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20)
솨아아아아…….
비는 좀처럼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무학관은 마법사를 필두로 한 기상 예보 팀을 꾸려 날씨를 예측하게 했고, 앞으로 사흘은 더 내리 쏟아부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어지간하면 비가 그친 후로 미루고 싶었지만, 호우가 계속될 거라는 말. 그리고 날이 갈수록 시끄럽게 떼를 쓰는 마법사들이 귀찮게 굴었다.
결국 공격대에 참가하지 않은 인원들이 전리품 정리에 나섰다. 대부분은 1학년이었고, 당연히 1학년에게만 맡겨 둘 수 없었기에 2학년 3반 역시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거기 조심해! 무겁다!”
쿵. 쿠쿵. 철렁.
마법사의 인도에 따라, 요란하게 내려앉는 병기들. 그리고 몬스터 부산물들.
전후 처리는 중요하다. 전쟁 하면 당장 불꽃이 튀는 전선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후 처리다.
싸움은 항상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다. 똑같은 전황이라 해도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유능한 부대일수록, 직전의 전황 파악에 더욱 애를 쓴다.
어느 정도의 전력이 소모되었고, 어떻게 피해를 보고 이득을 보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른… 마흔… 쉰… 어후, 끝이 없네…….”
백무룡이 서류를 들고 숫자를 헤아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레이드 공격대. 어둠나무와 고룡 쉐이크 토벌전.
마법과 아이템으로 많이 경량화되었다지만, 수백 명이 움직이는 동안 사용한 보급품이다. 양은 둘째 치고 가짓수도 어마어마했다.
페미컨 같은 식료나 외상약인 포션은 말할 것도 없고, 부서지거나 수리가 필요한 각종 무구와, 천막 및 취사 도구 등을 보면 안색이 팍 질릴 정도였다.
잘 믿기지가 않았다. 본인은 가서 딱히 뭘 한 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자가 소모되고 사용되었다니.
“그거 거기 아냐! 거기 아니라고! 다시 옮겨!”
“아, 젠장.”
가장 끔찍한 소리에 백무룡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창고 하나에 겨우 수납을 마쳤는데, 빼서 다시 정리 하자니 눈앞이 아득할 지경.
“아, 뭐야? 좀 좋게 좋게 넘어가… 소진?”
“…어. 배, 백무룡?”
인상쓰며 돌아보다 눈이 딱 마주쳤다.
파리한 얼굴에 체구가 작은 소진. 평소에 이리저리 부려먹던 백무룡의 똘마니 녀석.
“어… 음, 적재가 잘못됐어? 새로 빼야 하나?”
“아, 아니.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
보자마자 자동으로 알아서 기려고 움츠렸지만, 뜻밖에도 백무룡은 소진에게 협조적이었다.
“아냐, 할 때 제대로 해야지. 야! 1학년! 이거 다시 꺼내서 밖으로 내놔!”
“…어?”
매번 틱틱거리고 괴롭히던 녀석의 태도가 다르자,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턱턱. 스윽.
백무룡은 가볍게 어깨를 털어내고 고개를 까닥했다.
“뭐, 이번에 보고 배운 게 꽤 많았어. 보급계… 장난 아니더라.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어… 고마워.”
“뭘. 어차피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백무룡이 코를 쓰윽 문지르며 얼굴을 돌렸다. 어차피 부려먹을 1학년들이 있으니, 훨씬 예전보다 관대해진 그였다.
‘잘해 주자. 정말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기껏 의지를 다져 봐야 그 마음이 사흘을 넘기기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는 말도 있다.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법이지만, 또 바뀌게 되면 크게 변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비록 백무룡은 군자는 아니었지만, 대신 밑바닥에서 구르며 크게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3학년의 피 마르는 갈굼 속에서, 눈물 좍좍 뽑으며 물자 정리 한 기억은, 백무룡조차도 마음을 달리 먹게 했다. 무엇보다 레이드 공격대가 복귀한 지, 오늘이 이틀째였다.
“셋… 여섯… 일곱. 됐네. 그래도 정리 자체는 잘됐다. 3-4 창고 비우고 거기에 밀어 넣기만 하면 되겠어.”
“오. 다행.”
“근데 이건 좀 개수가 안 맞네. 어디 빠졌나?”
“워! 큰일 날 뻔!”
상인답게 소진이 물품 정리를 척척 해 나가자 백무룡은 반색했다.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가, 평소에 매가리 없이 굼뜨던 녀석이, 지금은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뻐 보였다.
자신이 열 번 스무 번 눈알이 빠져라 확인한 재고 정리를, 곁눈으로 스윽 훑으면서 바로바로 점검하고 이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빠르기도 빠르고, 철두철미하다.
“와. 너 진짜 잘한다. 순식간인데!”
“아니, 뭘. 이 정도로…….”
“아냐, 아냐. 내가 이제껏 보물을 못 알아봤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소진. 뭐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어… 그. 그래……. 고마워…….”
