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신화경, 혹은 신마경 (24)
한바탕 불길이 휘몰아친 듯, 뜨거운 공기가 학과장실을 감돌았다. 천마의 물음을 받은 리그웨더는, 흔들림도 없는 침착함으로 답변했다.
“잠시 차를 한잔 드심이 어떠하신지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달칵. 자르르륵.
천마가 뭐라 하기도 전에 리그웨더가 손을 들어 차를 따랐다.
고아하고 청아한 향기가 감돌고, 노르스름한 찻물이 담긴 다기가 스르륵, 저 혼자 미끄러지듯이 천마의 앞으로 나아갔다. 간단한 마법이다.
“제갈호법?”
그리고 리그웨더는 제갈유진을 불렀다.
“…네.”
다시금 절을 하고 제갈유진이 피폐해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천마는 혀를 찼다.
“쳇,”
악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통렬하게 비판하긴 했지만… 정도무림맹의 옛 잘못을 제갈유진에게만 따져 물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맹주도 아니고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 전대의 잘못이지 그녀 본인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감정의 분출일 뿐.
천마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머리에 열이 올라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득을 볼 것도 없는데 한 교단의 지존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탁. 주욱.
쓸데없는 현자감. 착잡하고 복잡한 기분을 뜨거운 찻물이 입안을 씻어 내며 가라앉힌다. 천마는 잔뜩 가시가 돋혀 있었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툭, 내뱉었다.
“추태를 보였군.”
“별말씀을. 귀 교와 정도무림맹의 관계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작게라도 매듭짓지 않으면 언제고 반드시 터질 불씨이니, 오히려 넓은 아량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
리그웨더의 매끄러운 말에, 천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 뭔…….’
넓은 아량에 감사. 그리고 매듭.
너희 사정은 알았으니 그쯤 해 두라는 말이다. 발칙하긴 하나 사실 냉정하게 보면 천마가 크게 실례하긴 했다.
아무리 자신이 천마신교의 지존이라 하나, 상대인 리그웨더 역시 학관연합의 총수.
신분상으로는 그에게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성질 다 부리며 격한 감정을 터뜨렸으니 모양이 좋지 않다. 물론 천마가 여기서 아랑곳 않고 더 막 나갈 수도 있으나…….
그건 그냥 졸렬한 모습이 될 뿐이었다.
“쯧.”
주욱. 탁.
천마는 아직 뜨거운 차를 단번에 마셔 비워 버렸다.
입안과 목이 자글자글 익어 가는 격통이 느껴졌으나, 오히려 덕분에 이런저런 잡념이 확 날아갔다.
다음으로 소록소록 찾아드는 것은 후련한 냉정.
‘과했다.’
실시간으로 천마는 이성을 되찾았다. 1분 전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시 1분이 지난 후, 그조차도 지나쳤음을 알 수 있었다.
‘젠장. 이놈의 성질머리.’
분노는 대표적인 마(魔)다.
극마도 아닌 탈마의 고수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초연함. 역설적으로 불문이나 도문보다 항상 평정심을 요구하는 것이 마공을 수련하는 자다.
강한 만큼, 격렬한 감정에 잡아먹히는 순간 바로 광마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태를 보였군.”
그렇기에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천마.
같은 말임에도 거기에 실린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핍박의 과거에 사로잡힌 마교인이 아니라, 천마신교를 이끌어 갈 지존으로서의 자세를 되찾은 것이다.
또한 그것이 리그웨더의 배려임도 알 수 있었다.
“더 실례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맙고.”
마음이 흐트러진 자에게는 백 마디 진언이 무가치하다. 상대가 바른 말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무가치한 고집을 부리며 스스로 악수를 둘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그웨더는 딱히 잘난 척 바른 말 한 번 하는 일 없이, 뜨거운 차 한잔으로서 천마가 냉정을 찾게 도와주었다. 이는 드러나지 않는 배려이자 도움.
그리고 그건 그만큼 귀한 대우이기도 했다.
“원하는 것이 정확히 뭐지?”
“귀 교의 전폭적인 협력입니다. 대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스윽.
