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19)
드르릉. 철컥. 드르르륵!
영채의 문이 열렸다.
천무학관을 높고 넓게 감싼 담벼락. 그 남쪽의 영채에, 큰 깃발이 걸렸다.
솨아아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박자에 맞춘 발소리였다.
좍. 좍. 좌좍.
제식(制式)은 그 부대의 전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 준다. 똑같은 박자에 똑같은 걸음걸이. 동일한 거리와 한눈에 보이는 똑같은 움직임은, 유지하기 극히 힘들다.
병사 개개인이 단체로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식은 강군의 척도다. 평소에 지휘관이 얼마나 부대 통솔에 신경 쓰는지를 증명한다.
자잘한 개인의 움직임들이 없고, 부대의 일관된 움직임에 맞춰 상시 하나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쯧…….’
그렇게 볼 때, 천무학관 레이드 공격대의 제식은… 아쉬웠다. 잘 봐 줘도 평균을 겨우 넘는 정도.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추는 정도는 하고 있지만, 상체나 어깨의 흔들림은 제각각이었다. 멀리서 보면 우루루 빗발이 치는 가운데 뭉쳤다가 흩어지는 흙더미 같았다.
강군이라고 볼 수 없는 움직임. 어찌 보면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었다.
“다소 비 탓이 있습니다.”
“…뭐, 그렇겠지요.”
천무학관의 학관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무가이거나 혹은 그의 방계다. 출신 자체가 엘리트. 정예이기에, 거꾸로 개개인을 부속처럼 다루기 힘든 것이다.
군대는 병사 개개인을 항상 경직되게, 평시에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휴식이나 이동에도 군기 타령을 하며 ‘똑같이’ 움직이게 한다.
재우고 먹이는 시간조차 통일한다.
무인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십인십색. 백인백색. 사람은 애초에 제각각이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수련을 하고, 똑같이 움직여도 서로서로의 성취가 다르다.
군대는 이 조차도 강제로 붙들어서 한 덩어리를 만들 수 있지만, 무인에게 그랬다간 전력의 저하를 불러올 뿐이다.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서로의 합을 맞추는 데 써야 하는 것이 군대라면, 무인은 조금이라도 시간이 생기면 개인 수련이나 소소한 깨달음을 복기해야 하는, 그래야 강해지는 이들이다.
칼날을 종잇장처럼 날카롭게 세우면, 큰 충격에는 뭉그러지고 마는 현실적인 한계다. 천무학관처럼 개개인이 우수한 학생일수록, 통일된 움직임을 가지기 힘든 까닭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장수급 전력이외다.”
“음.”
물론 그 대신, 전체 전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높다.
깃발 한 번에 부대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는, 군대로서의 역량은 모자라지만, 학관생 한 명 한 명은 고대의 맹장들에 비견할 만큼 강하다.
당장 4학년 학관생 중 누구를 뽑는다 해도, 옛 풍문에나 등장하던 인중룡 여포나 관우 장비 정도의 위용을 보일 수 있었다. 군기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충분히 감내할 만한 이익이었다.
-부대---차렷!
촤악! 촤악! 촤악!
부대 정지를 외친 명령에, 세 번의 발자욱이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아쉽지만 어찌 보면 딱 이 정도가 한계. 개개인의 개성을 죽여서라도 만드는 군대가 아닌 이상, 완벽한 통솔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 수 있었다.
“학과장께서 오십니다!”
“제운비 공격대장 앞으로!”
타다닥. 타다다닥.
제운비가 아니라 학관생과 교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나갈 길을 내어주기 위함이다.
차악. 차악. 착.
어수선함은 있었지만, 발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대열은 곧 정비되었고, 좌측에는 2학년이 우측에는 3학년이 섰다.
그 각각의 앞에 4학년이 흩어져서 섰다. 작은 분대의 선봉의 위치이고, 그 앞으로 조교, 교관, 교두가 나선다.
척. 척. 척.
제운비가 학관생들의 사이에서 나와 전면에 섰다. 레이드 공격대장. 그런 그의 앞으로 리그웨더가 조용히 나왔다.