소진은 어색해했지만, 백무룡은 나름 크게 개안을 했다.
‘진짜 잘해 줘야겠다. 이 자식, 도움이 돼.’
예전에는 상인이라서 무시하고 괴롭히기만 했었다. 자격도 없는 비천한 것들이, 같은 천무학관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냥 ‘치워’ 버리고 싶었는데, 막상 녀석이 정말 없어지고 나니.
‘이 녀석이 없으면 내가 고생한다!’
개처럼 굴렀다. 물자 정비니 현황 파악이니 하는 것은 자신과 전혀 맞지 않았다. 멀리서 남 일로 볼 때는 쉬워 보였지만, 막상 백무룡 자신이 해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다더니, 그제야 소진이 귀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자신을 갈구던 3학년 보급계 선배들. 그들보다 더 빠른 업무 처리 능력을 보니,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소진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어… 음……. 대충 2각이면 끝나겠네. 보고서는 내가 마무리할게. 그래도… 돼?”
“오오! 당연히 되지! 고마워!”
더군다나 알아서 기지 않는가!
백무룡은 두 번, 세 번 고맙다고 인사하며 소진과 악수를 나눴다. 아직 상대는 어색한 얼굴이었지만, 그건 녀석의 사정. 백무룡은 하하 웃으며 예전 감정을 털어 버렸다.
이 녀석을 중용한 서문영과 운소령, 같은 반의 투 탑은 이번 레이드에서 엘리트 파티로 활약했다.
왜 자신이 아닌 이런 약해 빠진 녀석을 파티원으로 받아들였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진짜 도움 된다.’
숫자와 물자의 처리. 그리고 공간 감각에 한해서는, 녀석은 천재적이었다. 물어보면 막히는 것이 없었고, 백무룡으로서는 생각도 안 해 본 것들을 다 꿰고 있었다.
“2종은 3-2 창고로 보내야겠어. 일단 야적해 둔 게…….”
“4-1이 더 편하지 않아? 그쪽이 통로가 더 넓은데?”
“지금 당장은 너무 붐빌 거야. 다른 야적해 둔 물자들이 4종으로 가야 하니까. 차라리 3종으로 보내는 게 낫지.”
“와!”
이런 것이 바로 상인.
백무룡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그는 소인배였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대충이나마 파악하는 일에는 뛰어났다.
그 자신은 무공도, 지략도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연줄이라고 만든 클럽의 3학년 선배들이 있었지만, 그건 얼마 전에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무룡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 녀석 옆에 붙는다!’
그 자신이 유능하지 않으면, 유능한 녀석 옆에 붙어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꿀을 빨 수 있다.
다행히도 아직 같은 반의 다른 학우들은 소진의 유능함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백무룡처럼 자신의 무능함으로 바닥을 기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진 선배님, 소진 선배님! 당무련 선배님께서 부르십니다!”
헐레벌떡. 1학년 하나가 창고 정리를 하는 소진을 찾아와 크게 소리쳤다. 어, 하고 소진이 백무룡의 눈치를 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당 소저가… 무슨 일이지?”
“어, 얼른 가 봐라. 걔 성질 급해서 기다리게 하면 난리 칠 거야.”
백무룡은 바로 손사래를 쳤다. 기왕 사이좋게 지내기로 한 이상, 재깍재깍 편의를 봐주는 것이 이로웠다.
그는 소인배답게 뒷배의 존재에 예민했고, 매번 여기저기 치이고 다니던 소진 뒤에 당무련이 섰다는 것은 진작에 눈치를 챘다.
“고, 고마워. 어… 혹시 정리 노트 필요해? 하인들 시켜서 필사해 놓은 게 좀 있는데…….”
“그래 주면 고맙고!”
일이 잘되려는지, 소진도 그에게 우호적으로 굴었다. 수업 내용 정리 하나는 운소령과 버금간다는 소진. 녀석의 정리 노트는 성적에 크게 도움 될 터였다.
“후우우…….”
“하아아…….”
“빠릿빠릿 움직여라! 1학년! 손 보이지? 보급계 없으니까 살판났냐!”
소진이 사라지기 무섭게 후배들의 손이 더뎌졌다. 하지만 백무룡도 그 정도는 다잡을 수 있었다.
그는 사나운 인상과 큰 고함으로, 1학년들을 부려먹었고, 소진의 예상처럼 딱 2각 안에 일이 끝났다. 백무룡은 뭔가 자신이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사람은 매사에 다 쓰임새가 있다더니. 옛말에 틀린 게 없군. 그나저나…….’
쓰윽. 에취!
코끝을 쓸자,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나왔다. 쿨쩍 코를 들이마시며 그는 소진이 항상 붙어 다니던, 다른 기부금 입학생을 떠올렸다.
‘이한, 그 녀석이 정말 마교 교주야? 어우…….’
