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새로운 과목 (4)
열띤 수업은 빠르게 지나갔다.
두 시간을 휴식도 없이 내리 수업한 뇌천벽. 그는 문득 시계를 보고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허, 벌써 이렇게 됐나?”
기분 같아서는 좀 더 연강으로 진행하고 싶었다.
달아올랐을 때 쇠를 두드리라는 격언처럼, 모든 것에는 최적의 때가 있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집중력은 한결같지 않다.
어떤 때는 유리처럼 머리가 맑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흐리멍덩하여 강의 내용이 오른쪽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흘러 나가기도 한다.
그러니 이 ‘때’를 잘 맞추면, 한 시간의 수업으로 평소의 열 배 백 배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2학년 3반은 좋은 흐름을 탔다.
‘처음에는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금방 열을 띠었다.
엘리트 파티라는, 동급생이자 목표가 같은 반에 있었고, 얼마 전 필드 레이드를 경험하며 아쉬운 점과 잘된 점을 스스럼없이 교환할 수 있었으니까.
학관생들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머리에 담았고, 평소 궁금하던 것, 막혔던 부분을 손을 들고 물어 보았다.
가슴 뿌듯한 광경.
강의 좀 해 본 사람이라면, 학생의 열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저 가르치기 재미있다는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학생들의 집중력이 높을 때 가르치는 것이 효율이 더 좋다.
“이 정도로 하지. 수고들 많았네.”
아쉽지만 뇌천벽의 마음대로 강의 스케줄을 연달아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학관생들이 보이는 눈부신 집중력도, 한 번 더 연강을 이어 나갔다간 삽시간에 팍 꺾일 수 있다.
그랬다가는 안 하느니만 못할 터.
무예에서는 항상 과욕이 금물이다. 그건 제자에게도, 스승에게도, 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2시간 연강했으니 휴식 시간은 30분이다. 다음 수업도 잘 받게. 그럼 이만.”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모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은 뇌천벽이 교실을 나섰다.
그가 복도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을 때쯤.
푸화아아! 으아아아! 아악……!
교실 여기저기서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긴장과 흥분으로 이제껏 마비되었던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든 것이다.
“와. 시발. 숨도 못 쉬었다…….”
“나, 나는… 딸꾹! 딸꾹!”
“야, 누가 쟤 등 좀 두드려 줘라.”
“세상에. 이게 무슨 봉변이냐? 뇌천벽이라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뇌천벽 교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천무학관 자타 공인 3인자의 효과는 대단했다.
처음에는 긴장으로 머리가 하얗게 되었던 학관생들도, 차차 그의 말에 빠져들어, 나중에는 초집중하는 경험을 했다.
수업 내용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학관생들이 본능으로 느낀 것이다.
이 수업은, 건성으로 들으면 죽을 맛이고, 집중해서 들으면 그나마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걸.
“으아, 두 시간이 그냥 순삭 됐어…….”
사력을 다해 머리를 맹렬하게 움직였고, 덕분에 강의의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이 깊이 새겨졌다. 다만, 이런 맹렬한 두뇌 활동은 필연적으로 피로를 부르게 마련.
“30분… 30분이라고?”
“어우. 좀 자자. 졸려…….”
“다음 수업 뭐냐? 철학이지? 살았다…….”
“하하… 나 깨우지 마라. 벌점을 받든 어쩌든.”
퍽. 풀썩. 푸우우우.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묻고, 곧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흐응…….”
사각사각. 사각사각.
다들 지쳐서 뻗은 가운데, 휴식 시간에도 펜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남들 다 쉴 때 쉬지 않는 녀석들. 남들은 억지로 해야 하는 공부를, 재미로, 놀이 삼아 하는 괴물들.
이른바 ‘공부를 즐기는’ 미친 녀석들은, 뇌천벽의 강의를 들으며 떠올랐던 의문. 생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심상 등을 기록하고 있었다.
“소진, 강의 노트 좀 부탁하자.”
“어이, 소진. 나도 좀.”
“으아……?”
그들에게 자극받은 학생들이 소진에게 모여들었다. 겨우겨우 강의 내용을 정리하고 막 뻗으려던 그는 비명 비슷한 신음을 흘렸다.
“아니… 다들 나한테 왜 그래?”
