같았다. 민(民)이 부강해야 군(軍)도 있다. 식자중에 이를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긴 중원의 역사에서, 반란이나 역모는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통치자들은 언제나 민초들이 부유해지면 딴생각을 할까 두려워했다.
특히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들. 재지를 타고나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이들은, 언제고 자신들의 부족한 아들들의 목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절이 도래했다. 그건 너무도 명백한 적의 존재 때문이었다.
“전방에 몬스터!”
“놀-고블린 합동이다! 다들 방어 위치로!”
타다닥. 타다다닥.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가 반응했다. 저마다 방어 장구를 챙기고, 사전에 준비된 자리로 붙어 표물을 방어했다.
크아아아! 끄르르륵!
쏟아 붓는 빗속에서 짐승의 울림이 메아리쳤다.
하이에나의 머리. 조잡한 병장기를 들어 올린, 털이 부숭부숭한 짐승의 몸.
그리고 짙은 초록색 피부 덕에, 자체적인 위장이 가능한 고블린들이 표국의 사람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캬아아아!
“방패! 방패!”
“진형 지켜! 원형 진으로!”
카캉! 카드득!
쇠 부딪히는 소리. 표사들의 함성과 명령을 내리는 고함소리가 섞였다.
가까이 달라붙으며 난전을 노리는 몬스터. 그리고 거기 말려들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 말려들어 진영이 흐트러지면 삽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몬스터의 근력과 순발력은 기본이 인간의 두 배다. 무기 없이 발톱으로 할퀴기만 해도 사람의 살은 찢어진다.
타앙. 타앙. 타앙.
표국주는 규칙적으로 강철 방패를 두드려 소리를 냈다. 북소리 대신이었다. 유달리 울림이 좋은 그의 방패 소리는, 앞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표사들에게 아직 후방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침착하게! 당황하지 말고! 방어! 방어!”
“자리를 지켜라! 틈이 보인다고 딸려 가지 마라!”
대몬스터 전투 방식은, 어지간하면 전 수비. 후 반격의 양상이었다.
고수로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이목이 형편없었다. 보다 더 짐승에 가까운 몬스터가 먼저 인간을 발견하고, 공격해 오는 일이 9할이었다.
그리고 흉포한 만큼, 초반에 맹위를 떨치다가 급속하게 체력을 소진하는 것이 몬스터였다. 특히 놀이나 코볼트처럼, 온몸이 털로 가득한 녀석들이 유독 그랬다.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승리다!”
“짐승형 몬스터는 땀을 흘리지 못한다!”
표국주와 상급 표사들이 끊임없이 외쳤다. 싸움터에서 당장 두드려 맞다 보면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되새기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땀을 흘리는 것으로 체온을 내릴 수 있다. 전신에 퍼진 모공은, 혈액의 과열을 막는 우수한 냉각기관이다.
털 많은 동물의 몸은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맹수도 일시간에 모든 힘을 뽑아낸 다음, 과열된 몸을 쉬지 못하면, 달아 오른 몸이 축척된 열기에 익어 버린다. 산 채로 쪄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땀을 흘려 몸을 냉각시킬 수 있었다.
크르르. 크르르르…….
“표국주! 놈들의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기다려! 좀 더 기다려! 일각만 더 끌어 본 다음에 판단한다!”
호랑이가 민가를 습격하면, 작은 도시도 공포에 질려 마비된다. 다들 자신의 죽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산골 마을에서는 오히려, 장정 수십 명이 횃불과 창만 가지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
조잡한 목창이 열 개만 되어도, 야수는 주춤한다.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 흩어지지만 않는다면, 인간은 충분히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무예나 전략을 배우지 못한 일반인조차 그렇다. 세간에 널리 퍼진 기초 전술서나, 기초 무공서를 읽은 이들은 두려움이라는 본능을 제어하는 법을 익혔다.
타앙. 타앙. 타앙.
표국주가 두들기는 방패의 쇳소리는,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었다. 반면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크르르… 크헉. 거으윽…….
매섭게 달려 들다가도 갑자기 비척거리고, 긴 혀를 내밀어 헉헉대며 숨을 몰아 쉬었다.
비틀. 와당탕!
전방도 아닌, 슬쩍 후방에 위치한 놀 십여 마리가 일시에 엉크러졌다. 표국주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찔러 나간다!”
“방패 앞으로! 돌격이다!”
우와아아아!
돌격 직전에 고함을 지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큰 소리를 질러 두려움을 지우고, 몸에 열을 불어넣는다. 비로 습기가 가득한 대기는, 수십 명의 고함을 수백 명이 내지르는 것처럼 우렁우렁하게 만들었다.
캑캑! 케르르…….
끼익! 컥…….
강약약강의 대표 주자. 겁이 많은 고블린이 먼저 꼬리를 말았다. 다음으로 지친 놀 들이 엉거주춤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미 피로로 둔해진 몸은, 비에 젖어 잔뜩 무거웠다. 허우적거리는 놈들의 뒤를, 충분히 체력을 비축한 채 달라붙는 인간들.
우와아아아!
뻑! 따앙!
검이 아니라 방패가 먼저 휘둘러졌다. 표사로 나선 이들 중에서 작은 원형 방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없었다.
방패는 수비적인 장비로 보이지만, 사실 공격에 나설 때 더욱 빛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뻑! 뻑! 끄르륵…….
몬스터의 이빨과 발톱은 날카롭다. 특히 고블린처럼, 부는 화살이나 조잡한 활을 든 놈들이 반전이라도 하면,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티팅! 티팅! 캑!