어느새 소문이 다 퍼진 바다. 백무룡은 최근 들어 엄청나게 위세가 변한 이한, 녀석의 훼까닥 돌아간 눈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 * *
솨아아아… 쿠릉쿠릉.
비는 저녁까지 계속 내렸다. 공기 중에는 습기가 가득해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의복도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천마가 있는 실내는, 딱 적당한 정도의 습기가 유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자리한 곳은 봉황각.
천무학관의 손님맞이 건물 중에서 최상급의 귀빈을 묵게 하는 곳이었으니까.
부우웅. 부우웅.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마법 부여와 아이템으로 떡칠이 된 전각이다. 벽에서 빛을 발하며 습기 조절을 하는 마법진은 보석이 자글자글 박혀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입이 떡 벌어져서 황송해할 자리. 하지만 천마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각. 사가각.
마법은 없었지만 살아생전, 온갖 부귀와 사치를 누려 보았던 것이 그다. 천마가 자기 자신을 드러낸 이상, 어차피 이건 당연히 받을 만한 대우였다.
탈마의 고수로서건. 천마신교의 계승자로서건.
사악. 사악. 사악.
그런 사소한 것보다, 천마에게는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붓으로 종이 위를 휘갈기고, 떠오르는 대로 글귀나 선을 그렸다.
사박.
“흐음…….”
또 한 장의 종이를 허공으로 내던지고, 천마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학과장 리그웨더의 방문도 미루고, 40여 시간을 계속해서 몰두했지만,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서였다.
“쉽지… 않네. 게이트라는 놈.”
사악.
그는 봉황각의 바닥을 뒤덮은, 수많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고개 저었다. 이제껏 집중하며 떠오른 것을 계속 모사했지만, 아무리 해도 해도 원형을 정확히 그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차원 간 게이트라…….”
검은 문. 혹은 원.
수천 번 가까이 그리면서, 천마는 계속 부족함을 느꼈다.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 마왕 바알의 육신 안에서 마주쳤던 그 ‘현상’.
레이드 공격대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다. 고룡 쉐이크는 처리했고, 어둠나무들도 싸그리 말라죽었다. 거의 천마 혼자 이룬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제운비를 비롯한 공격대의 교두 교관들이 크게 치하하며 감사를 표했고, 뭐든 원하는 바를 말해 달라고 했을 때. 천마는 딱 한 가지 특별 대우를 요구했다.
-취침이 가능한 커다란 마차와, 복귀할 때까지 ‘아무 말도 걸지 말 것’.
공격대로서는 대단히 난처한 요구였다. 토벌하긴 했지만, 그들은 고룡 쉐이크가 어느 정도의 전력이었는지, 그리고 마왕 바알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천마는 그깟 것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저들의 일이고 그에겐 훨씬 중요한 깨달음이 더 문제였으니까.
‘일단 물리적인 형체는 원형. 정확히는 구형이지만.’
차원간 게이트. 그 기괴한 현상.
꿈속에서 시간을 수없이 되돌리며, 천마는 그 진체를 파악하려 했다. 하나 당혹스럽게도, 매번 기억을 다시 읽을때마다, 그 현상의 진체는 달리 보였다.
어느 때는 타오르듯 뜨거웠고, 어느 때는 한없이 가벼웠다. 자신의 손을 막아 서던 그 현상은,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다.
‘과연 신마경……. 쉽게 실마리를 얻을 수가 없다.’
히죽.
천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혔음에도, 그간 며칠 동안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이 더욱 타올랐다.
‘거울.’
그 요체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그것만으로도 천마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가짜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닌, 진짜 깊은 깨달음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높은 산은 오르는 데 그만큼 많은 수고가 드는 법.
‘혹은 우물.’
꾸욱.
천마는 눈을 감고 손을 거머쥐며, ‘그’ 감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매번 형태가 변하고 계속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이해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직. 지지지직.
하나 아무리 불가해한 현상이라도, 계속되는 탐구에는 결국 버티지 못할 터. 천마는 씰룩씰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의 느낌도 있고…….’
하나는 확실했다. 게이트는 자연현상이다. 인간이 파악하기도, 파훼하기도 힘든 대자연의 변이.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도달점을 맞기 전에는 결코 그치지 않았다. 벼락만 해도 뇌전을 수없이 보고 생각하고 상상한 끝에, 인간은 그 닮은 힘을 손에 넣었다.
‘바람의 성격도 있다.’
따라서 불가해한 현상이란, 아직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강력한 힘이라는 것.
지직. 지지직.
‘문이라. 너는 어떤 것을 내게 열어 줄 테냐.’
천마의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는 지루함도 피로도 모르고 그 상태로 하루를 더 지냈다.
“천마신교 교주 구옥경 님, 학과장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바쁘다니까. 더 기다리라고 해.”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다시 리그웨더가 청을 넣을 때 까지.
“그것이… 어쩌면 교주님께 도움이 될 단서를 드릴 수 있다고…….”
“알겠다.”
거만하게 굴던 천마는 냉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