가진 바 힘은 부족하고,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의 그에게, 삼음절맥의 우수한 두뇌는 이처럼 짐이 되었다.
노력은 하기 싫지만, 성과는 얻고 싶은 게 사람이라, 힘들고 귀찮은 건 남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는 법.
“야. 야! 그만들 해! 소진이 싫어하잖아!”
“헉…….”
“다. 당무련…….”
울상이 된 소진 뒤에서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이가 있었다. 당문의 독화. 당무련의 등장에, 아이들은 우루루 메뚜기 튀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 고마워…….”
“감사 인사는 이른데? 나야말로 좀 부탁해.”
처억.
말과 함께 당무련이 자신의 노트를 내밀었다.
소진은 웃음이 나왔다. 이제 보니 자신을 구원해 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다른 애들 없어? 난 필기시험도 고작해야 7-80점…….”
“약한 척 그만 둬. 멍청아.”
철썩.
당무련이 소진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을 끊었다.
“보물은 지킬 능력 없을 때나 숨기는 거지, 지금은 네 뒤 봐 줄 사람이 있다고. 더는 모자란 척 안 해도 돼.”
“어……?”
소진은 흠칫했다.
어째 말하는 게…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이제까지 필기시험을 일부러 망쳐 왔고, 그래서 성적이 적당히 낮게 나오도록 유지해 온 걸.
확실히… 일부러 모르는 척 모자라는 척하고, 가진 능력 발휘도 못 하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긴 했지만…….
“뒤를 봐 줄 사람……? 누구?”
“나.”
척.
당무련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
“그 얼굴 뭐야? 내가 못 미더워?”
당무련이 발칵했다. 소진은 파닥파닥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뭐가 불만이야!”
“그… 불만은 아니고. 당 소저는 원래 나… 싫어했지 않았어?”
“하아? 뭐라고 하는 거야. 이 바보가.”
찌익.
소리가 나도록 사납게 노려보던 당무련은 곧 아차, 하고 표정을 고친 후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눈칫밥 오래 먹다 보면 얼어붙지.”
“…어?”
“그냥 이쪽 말이야. 됐고, 머리 좋은 녀석은 싫어하지 않아. 그간 너한테 인상 쓴 건 남자답지 못해서였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계속 비굴하게 굴었잖아. 생존 전략이라는 건 알겠지만, 되게 멍청한 짓이야. 이놈 저놈 어중이떠중이 다 들러붙게 만드는.”
차라리 누굴 정해서, 한 명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그 대신 보호를 받는 것이 낫다고, 당무련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 또한 그런 방식으로 당문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그럼… 지금은?”
“같이 싸우면서 봤으니까. 겁이 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까먹었어?”
“아아…….”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그게 당문이니까.”
아마도 해적선, 그리고 그 외의 이런저런 행적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레이드 공격대에서, 마지막까지 당무련을 몸으로 지킨 것이 소진이기도 했다.
철썩.
당무련은 이어서, 자신의 노트를 소진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쯤 의자를 더 당겨 앉았다.
끼익. 스슥.
그 바람에 지척까지 얼굴이 다가왔다.
명문가 특유의 선이 고운 얼굴이 가까이 오자, 여자에 면역이 없는 소진은 대번에 얼굴이 붉어졌다.
“너… 너무 가까운데?”
“그래서? 싫다고?”
“아, 아니……! 그건 절대 아니…….”
“야, 이참에 다들 들어! 봤지? 소진은 나, 당무련에게 도움을 주는 녀석이야. 앞으로 괴롭히는 인간, 뭐 이거저거 요구하는 인간. 나오기만 해 봐라? 내가 아주…….”
차라락.
당무련은 말끝에 한 손에 비황석 한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을 펴 보였다.
“반드시 조져 놓을 테니까. 알았지?!”
“당 소저. 안 돼. 그러지 마.”
꽈악!
“…어?”
소진을 보호하려고 반 전체에 공표하는데, 엉뚱하게도 소진 본인이 손목을 붙잡고 말렸다.
“학관생들 간의 폭력 행사는 퇴학이야. 가뜩이나 PTSD 때문에 예민한 당 소저가 그래서는 안 돼.”
“뭐… 너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소진? 네가?”