하지만 팔에 찬 방패 하나만으로도, 그런 위험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두려움 없이 달려들 수 있는 병사는, 그 자체가 강병이다.
간단한 방어구 보급만으로도 인간은 훨씬 강해질 수 있었다. 달리 옛 왕조들이, 민간에서 검의 패용은 허락해도, 창이나 방패는 불문곡직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잡아! 잡아! 지금이야!”
“달라붙어! 일각! 일각이다!”
우르르르르!
초반에는 겁먹은 듯 수세를 취하던 인간들이, 맹호처럼 달려들었다. 그 기세를 더 높이려는 듯, 후방에서 긴 뿔나팔의 소리가 울렸다.
부우우웅---!
‘때가 좋다.’
표국주는 달려 나가는 표사들과, 이참에 조잡한 목창이라도 들고 끼어드는 쟁자수들을 보았다. 얌체 같은 짓거리지만,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싸움에서 더 많은 전력은, 더 적은 피해를 제공한다. 그리고 전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때는, 싸울 때가 아니라 패주하는 적을 쫓을 때다.
“표국주, 너무 멀리까지 가는 것 아니오?”
“조금만. 반각만 더 준 후에 진정시키겠습니다.”
상단주의 염려에 표국주는 대답했다.
한 번 실전을 겪고 나면, 여차할 때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이 남자. 어설프더라도 이렇게 피를 한 번 본 쟁자수들은, 앞으로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 터였다.
몬스터 부산물 조금 내어주고, 상시 동원하는 일꾼들이 용감해진다면, 그건 남는 장사였다.
부우우웅---
충분히 피해를 줬다 싶을 때, 표국주가 다시 뿔나팔을 불었다. 고함과 비명으로 시끄럽던 사위가, 차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작은 소란이 이어졌다.
퍽! 퍼억! 악!
상급 표사들이 말단 표사를, 말단 표사들이 쟁자수들을 제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전에 피를 보아서 잔뜩 흥분한 젊은 남자들은, 뒤통수를 후려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 안 차려? 야! 임마!”
“새끼들아! 그러다 훅 간다!”
“으으으…….”
작은 소란은 얼마 후 사그러들고, 멀리 퍼져 나갔던 추적대도 하나 둘 복귀했다. 표국주는 상급 표사들이 하나 둘 인원 점고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려 보내기를 기다려 명을 내렸다.
“출발.”
다그륵. 과르르륵.
물 잔뜩 먹은 진흙을,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져 나갔다. 잔뜩 열이 올랐던 쟁자수들은, 그제야 뒤늦은 피로감에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조금 늦춰라.”
표국주는 이를 이미 예상한 듯, 대열의 앞뒤로 지시를 내렸다. 그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조금 전의 싸움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솜씨가 퍽 좋으시오. 가히 군장의 지휘를 보는 것 같았소.”
“별말씀을. 그저 기본에 충실할 뿐입니다.”
상단주가 칭찬의 말을 건넸지만, 표국주는 무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상단주는 더욱 흥미를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크게 웃으며 어깨를 펴는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남자는 요란해지는 법이다.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표국주는 평범하지 않았다. 인물이었다. 그리고 상인은 그런 인물을, 얼마나 많이 알고 가까운가 하는, 인맥이 곧 재산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사람의 업은 보통 대를 이어 나간다. 능력 있는 표국주라면, 보통 무가에 뿌리를 두게 마련이다.
“한미한 가문이라, 딱히 들으신 적 없으실 겁니다.”
“호오…….”
그리고 무가 출신은 제 가문의 이름을 요란히 알리게 마련인데……. 이건 또 의외였다. 자신을 피력하지 않는 표국주에게 조금 더 흥미를 느꼈다.
“그 소매 안의 불꽃 표시… 책에서 본 적이 있소만.”
우뚝.
상인이 알은척을 하자, 표국주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흑염은 저희 표국의 상징이라…….”
“그리고 예전 어느 때에 사람들이 크게 쓰기도 했지요.”
상인이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자, 표국주가 더욱 얼굴을 굳혔다.
“…불편하십니까?”
“괜찮소. 괜찮소. 예전에 한때 이상한 오명을 썼다 하나, 잡스러운 풍문에 휘둘려서야 장사 못 해먹지. 무엇보다…….”
상단주는 크게 손을 내저었다. 진심으로, 검은 불꽃이 무얼 의미하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되는 법이고, 평가는 후대에 갈리기에.
장사치에게 중요한 건 현재다. 믿음을 줄 수 있는 표국은 대단히 귀한 동업자였다.
“일전에 크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대단히 좋게 보고 있다오. 흑객. 그런 이름이었던가?”
“…흑객. 이라면.”
표국주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해 왔다.
“사천제일상단에서 이렇게 본 교에 호의적이신 줄 몰랐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별말씀을. 천마신교의 후예를 만나 반갑소.”
진작에 알은척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오가장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꺼덕꺼덕.
언덕을 넘어서자 너른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너른 길 끝에 크게 늘어선. 성채 같은 대규모 건물 집단에 눈을 두며 상단주는 한숨을 쉬었다.
“도착했군.”
“예. 천무학관이 보입니다. 그리고…….”
눈이 조금 더 좋은 표국주가, 크게 열린 영채의 문. 그 앞에 잔뜩 모인 사람들과 그들이 든 깃발을 보고 말했다.
“규모로 보아 공격대군요. 원정에서 복귀하는 모양입니다.”
“허. 이 날씨에도? 참 부지런한 이들이군.”
솨아아아.
거세게 비가 내렸다. 우여곡절 많았던 싸움을 끝내고, 천무학관의 필드 레이드 공격대가 복귀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