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새로운 과목 (5)
한자(漢字)의 기원은 상형문자다.
기록상으로 창힐, 고대 황제의 사관으로 있던 이가 새의 발자국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생긴 한자는, 처음에는 생긴 모습 그대로를 글자로 담았다.
사람(人). 해(日)와 달(月). 나무(木) 등을.
그러다가 더 많은 뜻을 담을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일, 이, 삼 등의 숫자나, 크고 작음(大小), 많고 적음(多少) 등. 이에 글자에 글자를 더해, 해와 달이 더해진 밝음(明)과 나무가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는 삼림(森林) 등.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의미하는 글자들이 새로 생겼다.
자연히 글자 자체가 커지게 되었고, 이에 변, 자주 쓰이는 글자를 작게 줄여, 다른 글자에 붙이며 파생적인 의미를 담은 표의문자로 성격이 변해 갔다.
‘대체 무슨 문자가…….’
대표적인 것이 푸를 청(靑)자 였는데, 왼쪽에 물(水)이 붙으면 맑다(淸)는 의미가 되고, 혹은 말(言)이 붙으면 부탁한다는(請) 글자가 되었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글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생겨났다.
중원은 예로부터 사람도 많고 땅도 너른 곳.
지방마다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어서 쓰다가, 다른 지방의 글자와 의미가 충돌하기도 했다.
의미가 뚜렷한 글자는 살아남았지만, 지나치게 복잡한 글자는 알아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자주 쓰이는 한자만 해도 수십만 자.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쓰이는 글자들까지 합치면 수백만을 넘어갔다.
‘한 번에 서너 가지 외국어를, 동시에 섞어서 배우는 기분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새로운 글자가 생겼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지는, 괴이하고 복잡한 언어.
때문에 리그웨더는 중원에 처음 왔을 때, 적지 않게 애를 먹었다.
통역 마법 덕분에 말은 어떻게든 통하지만, 그걸 글로 써서 문서로 만들면 온갖 혼란과 오해가 일어났으니까.
그녀가 드래곤, 그중에서도 유독 두뇌가 영활한 골드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짜증 나서라도 협력을 포기할 만큼, 상궤를 초월하도록 높았던 장애물이 언어의 장벽이었다.
‘어떻게든 통합을 시켜야 해.’
리그웨더가 학관 연합을 기필코 추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언어 문제였다.
그녀가 손을 쓰기 이전, 중원은 당장 같은 한인끼리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장강 이북의 경우 북경 관화라 불리는 일종의 표준어가 있었는데, 이건 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면, 성조와 억양 때문에 갈수록 알아듣기 힘들다.
특히 동남쪽으로 더 가 광동 지방의 광동어쯤 되면, 북경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힘든 외국어 취급을 받았다.
말만이 문제가 아니라 글도 문제였다.
대개 언어는 그 지역의 성향. 문화를 안에 담는 법이다.
지역마다 사용하는 방언, 상용구, 예외 등이 다 문자에 담겨 있었고, 그 뜻이 지방마다 상이하게 다르니 그걸 하나로 온전히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격변의 날 같은 천지개벽이 아니고서야.
‘의미의 온전한 전달이 가장 중요해.’
때문에 리그웨더는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흔히 쓰이는 단어들의 의미를 되짚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 여겼다.
오늘 수업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선사시대, 그러니까 역사를 적어 내리기 이전부터 인류는 스스로의 몸을 지켜야 했습니다.”
타닥. 탁탁. 탁.
‘무(武)’라는 단어 역시 표의문자. 뜻을 담고 있는 글자다.
창(戈)을 들어 싸움을 멈추게(止) 한다. 이것이 바로 무의 출발이다.
“과거에 여러분들의 선조들께서는, 정말로 많은 싸움을 겪었습니다. 그건 같은 사람과도 있었고, 사람이 아닌 들짐승들과도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늑대나, 호랑이나 곰 등의 야수들.
혹은, 가을의 곡식을 모아 두면 달려드는 마적들.
그리고 때로는 전쟁. 민초들로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얼키고 설키며 일어나는 쟁투들까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버텨 내기에 인간은 너무 약했다.
짐승들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었고, 거죽은 연해서 금방 살이 찢겨졌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다리나, 먼 곳을 감지하는 눈도 코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이것저것 끼적대며 항시 겁에 질려 살다가, 어느 순간 삽시간에 목을 물어뜯겨 죽는,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었다.
“원래부터 강한 자가 전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체구가 크고, 힘 좋은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도 분명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죽었다. 타고난 신력만 가지고는,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그래서 지도자, 전사, 족장들은 짐승은 하지 않는, ‘훈련’의 개념을 고안했다.
허공을 휘둘러 베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 모양의 표적을 만들어 후려갈기며, 자신의 몸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해, 최적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바로 무인의 출현.
이로 인해 생태계 최하에 자리잡았던 선인류는, 만물의 영장으로 뛰어올랐다.
“흔히 쓰이는 무의 의미는 용맹, 단호함, 끈질김, 강인함 등등이 있죠. 하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스로를 지킨다는, 수비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입니다.”
“…….”
“…음.”
리그웨더의 말에 학관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곱씹어 볼 깊은 뜻이 있겠거니, 하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철학 수업이니까…….’
‘학과장님이 좋은 말씀을 하시네…….’
음양(陰陽)이니 오행(五行)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뭔가 이치에 맞고,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 같은, 헌데 듣고 나서 돌아서면 대체 조금 전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헷갈리게 된다.
