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80화 (281/310)

280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21)

덜커덕. 쿵. 철컥!

문을 열어젖힌 천마가 대뜸 물었다.

“불렀다며?”

“…….”

덕분에 이중구는 당황했다.

전갈을 보낸 지 반각이나 되었나? 본인에게도 도움이 될 단서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올 거라고 리그웨더가 말 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막무가내로 들이닥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것이다.

“이, 일단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학과장님께서는 아직…….”

“허, 사람을 불러 놓고 기다리게 하다니. 뭐 하는 거야? 예절이 엉망이군.”

천마가 푹, 내던지듯 몸을 소파에 묻었다.

“…….”

덕분에 이중구의 얼굴이 괴이해졌다.

이제껏 며칠간 불러도 들은 둥 마는 둥 신경도 안 쓰던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란다.

“그… 학과장께서는, 아니. 학과장은 의관을 정제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

“아, 어서~”

천마는 들은 척도 않았다. 가히 안하무인. 이런 사람이 예절이 어쩌고 하니 화가 나기에 앞서 기가 막혔다.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일 수도 있다고 했지.’

댕그랑. 댕그랑. 똑똑.

이중구는 천마가 보란 듯이, 종을 눌러 울리고 학과장실의 벽까지 일부러 두드렸다.

‘극빈대우. 최소 작은 나라의 왕.’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드리지 마라. 할 수 있는 최대의 대우를 해라.

그게 교관 총회의에서 결론 내려진, 천마 구옥경에 대한 접대 방침이었다.

학과장 리그웨더는,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다들 경악하고 거부감을 표했지만,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그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단순 전투력만 놓고 보면, 저보다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또 안 믿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레이드 공격대의 사후 종합 보고를 받은 후, 천무학관의 수뇌부는 발칵 뒤집혔다.

고룡 쉐이크와 마왕 바알.

그들을 처단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문제는 그게 천무학관의 힘이 아니라, 이제껏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초극고수의 활약과 등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마 구옥경. 추정 무위는 탈마-현경급.

‘몬스터의 전투력으로 상정할 때, 최소 위험 20등급 이상으로 추정.’

제운비와 뇌천벽이 목격했다는, 마왕 바알의 화신체가 그 정도 등급인데, 그걸 쓰러뜨렸으니 그게 최소다.

참고로 위험 등급 19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천무학관에서 공히 ‘접근 엄금’이라고 정해 두었다. 그보다 높은 20등급은, 그냥 불가해의 재앙이다.

애초에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 그냥 계측 불가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인 20등급. 그런 자가 지금 학과장실에 들어와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그걸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무력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고귀한 신분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사료를 토대로 볼 때, 천마신교가 성세를 떨쳤을 때는, 명나라 황제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허.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다. 몽골 오랑캐와 싸워서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한족의 나라가 바로 명. 그런데 그 명(明)이라는 이름은, 원래 명교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대명제국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은, 명교-백련교도 출신이기도 했다. 이후에 개국공신이던 한림아 등등을 토사구팽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개국 당시의 이름은 명.

그건 당시의 그들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와 자부심을 지닌 곳이 마교다.

그들 사이에서는 대명제국의 황제보다 더 귀한 신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몰랐다.

-소림의 달마 조사나, 무당의 장삼봉 조사가 갑자기 현계하시면, 불가와 도가의 분들은 어찌 대하실까요?

-……!

리그웨더의 말에 교관들은 납득했다.

달마? 장삼봉? 전설로만 내려오는 그들이 세상에 내려온다면… 다들 머리를 조아리고 오체투지 할 터.

거부감과 반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인물로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세간에서 마교를 뭐라고 부르든, 일단 천마 구옥경은 그곳의 교주다.

십만 대산에서만큼은, 교인들에게 신처럼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만하고,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딜가든 권력자. 작은 나라의 국왕만 되어도, 군주는 무치. 부끄러움이 없다 했다. 그가 곧 법이고, 천마는 그만한 힘을 가졌다.

‘애초에 학관생으로 위장 잠입해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게 대단하지.’

천마 구옥경이, 2학년생 이한의 모습으로 학관에 들어온 것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천무학관의 교관 교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최고 등급 극빈을 맞아 대우할 때, 그 성미를 추측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밝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가 스스로를 드러낸 이상, 이한-구옥경이 예전에 보였던 이상 행동, 그리고 갑작스러운 학관생들 간의 충돌을 묻고, 하나하나 재확인과 분석을 거쳤다.

그렇게 놓고 보니, 당시에는 무례하고 안하무인의 사고뭉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한-구옥경의 원래 신분이 천마신교의 교주였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지극히 온건하고 온순한 인물이었다……!

때앵. 땡.

“아.”

종이 울렸다. 이중구는 몸을 돌려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천마에게 고했다.

“학과장이 의관을 다 갖춘 모양입니다. 들어가시지요.”

극한의 존대. 리그웨더를 오히려 낮춘다. 그게 무슨 의도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에서 일어난 천마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어, 그래. 수고.”

“…….”

이중구의 얼굴이 굳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다행이지, 그는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쭉 내려가는 기분을 맛봤다. 분명히 눈앞에서, 사람이 일어나서 자신 앞을 지나가는데.

‘…감지조차 하지 못했다.’

감각은 잠든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헛것으로 착각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극에 달한 자연스러움.

현경의 고수. 유장위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달칵. 스으윽.

