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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81화 (282/310)

281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22)

“…….”

제갈유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방금 천마가 내뱉은 말은, 폭언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천마는 그녀가 어쩌든 말든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몸을 일으켜, 병풍의 서화를 가까이에서 살펴 보았다.

“…….”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툭, 스윽.

시선이, 그리고 손길이, 천천히 왼쪽으로 향했다.

고문 끝에 죽어가는 수많은 민초들의 모습.

그걸 보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비단 옷 입은 무인들과 문인들의 모습.

마지막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점박이. 주원장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 누군가가 검을 들고 서 있다.

“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서화는 존재 자체가 역모였다.

겁을 집어먹은 주원장. 그리고 그 앞에 검을 내밀고 있는 무인.

감히 대명제국의 국조(國祖)를 겁박, 내지는 살해하고 싶어 하는 의도가 명백한 그림이다. 얼굴을 그려 넣을 리가 없을 터.

다만, 검을 든 무인의 옷차림은 도복이었다. 도사라는 이야기다. 왼손에 도인들 특유의 불진까지(먼지떨이) 들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툭.

그림이 끝나는 곳에서, 천마는 가볍게 손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조용히 읊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글귀가 한 줄 있었다.

하늘의 눈은 어설픈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만했다.

주원장의 죄는 반드시 값을 치를 것이다! 결코 좌시하지 않으리라!

그림을 그린 이는 그걸 낙관처럼 썼다.

천마는 서화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선이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었다. 조금 어설펐다. 대신 거기 담긴 기세가 강렬했다.

붓질 한 번 한 번이 마치 칼을 휘두르는 듯 예리하고 사나워, 보통 사람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압도될 정도의 기백.

“…확실히 화공이 그릴 만한 그림이 아니군.”

화공이 누가 시켜서 그린 그림이라면, 이보다 훨씬 잘 그렸으리라.

하지만 한갓 유약한 화공이, 이런 대담한 기백을 그림에 담아 낼 수 있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린 이는 분명히 무인. 나름 서화에 솜씨가 있는 무인일 터.

스윽. 슥.

천마는 그림과 글귀를 손가락으로 따라 덧그리다, 그 안에 담긴 격렬한 분노의 기색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실소했다.

“하하.”

천마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마신교의 교주라면, 혹은 교인이라면.

누구든 이 그림 앞에서 격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그는 웃겨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가 싸악!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고 표정을 바꾸었다.

“화산이군.”

“화산……?”

“공동이 아니다. 비슷한 복색이지만… 특유의 고고함, 아니, 잘난 척이 넘쳐흐르고 있어. 이러면 화산이지.”

화산파는 구대 문파중에서도 특별하다. 도가문파의 최강이 무당이라면, 최고(最古)는 화산이었다.

원말명초에 처음 싹을 드러낸 무당과 달리, 화산의 뿌리는 송대에서부터 내려온다.

유서 깊고 오랜 것이 문파의 자랑이다 보니, 그들은 도가이면서도 유학자처럼 굴었다. ‘군자의 소양’을 갖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장로, 어쩌면 장문인쯤 되겠어. 하긴… 딱 걔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이긴 하지?”

그리고 군자의 소양중 하나는 협의지심.

화산파의 절기는 매화이십사검. 그리고 매화는 매난국죽,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겨진다.

매화를 숭상하는 화산파가, 마침 매화를 절개에 비견한 군자의 도에 심취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검만 익힌 무인이 아니라, 군자를 길러내려 했다.

도리와 명분을 알고,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세상을 질타할 줄 아는 노신선. 시금서화에 모두 빼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

그런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역겹다.”

그랬기에 더더욱, 천마는 차갑게 분노했다. 그는 아마 이 서화를 준비했을, 제갈세가의 노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역겨워.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군. 제갈세가의 대가리야. 네가 짜낸 책략은 이게 다냐?”

“…….”

제갈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마의 격한 반응은, 그녀로서는 예상외였던 것이다.

‘화를 낸다… 어째서?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그녀가 준비한 서화는 일종의 사과였다.