이건 뭐 쥐가 고양이, 아니, 호랑이 걱정해 주는 꼴이 아닌가. 당무련은 기막혀서 물었다.
“당연히 걱정하지! 당 소저잖아!”
“……?”
그런데 이건 뭘까.
갑자기 평소의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이 싹 사라진 소진. 이를 질끈 문, 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야… 야… 너… 너…….”
그리고 그 홍조는 당무련에게도 전염되었다.
‘이 녀석이? 나를? 진짜로?’
너무도 예상외의,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비리비리한 녀석이, 걱정해 주며 박력 있게 눈을 부릅뜨자, 갑자기 기분이 이상야릇하게 들떴다.
“노트는… 내일까지 정리해 줄게. 뇌천백 교두님 강의는, 나도 이것저것 추가로 기입할 게 많이 있어서.”
“…….”
“당 소저?”
“어… 음, 으흠! 아냐. 아무것도.”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당무련은 손 부채로 달아 오른 얼굴을 식혔다.
“무, 무리하지 말고. 다음 수업이 또 얼마나 피곤할지 모르니까.”
“에이. 설마.”
소진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다음 시간은 철학. 고루하고 별 의미 없는 시간이다. 자습만 열심히 해도 학점 따기 어렵지 않아, 많은 학관생들이 필요하면 취침 시간으로 쓰기도 했다.
“뇌천벽 교두님보다 더 피곤한 시간이 있으려고.”
“모르지. 또.”
당무련은 대충 그렇게 반발 각을 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또한 진심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말이 씨가 되었다. 뇌천벽의 강의보다 더 피곤한 시간이 닥쳐온 것이다.
“차. 차려- 엇!”
방윤의 긴장한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좀 났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교편을 잡아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상쾌하게 미소를 짓는 금발의 여인.
분명히 이번 시간은 철학인데. 담당 교수는 나이든 머리 벗겨진 노인이었을 텐데.
“다들 잘 쉬셨나요?”
[“예---!”]
왜 천무학관 넘버원이 들어온 걸까. 학과장 리그웨더의 등장에, 2학년 3반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과목이… 철학이군요. 그럼 파자부터 시작해 볼까요?”
타닥. 타닥. 끼긱.
분필을 들고 칠판에 선을 그어 가는 리그웨더.
‘너 뭐 알아?’
‘아니! 몰라!’
학관생들은 다들 눈으로 필사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리그웨더 학과장.
그녀가 직접 교실에 교편을 잡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까마득한 졸업생들에게서도 들은 기억이 없을 정도다.
사실, 한 학교의 교장이 직접 수업에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말 그대로 전례 없는 사태에, 2학년 3반 전체가 초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탁. 끼이익. 사삭.
칠판에 매끄러운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완성된 글자는 익숙한 것이었다.
무(武).
리그웨더는 자신이 쓴 글자를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싸움. 무예. 힘. 여러 가지 뜻을 가진 글자지요. 이 글자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
“…….”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리도 아닌 것이, 학관 서열 1위이자, 현 중원 학관 연합의 최고 무력이 바로 리그웨더다.
다른 교수가 물었다면 바로 손을 들 만큼 쉬운 질문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다들 주저했다. 혹 더 깊은 뜻이 있는데, 그걸 파악 못 하는 멍청이가 될까 봐.
“어머… 아무도 없나요?”
“……!”
“……!”
주르르륵.
운소령은 식은땀이 났다. 반 급우들 전부가 얼어붙은 채로, 자신에게 애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좀 나서라고. 너는 대답할 수 있지 않냐고.
‘아니… 나한테 뭘 어쩌라고……!’
하지만 그녀 또한 잔뜩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
그렇다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과장이 교편을 들고 있는 전례 없는 사태에, 학급 전체가 아무 대답도 못 한다는 건, 더더욱 전례 없는 창피한 일이 될 테니까.
기긱기긱. 스으윽.
“네, 운소령 학관생.”
“차, 차, 창으로 싸움을 그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네, 맞아요.”
“가. 감사합니다!”
운소령의 고운 목소리에서 음 이탈이 났다. 그녀는 창피함에 새빨개졌지만, 리그웨더의 다음 물음에는 창백해졌다.
“음, 뭐가 감사하죠?”
“…….”
2학년 전체 수석이 처음 맞는 굴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