제 방 들어가듯 거침없이 입실하는 천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중구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부디 나쁜 의도가 아니기를…….’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천마가 굳이 자신을 숨기고 들어온 이유.

총회의에서 교관들은 그것으로 머리를 쥐어짰었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물어보자니 걱정이고, 상대의 강함이 너무 대단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걸 몸으로 느낀 이중구는 새삼 깨달았다.

-그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단순 전투력만 놓고 보면, 저보다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리그웨더의 말은, 겸손이나 주의를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사실이었던 것이다.

* * *

“학과장 리그웨더입니다. 이제껏 귀인을 알아보지 못했던, 저희 천무학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스르륵.

들어서기 무섭게 비단 궁장을 차려입은, 금발 벽안의 여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국의 군주를 대하는 듯한 극공경의 예법.

“어?”

무신경하게 끄덕하던 천마는 잠시 멈칫했다. 리그웨더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옆에서 함께 예를 표한 노파. 여기서 만날 거라고 생각 못한 얼굴 때문이었다.

“할망구……?”

“제갈유진이라 합니다. 천마신교의 교주시여.”

대격변의 날을 겪고 오늘까지 남은, 살아 있는 화석.

당시 무림맹의 군사였던 제갈세가의 사람.

그 머리는 새하얗게 세어 있었고,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한데 그나마 몸을 일으킨 리그웨더와 달리, 그녀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였다.

“지난번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세계의 구원자시여. 당신께서 리치왕을 저지해 주셨기에, 실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원받았지요. 이제라도 뒤늦게 감사드립니다.”

“어……?”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140년 전에 리치왕과 맞붙은 것은,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당시의 대격전은 목격자를 남기지 못할 만큼 끔찍한 파괴를 일으켰기에.

그래서 몸종처럼 곁에 두었던 흑객? 외에는 아무도 진상을 알지 못할 텐데… 하고 의아해하다가,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약한 늙은이로군. 낚였어.”

숨기려면 바로 부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걸 어떻게? 하는 얼굴을 한 것만으로, 자신이 당사자임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말하지도 않았는데 간파당했으니 한 대 먹은 기분이었다.

“거듭된 무례,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집어쳐. 징글징글하니까. 하여간에 정파 놈들… 겉치레와 아부에는 아주 도가 텄다니까.”

천마는 차갑게 냉소하며 풀썩! 맞은편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멈칫!

그러다가 학과장실에 크게 널려진, 색 바랜 병풍을 보고 몸을 굳혔다.

“이게 뭐야?”

활짝 펼쳐진 병풍에는 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온 얼굴에 점이 가득한, 제관을 쓴 남자가 손짓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수많은 대신들, 만조백관이 따르는 모습이다.

그것이 가운데.

그리고 옆으로, 비통한 얼굴을 하곤 목이 잘리거나 솥에 넣어져 삶아지는 사람들. 처형당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과 아이와 노인들의 얼굴.

내용으로 보아 서화의 진행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었다. 천마는 그게 뜻하는 의미에 더 혼란에 빠졌다.

“…어제오늘 그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림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요즘의 서화나 그림은 다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중원에 학관 연합이 들어선 이후, 당연히 그런 기법으로 변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이 색 바랜 그림은 옛날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다.

즉, 이 그림은 최소 140년에서 어쩌면 2백년 이상 묵은, 골동품 중의 골동품.

또한 문제는 그 그림의 내용이었다.

“…진품이야?”

“예.”

“어떻게? 주씨 왕가가 이런 걸…….”

그림은 명 태조 주원장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사료에 기록된바로 주원장의 얼굴은 그다지 보기 좋은 상이 아니라고 했다. 아니, 대단히 추한 얼굴이라 했다. 있는 대로 정직하게 그린 화공이,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라를 개국한 태조이다 보니, 후대에는 주원장의 초상을 조금씩 미화시켰다. 인자하고 덕이 넘치는 얼굴로.

그게 지나쳐서 실물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

지금 천마가 보고 있는 그림은, 주원장을 간교하고 교활한 인물로 보이게 그리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한 점과 곰보 자국. 또한 가늘게 찢어진 눈. 척 보기에도 소인배에 악당처럼 보인다.

거기에 좌측으로, 죽는 이들의 얼굴에 드러난 생생할 정도의 비통함과 억울함. 이 정도면 그린 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원장이, 무고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였다고.

“아무리 손바닥으로 가린다 하여, 푸른 하늘을 덮을 수는 없는 법. 비록 일신의 안전 때문에 드러내지는 못했으되, 신교가 당한 부당함을 아는 이는 알고 전했습니다.”

제갈유진의 청산유수 같은 말이 이어졌다.

천마는 홀린 듯이, 계속해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이윽고 작게 물음을 내뱉었다.

“…누구냐.”

“화공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낙관은 없지만 아마도 화산, 혹은 공동의 무인이 아닐까 합니다.”

뜬금없는 천마의 말에, 제갈유진이 즉답했다.

“서화는 2대에서 7대까지, 어느 무림맹주의 소장품입니다. 시일이 오래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2백년은 넘었을 테니.”

천마가 끄덕였다.

이해했다. 동시에 화가 났다. 감정을 다스리려 잘게 헛기침을 한 후, 그는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지독하구나. 참으로.”

“…….”

“너희는… 정말 쓰레기다. 정도무림맹. 구제불능의 더러운 겁쟁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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