천마신교의 과거사.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비극을, 무림맹에서도 알고 통탄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마교로 몰린 신교. 그들에게 명태조 주원장은 불공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다. 원나라를 밀어내기 위해 수많은 도움을 받고서도, 보답은커녕 사악한 사교도로 몰았으니까.

그래서 그를 증오하는 자가 정도무림맹에도 있었다… 라고, 그간의 서러움을 달래 줄 생각이었는데.

“세간에 본 교의 뜬소문이 꽤나 많은데, 그중에 사실도 있기는 하지. 강자존. 본 교의 첫 번째 율법이다.”

오히려 시퍼렇게 타는 불처럼 분노하는 천마.

그 눈길에 제갈유진은 머리를 조아렸다.

“천신의 자애를 믿던 종교가, 갑자기 무자비한 철혈을 외치게 된 이유를 아나?”

“…고난에서 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갈유진이 조심스레 답했다.

대격변이 오기 전까지. 무림맹의 주적은 마교였다. 무림맹의 군사가 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어지간한 마교인보다 마교의 역사를 더 잘 아는 그녀였다.

“신교가 겪은 핍박의 역사는 길고도 혹독했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명령한다.

강자존.

약육강식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논리다. 하나 생존을 위해서는 사람이기보다 짐승이어야 했다.

덕분에 무림맹이 마교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어찌 힘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느냐고. 스스로 도리를 버리고 짐승처럼 사는 것들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마교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척박한 땅에서 도리를 따지는 성군은, 모두를 돌보다 다 같이 죽이고 만다.

차라리 포악하더라도 힘을 가진 자가 이끄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그의 무리는 살아남으니까.

극한에 몰린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엄중하고 단순한 잣대가 필요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일이었다. 또한 효율적이었다.

따르지 않는 자는 교를 나가라. 아니면 죽을 뿐이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던 마교인들은, 성품이 거칠어졌다. 내가 살기 위해 이웃의 것을 빼앗기도 했다. 그때 내려진 강자존이라는 새 율법은, 천박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강해야 사람들을 바로 이끌 수 있다.

강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선한 이는 신념을 위해서.

악한 이는 욕망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건, 뜻을 펼치기 위해서건, 일단은 이웃의 머리 위에 올라서야 했다.

마교는 살벌한 경쟁 사회가 되었다. 조금만 나태해지면 바로 물어뜯기고 잡아먹혔다.

여가는 사라지고, 수련과 단련으로 대체되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는 건 사치였다. 사악한 술수도, 위험한 약물도, 끔찍한 실험도 모두 허용되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 피 마르는 시간이 이어졌다. 마음이 피폐해진 이들은, 자극적인 쾌락에 이끌렸다.

음행이나 유혈낭자한 폭력으로 노고를 달랬다. 시작이야 어쨌건, 그들은 악랄한 마교도로 변질되었다. 무림맹이 날조해서 퍼뜨린 유언비어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하나 그렇게 발악하여.

마교는 살아남았다.

자그마치 3대를 같은 교인들과 싸우며 역량을 익힌 이들은, 전국시대를 겪은 왜인들보다 더 흉험했다. 돌아온 그들은 중원의 어느 무력 단체보다 강해져 있었다.

사교 집단을 토벌하겠다고 달려든 명군은, 산산조각으로 찢겨 나갔다. 구파일방은 경악했고, 오대세가는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마교의 이름에 또 한 번 공포가 덧씨워지는 날이었다…….

“제법 잘 알고 있군.”

제갈유진의 조곤조곤한 말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옛 무림맹의 군사. 지식량 하나는 보통이 아니다. 본 교의 어지간한 노인들보다 더 잘 아는 듯해.”

“과찬이십니다. 실로, 이토록 슬픈 역사가 있었던 것에 저희는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

“아. 그렇다고 착각하지 말고.”

제갈 유진의 외교적인 언사를, 천마는 단숨에 끊었다.