리그웨더가 그제야 자리에 마주 앉으며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중원의 전통적인 예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조심스러운 몸가짐이다.
아니, 과할 정도다.
“정확히 말해보시지? 괜히 예의 차린답시고 에두르지 말고. 본 교는 애매모호한 말 돌리기를 싫어해.”
천마는 이제 슬슬 부담까지 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예, 우선 탈마의 극에 달하신 교주님 본인의 전력이 필요합니다.”
리그웨더가 고개를 조금 더 숙이며 말했다.
딱 예상했던 요청이다.
“흠.”
사실, 현 중원에서 학관 연합. 그중에서도 수위에 달하는 전력을 지닌 천무학관. 이곳의 실질적 수뇌에 달하는 리그웨더가 저자세로 나오며 청할 것이라면 하나뿐.
천마신교의 지존이자, 탈마의 고수인 천마. 그 자신이 대몬스터 전선에 직접 나서 달라는 것이다.
“감히 일교의 지존께 드리기엔 무례한 요구이지만…….”
“아니, 괜찮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
리그웨더가 다시 겸하하는 것에 천마는 손사래 쳤다.
다른 단체, 다른 사람에게라면 어이없는 요청일 것이다. 일국의 군주더러 최전선에서 싸워 달라는 것이니까. 하나 천마는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싸움.
그건 천마에게 오락이며, 수련이자, 이득이었다.
그는 역대 어느 교주들보다 호전적이며,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괜한 금은보화나 너른 영토보다, 격한 싸움터야말로 그가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탈마의 극이라니. 과한 평가군. 극마나 화경 현경과는 달리, 지금의 내 경지는 뭐라 단언할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무한에 무한을 더한들, 역시 무한일 뿐이니까요.”
“호오. 알고 있군.”
천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리그웨더의 말은 딱 적절했다. 지금 천마의 상태는 그녀의 말처럼 무한, 탈마의 극에 이르렀다 할 만큼 높이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무한에 무한을 더해 보아야 역시 무한일 뿐. 탈마나 현경이 그 위의 단계로 가기 어려운 까닭이 이 때문이다.
깨달음? 새로운 이능? 그게 무엇이건, 근본적인 한계의 돌파는 되지 못했다.
화경까지의 경지는,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작은 잔에 많은 물이 부어져서 넘치는 것이다.
하나, 현경-탈마의 경지는 큰 강. 혹은 바다 정도의 경계다.
큰 강에 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은 들, 아무런 표도 나지 않는다. 큰 호우나 태풍이 몰아친다 해도, 바다가 넘치는 일은 없다.
“…그렇군. 그쪽도 그런가?”
말하다 말고 천마가 끄덕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천마의 정체기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리그웨더 또한 그 정도의 경계. 경지에 있다는 뜻이다.
새삼, 그녀가 현 학관연합의 최강자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천마와 달리, 마법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아쉽지만.
“교주께서 완전히 초월에 오르셔야 언제고 나타날 위협에 대한 대비가 되옵니다. 현 상황에서 앞으로 4년… 혹은 3년.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위협이 다가옴이지요.”
“리치왕… 그렇지. 그러고 보니 궁금한데, 왜 나이지? 그쪽이 먼저 오르는 게 더 빠르고 낫지 않나. 녀석에 대한 정보는 나보다 네가 더 많을 텐데.”
리그웨더의 말에 천마가 되물었다. 당연하고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현 중원에서 최강자. 모든 학관 연합의 수뇌가 바로 리그웨더가, 이토록 고개를 숙이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둘은 오늘 처음 대면하는 것 아닌가.
“…인간은 불완전하고 드래곤은 완전합니다. 그렇기에 리치왕을 상대로 더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같은 인간이신 교주이십니다.”
“리치왕이 원래 인간이었다라…….”
언제고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지만 천마는 새삼스러웠다.
인간은 태어날 때 약하고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계속해서 벽을 넘고 강해질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계속 절감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돌파할 수 있다.
반면 드래곤은 태어날 때부터 강하고 완전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일정 이상 강해질 수 없다.