타닥. 타닥.
리그웨더는 다시 분필을 들어 글을 썼다.
천(天).
사람이(人) 크게 팔을 벌려도(大) 한없이 끝없이 높고 거대하여 까마득히 위에 있는 존재. 하늘(天).
운명이나 명운을 상징하는, 가장 고귀하고 절대적인 존재, 혹은 개념.
한데 그걸 무의 앞에 붙이자, 학관생들이 다 아는 이름이 되었다.
“천무…….”
“음…….”
“네, 우리 학관의 이름이죠.. 가장 고귀하고 절대적인. 거스를 수 없는 평화를 가져오는 힘.”
끄덕끄덕.
학관생들은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역시 좋은 말씀이구나. 하는 얼굴로 영혼 없이 동조하는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
“……?”
극히 소수. 그러니까 운소령이나 서문영 같은, 문무에 충분히 깊이를 가지고 있는 학관생들만 미묘한 의문을 가졌을 뿐.
‘저 말씀을 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지?’
강의는 대개 큰 주제와 작은 주제가 있는 법이다.
작은 주제는 대충 무언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테면 방금과 같은 이야기. 큰 주제는 그것들이 여러 개 뭉쳐, 같은 점은 반복되고, 다른 점은 서로 보완하는, 큰 그림이다.
운소령만큼은 아니지만, 서문영 역시 어지간하면 강의 내용을 들으며 큰 그림을 짚을 정도는 된다. 학년 차석이라는 자리는 주사위 노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서문영은 물론이고, 유독 교수의 방향을 잘 잡는 운소령 역시, 이번만큼은 리그웨더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따닥. 따닥.
천지인(天地人).
뒤이어 또 한 문장이 칠판에 쓰였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세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천무라는 이름은, 우리 학관에서 쓴 것이 최초가 아닙니다. 하늘의 고귀함, 드높은 기상, 고고한 이상으로서, 예로부터 많이들 쓰였지요.”
따닥. 따닥. 따다닥.
-소림. 무당. 화산. 청성…….
무예를 배운 자라면 모를 수 없는, 무예를 배우지 않은 사람도 들어본 적은 있는 유명한 옛 강호의 정도 문파들 이름이 쓰였다.
“검술이든 도법이든, 상승의 묘리를 담은 무예는 기본 철학을 가지는 법입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와 법칙을 재단하고, 그 재단법을 자기 유파의 무예에 집어넣지요.”
일종의 선입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불문에서는 해탈. 번뇌와 윤회의 고리를 넘어, 피안의 경계를 향하는 구도가 목적이다.
도문에서는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그게 오행이든 삼태극이든, 천리를 인리에 따라 함께하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입견이 강하면 강할수록, 본인의 삶에 점차 그런 철학적인 요소를 집어넣을수록.
극한에 다다른 수행자는 일거수일투족, 그저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것에조차 도리와 법도가 흐른다고 한다. 사람이 그저 살아 있는 무예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철학, 옛 무예 유파의 근본 이념은 반드시 깨우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저 정확한 동작, 강력한 위력. 그것이 무예의 모든 것이 아님은 여러분 모두가 아실 테니까요.”
끄덕끄덕. 끄덕끄덕.
리그웨더의 말에 학관생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 수련.
날카로운 검을 상상하며 휘두르면, 일개 몽둥이나 수도에서도 예리한 기운이 뻗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똑같은 휘두르기를, 둔한 철퇴를 상상하며 휘두르면,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둔하지만 강력한 일격으로 적중하는 법이다.
그저 형태를 드러내는 일격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는 법. 그것이 더 높은, 고아한 경지로 향하면 향할수록 목지하고 있는 방향- 철학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이 모든 것이 천, 하늘에만 매여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무예를 쓰는 것이 사람이라 하면, 어째서 오로지 하늘의 무예만 사용하는가 하는 것.”
“…….”
“……?”
학관생들은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하지만 운소령과 서문영은 눈을 좁혔다. 이제야 뭔가가 나온다 싶어서.
“세상에 음과 양이 있듯, 천무가 있다면 지무 또한 있습니다. 대격변의 날 이전, 옛 정도 무림맹과 가장 큰 경쟁을 벌여 왔던, 한때 중원의 3분지 일을 제패했었던, 강력한 무력 집단.”
“……?”
“……!”
드르륵.
학관생들이 갸웃하고, 몇몇이 설마, 설마 하며 중얼거릴 때, 강의실 앞문이 열리며 더벅머리를 한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낯익다… 라고 느꼈을 때쯤.
“소개드리지요. 구옥경 대협, 천마신교 제19대 교주이자 무예의 경지는 탈마로, 앞으로 본 학관에서는 교두의 지위로 움직이시게 됩니다.”
“여어.”
소개말이 끝나자 손을 들어 알은척을 하는… 이한.
“…….”
“…….”
학관생들은 거의 다 불신과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어제까지의 급우가, 하루아침에 교수, 아니, 교두로 변해 돌아왔다.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반갑다. 내 이름은 이한. 다들 알고 있지?”
“…….”
“…….”
“음,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군? 상관없지. 나는 앞으로 제군들에게 마공, 옛 천마신교의 호심기공을 가르칠 사람이다. 고고하고 잘난 정도 무림맹이.”
혼자서 피식 웃으며 천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본 교의 힘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지.”
다른 어떤 피의 복수 따위 없이, 의존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