“너희의 기만적인 동정은 달갑지 않다. 애초에 슬픈 일도 아니야. 본 교의 초대 천마께서 바로 보셨다. 힘이 모든 것이고, 평화를 얻는 길은 피를 뿌리는 것이지.”

“…….”

패도적이고, 고압적인 언사였다.

흡사 피와 힘에 미친 폭군의 것처럼 보여, 제갈유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교의 지존이시여. 감히 아뢰건대, 힘만으로 얻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의 학관 연합이 이룬 성세를 보소서.”

“그 학관 연합이, 지금 내 앞에서 무얼 하고 있지?”

천마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과, 고개 숙인 제갈유진을 가리켰다.

“한때 사악한 마교도의 수장 앞에, 옛날에 숨겼던 그림까지 가져와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냐? 결국 우리의 힘. 너희가 갖지 못한 힘이 있기에 이러는 게 아니냐?”

“아닙니다. 저희는 옛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내 말이 그 말이다. 정도무림맹의 화석아. 지금은 잘도 아는 그 잘못을, 예전에는 왜 바로잡지 않았지? 보아라. 네가 가져온 이 그림을.”

“……?”

스윽. 툭.

천마는 서화의 낙관을 두드리고, 다시금 마지막 그림.

“낙관은 있으나 얼굴도 이름도 없다.”

주원장 앞에 검을 들고 멋들어지게 선 도인의 그림을 가리켰다.

“딴에는 불의를 보고 분노한다면서, 스스로를 밝히지도 못하는 용렬한 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제 후손들은 기개가 있다 칭찬하는구나.”

“그건…….”

“너희가 정말 몰랐을까? 아무도 몰랐을 것 같으냐?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이 그림을 보관하고 있긴 했으되, 그린 이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무림맹주가 그렇게 멍청한 이들이 오를 수 있는 자리더냐?”

천마의 얼굴은 지엄했다. 지금 그는 그저 신마경을 노리는 무인이 아닌, 천마신교의 지존으로 묻고 있었다.

“이 그림을 두고 열 번, 스무 번 이상 지나간 것이 맹주직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아무도 몰랐다고? 본 교가 무고함을 알리는 이 그림을 보고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고?”

“…….”

“숨긴 것 아니더냐. 주씨 왕가와 충돌할 수 없었으니까. 두려우니까! 너희가 가진 이권과 명예를 내려놓을 수 없으니까! 그래 놓고! 이제와서 옛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한다?”

“……!”

“대체 이게 말이냐, 개방구냐? 이 그림이 무림맹의 비보라고? 너희가 정도라고? 개소리! 어디, 하나하나 짚어 보도록 하자!”

스윽.

천마가 처절하게 웃으며.

어느 화산의 고수가 그렸을, 무림맹의 비보를 가리켰다. 마교의 고난을, 이미 알고 지나갔을 맹주들을.

“눈앞에 가련한 사람들이 핍박받는데 외면하였으니, 이는 인(仁)을 스스로 저버린 불인(不仁)이며.”

판결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조정의 그릇된 행태를 알고도 막거나 제지하지 못하며, 오히려 동참하였으니 이는 의(義)를 저버린 불의(不義)이라.”

“…….”

“응당 고맙게 여겨야 할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잊어버리거나 당연히 여겼으니, 스스로 갖추어야 할 예(禮)를 버린 것이고.”

손가락이 둘, 셋, 접혔다. 그와 함께 제갈유진의 얼굴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대의(大意)에 응해야 할 때, 불이익과 보복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렸으니. 스스로 용맹을 꺾은 것이며.”

네 번째 손가락.

“문파의 이름만 중히 여기고, 사필귀정의 천리를 잊었으니 이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우둔함(無智)이며.”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손가락까지.

“바르고 곧게 살겠다며 조상과 천지신명 앞에 한 맹세를, 스스로의 믿음(信)을 저버렸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군자의 다섯 도리를 짚은 맹자의 말이었다. 이제 주먹을 꾹 쥔 천마는 제갈유진에게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

당연히, 있을 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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