마치 뛰어난 천재가 벽을 마주할 때, 일반인보다 훨씬 두텁고 높은 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저도 더 강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백, 혹은 천 단위의 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군.”
드래곤은 막말로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존재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막대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채워져서 탈피하는 데에는 백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드래곤. 심지어 리그웨더는 근 초월자급의 존재이기에 천 단위도 우습다.
반면 인간은 개체에 따라 희박하지만, 드래곤이 초월하기까지의 백 분의 일도 안 되는 시간에 그 정도의 성장이 가능하다. 당장 천마도 그렇고, 리치왕도 그랬다.
리그웨더 본인이 충분히 강함에도, 중원에서 현경 이상의 강자를 꾸준히 확보하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초월자라.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재미있는 말을 들었지. 우리 세계에 이미 그런 존재들이 있다고 하던데?”
천마가 물었다.
흑객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중원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이미 그런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고.
당장 현경의 유장위. 그가 마왕 바알과 사투를 벌이며 끌어들인 힘. 그건 천마 본인도 이미 목도한 바다.
“상제나 대선이나 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지 않나? 그들에게 힘을 빌리는 건?”
블라드의 표현으로는 정벌자. 리그웨더의 표현으로는 초월자. 초월자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초월자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초월자가, 리치왕이라는 외부의 적을 상대해서 처단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는가.
“…이미 해 보았습니다만, 그 존재들께서 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리그웨더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체 이 세계의 신들은 무슨 생각인지.’
이상할 정도로, 이 세계의 신화급 존재들은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불문이나 도가의 문파에는 그들의 흔적이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부처. 옥황상제. 태상노군. 심지어 장삼봉 같은 역사적 기록이 뚜렷한 아마도 상급 차원으로 승천해 버린 이들.
흔히 신선이니 신령이니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리그웨더도 이 세상에 있을 신급 존재와 이들과 접촉해 보려 했지만… 무응답.
도력이 높은 수행자나 불문의 고승들도 힘을 써 보았지만 ‘신탁’은 내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원인들의 배타적인 폐쇄성은, 인간들에게서만 보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굳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또한 ‘벽’으로 여기고 계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넘어야 할 제한이니, 이계의 이종족인 제가 도움을 청한다 해도…….”
“혹은 그냥 무심한 것일 수도 있겠고.”
리그웨더가 딴에는 좋게 해석한 것을, 천마는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했다.
‘나만 해도 교단이 어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천마 역시 처음에는 천마신교에 내려진 운명을 극복하려 했다. 신교를 수호하고 정도무림맹과의 싸움을 끝장내고 싶어 하며 수련에 임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는 그것이 덧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초월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교인들이 죽든 말든, 교단이 멸망으로 가든 말든, 그저 본인의 수양이 우선이 될 뿐.
‘그때 신마경에 들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묘한 기분에 천마는 쓰게 웃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리그웨더가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우우우웅.
“음.”
천마는 잠시 긴장했다.
리그웨더의 두 손 사이에서 피어나는 무엇.
그건 이제껏 그가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연구해 왔던, 바알의 심장에서 나타난 그것.
바로 차원 간 게이트였다.
“…받으시지요. 이것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이건…….”
“유사 게이트입니다. 제 힘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리그웨더가 기묘한 구, 주먹 크기만 하게 일렁이는 물 덩이 같은 것을 건넸다. 안색을 보니, 드래곤의 전력을 다하고서도 쉽게 만들기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탁. 스윽.
천마가 손을 뻗자 그 기묘한 구는 그의 손에 타고 들어 녹아 버리듯 사라졌다.
“…….”
동시에 어마어마한 지식, 경험, 깨달음들이 뇌리를 태워 버리듯이 찌르며 들어왔다.
“이거…….”
삐죽.
입가가 올라갔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확실히, 기억 속에서 겪었던 현상과 실제로 손에 넣으면서 얻게 되는 것은 경험의 차원이 달랐다.
“시간 좀 걸리겠군. 어쨌든 고맙게 받지.”
툭. 투툭.
조금 꼴사납게도, 코피가 터져 흘렀다. 천마도 리그웨더도, 중원의 두 절대자는 협약이 이루어지는 순간, 사색이 되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