금발에 벽안. 폭이 넓은 비단 궁장은 중원의 것이면서 약간 서역의 색채가 섞인 것이었다. 그녀의 뒤로 교무처장 구용천 및 십여 명의 교관들이 따라 섰다.
솨아아아아.
비가 계속 쏟아졌지만, 그녀의 옷을 적시는 빗방울은 없었다. 머리 위 상공에서 빗방울이 알아서 비켜 나갔다. 마법의 대가인 드래곤은, 의지만으로도 비를 흩어 버렸다.
터억. 쿵.
“보고합니다. 필드 레이드 공격대. 총원 교두 제운비 외…….”
제운비가 군례를 취하며 보고했다.
인원 점고를 몇 번이나 마쳤기에 흐트러짐은 없었다. 교두와 교관과 조교. 4학년에서 3학년 2학년까지. 총 인원의 보고를 짧게 마쳤다.
리그웨더가 잠시 대열 후의 한 무리. 천마신교의 일단에 시선을 보낸 후 끄덕였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공격대의 제군 여러분.
솨아아아…….
빗소리가 요란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무엇에도 가려지지 않고 퍼져 나갔다. 진흙탕이 된 연병장 위에서, 이번 공격대에 참여한 모든 인원은 철통처럼 서 있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보인 여러분의 활약으로, 인류는 한 걸음 더 안정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며, 억압된 대지는 다시 움을 틔우고 생명이 돋아날 것입니다.
열병식(閱兵式)은 지루해 보이지만, 군대가 그 존재 의의를 깨닫고 다짐하는 시간이다. 싸움을 겪은 이들, 죽음을 겪을 이들에게 ‘왜’는 하염없이 중요하다.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병사들은 최하급 병종, 징집병이나 다름없다. 지방 영주들이 명령하니까 뚤레뚤레 아무거나 들고 나온 이들. 그런 이들은 옆에서 부상자만 생겨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싸우다 잘못하면 죽는다. 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주지 않는데 죽고 싶어 하는 이는 없다.
천무학관은 이들과 달랐다. 스스로 강해지기를 원하고, 죽음 앞에서의 한 걸음이 힘을, 부를, 명예를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정예이지만, 그 기본 바탕은 사익.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다. 그런 개인의 사욕을, 전체의 공익으로 포장하는 것이 장군의 역할이다.
그리고 리그웨더는, 원한다면 언제든 명장이 될 수 있었다.
-농부는 토지를 되찾고, 상인은 안전한 도로를 얻을 것입니다. 몬스터들을 몰아낸 땅은, 사람의 손이 닿으면 밭으로, 닿지 않으면 초지가 될 것입니다. 마소가 먹을 풀을 내어 놓거나, 새들이 날개를 쉬어 갈 숲과 호수가 될 것입니다.
파사아아아…….
그녀가 말하며 두 손을 하나로 모았다가 펼치자, 하늘에서 쏟아지던 비가 꽃비로 변해 날렸다.
파르르륵. 팔랑. 팔랑.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어느새 맑게 개었다. 푸르른 가을하늘처럼 맑은 청천 아래서, 흰색과 분홍색의 꽃잎들이 온통 가득히 날고 있었다.
“…와.”
“세상에…….”
도열해 있던 학관생들이, 참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손에 쥐고 비볐다.
그러자 발갛게 물드는 손. 꿈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꽃잎으로 바뀐 것이다.
파르륵. 팔랑팔랑.
물리법칙을 뒤틀고 반전시키는 것이 마법.
그것으로 학관생들을 놀라게 한 리그웨더는, 이번에야말로 꿈이자 환상인 대단위 마법을 사용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의 고귀한 희생 때문입니다.
파사아아…….
꽃잎을 매개로 하여, 수많은 환영들이 학관생들의 뇌리에서 피어났다.
어둡고 단촐한 공간. 가난한 집이다. 풀 죽은 아이의 빼빼 마른 팔다리가 첫인상을 보완해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갑자기 펄쩍 뛰어나, 환한 얼굴로 웃는다. 그 웃음의 맞은편에 있는 것은 비슷한 얼굴선의 남자. 아버지다.
그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용물을 바닥에 펴 놓았다. 쌀밥과 절인 물고기가 드러나고 아이는 환호한다. 굶주리던 아이가 배를 채우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웃는다.
시야가 멀어진다.
부자가 있던 낡은 초가집이 멀어진다. 그러기를 얼마간, 황금빛 이삭이 늘어진 밀밭이 보이고,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와 양이 노니는 광경이 드러난다.
쉬이익.
더더욱 멀어지는 시야. 그 끝에서 무감정하게 주변을 살피는 한 여자가 검을 거뒀다.
찰칵.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몬스터. 놈을 퍽 걷어차는 또 한 명의 남자. 그 등에는 천무라는 글이 씌어진, 은빛 원이 상감되어 있었다.
몬스터를 처리한 두 사람이 걸어가는 뒤로,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들 배낭이나 자루를 짊어진,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하나는, 조금 전 아이에게 먹거리를 가져다준 아버지였다. 시야에 뚜렷이 들어오는 그 얼굴선은, 헷갈릴 여지조차 없었다.
그리고, 환영은 그렇게 끝났다.
“아…….”
“와…….”
설명이고 해설이고 필요 없었다. 연병장에서 꽃비를 맞고 있는 학관생 모두, 저 모습이 언젠가의 자기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몬스터와 싸우며 흘린 피땀이, 앞으로 저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뼘이라도, 몬스터를 처리한 땅은, 인간의 것이 되고 누군가를 편안케 만든다.
우… 우우우.
와아아아… 와아아아!
고전적인 선동. 어찌 보면 뻔하고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노력의 결실을 눈으로 보는 순간, 학관생들의 가슴은 터져 나갈 듯이 부풀었다.
분명 눈앞에 펼쳐진 환영이 환상일 뿐임은 알지만.
그렇다고 거짓만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류를 위하여. 누구보다 낮게 거하여, 죽음 앞에서 싸우는 이들이여.
자기 자신을 위함 또한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무학관의 무인과 마법사들은 평범하게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고난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부러 희생하지는 않지만, 기왕 죽이는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죽이면, 후방의 민간인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음을 알았다.
-제군들의 헌신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학관생들이 끄덕였다. 뭣도 모르는 무지렁이 양민들은, 이런 자신들의 선택을 모를 것이다. 그냥 부모 잘 만나서 운 좋게 편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운명을 선택한 전사들이었다. 좋은 집에서 부모 잘 만나서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어느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언젠가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싸움을 선택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 잊힌 자부심이 가슴속에서 소록소록 돋아났다.
그렇기에 더는 두렵지 않았다.
검을 쥐거나 마법을 외기 시작하는 순간,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누구나 그랬다. 비록 하늘 위의 하늘, 너무도 뛰어난 천재들 때문에 스스로 깎여 먹힌 자존감이 있었으나, 그 부분을 지금 천무학관의 리그웨더, 현실적인 중원 최강자가 단언하며 인정해 주었다.
너희들은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라고. 너희들 덕분에 중원이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살 만해졌다고.
-감사드립니다. 천무학관의 제군들.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은연중에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두려움. 그것이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증발했다.
학관생들은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 영원히 여러분을 기억하겠다는 말. 그 한마디면 젊은 피는 언제든 죽음을 감내할 수 있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그건 분명 일종의 선동이었다. 혹은 세뇌였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상관없었다. 알지도 못하겠지만, 알아도 코웃음 치며 넘길 것이다.
그만큼 리그웨더의 연설은 그들에게 부족하던 부분을 채워 주는 것이었다. 평생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 단 한 번 인정받았을 때 느끼는 감격 같은 것이었다.
“천-무! 천-무!”
“천-무! 천-무!”
연설 자체가 길지는 않았으되, 지금 이 순간 천무학관의 모두는 최고의 정병으로 재탄생되었다.
싸움의 이유를 깨달은 군인. 앞으로의 목표를 재확인한 청춘. 명예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전사는, 그렇지 못한 이들에 비해 몇 배로 강해진다.
“…대단한데.”
그걸 알 수 있었기에 천마의 탄식은 더욱 깊었다. 그는 마법 몇 번과 말 몇 마디로 학관을 휘어잡고, 그들을 강인하게 만들어 버린 리그웨더, 천무학관의 학과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싱긋.
언뜻 눈이 마주친 그녀가, 천마를 보고 웃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