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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89화 (290/310)

289화. 천마학관(天魔學館) (1)

팔락. 파라락.

두터운 책장이 넘어간다. 그 안에 쓰인 것은 수많은 숫자와 물품 목록.

“음…….”

탁. 타닥. 탁.

손에는 작은 수반(주판)을 들고, 한 자 한 자 틀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노인.

무인들이라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숫자로 빼곡한 장부를, 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들여다보기를 계속했다.

팔락. 팔락.

“그랬지… 그래… 그때는 그리되었고…….”

때로는 붉은색, 대개는 검은색으로 쓰인 장부는 사천 인근의 물동량과 수치를 기록한 것이었다.

읽을 줄 아는 이에게, 이런 장부는 어지간한 경극이나 연회보다 훨씬 즐거운 오락거리다. 세간의 시세와 물품이 흘러갔던 기록이니까.

특히 상인에게 있어 이런 장부는,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희대의 미녀와도 같으니.

“호오오…….”

드륵. 드드득.

노인이 황홀한 표정으로 장부를 뒤적이기를 한참, 갑자기 요란한 기관음이 벽에서 들려왔다.

철컥. 철컥. 끼리릭!

감옥처럼 단단히 봉해진 굵은 창살이 걷히고, 두터운 벽이 느릿하게 입을 벌려 한 중년 문사를 토해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인, 교무처장 구용천입니다.”

천무학관의 총관 대행. 구용천은 문을 열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상대는 그만한 예우를 받을 인물이었던 것이다.

“…….”

스륵.

노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흐릅. 후우우.

홍옥처럼 붉은 포도주가 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노인의 입에 빨려 들어갔다.

언제부터, 얼마나 마시고 있었는지, 크지 않은 밀실은 향기로운 포도주의 향내로 가득했다.

구용천은 그 향기 속에서 묵직하게 깔려 있는 불평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나 딱히 귀인을 감금하려 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래. 알겠소.”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 예?”

“알겠다고 했소. 뭐. 이 늙은이로서는 나쁠 것이 없지. 장사치가 가져온 물건이 가치 있어 보이면, 만전을 기하는 것은 당연하니.”

“…….”

“음. 아닌가? 혹, 쓸모가 없어 보였소?”

“천만부당합니다.”

왠지 시작부터 휘둘리는 느낌이다.

달그락.

구용천이 품에서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보석 하나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장주님 말씀대로 가치 있는, 아니, 가히 전선에서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귀물이더군요.”

지이이잉…….

가늘게 진동하는 커다란 보석.

그 빛은 피처럼 붉었다. 그런데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가늘게 맥동까지 치고 있었다.

“좋구료. 정말. 이 술 만큼이나 향기로워.”

즈즈즈즙.

노인이 웃으며 요란하게 포도주를 빨아 마셨다.

계속되는 게걸스러운 모습에, 구용천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마시는 법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기다리게 한 불쾌감의 표현인가?’

와인.

한 세대쯤 전부터 중원에 유행하기 시작한 포도주는 맛보다는 향으로 즐기는 계열의 서역의 술.

보통은 쓰고 떫은 맛이 나는 와인은, 공기와 적절히 섞이면 청아한 꽃의 향기처럼 바뀐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옛 다도처럼 마시는 법도가 따로 있었다.

맑은 유리잔에 빛을 비추어 색채와 투명도를 감상하고, 다음으로 코로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 입에 담은 후 술기운과 발효된 과즙의 향취를 즐기며 넘기는 것이 주도.

즈즈즙. 흐르르릅.

하나 지금 비싼 포도주를 들이켜는 남자는 그런 법도를 깡그리 무시했다.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며 마치 고깃국을 빨아 마시듯 들이켜는 모습.

식자들이 보면, 저건 포도주를 모독하는 무식한 자라고 혀를 찰 터였다.

물론 지금 구용천 앞의 노인이, 주도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시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오. 그저 탐욕일 뿐.”

“…예?”

갑자기 흘흘 웃으며 입을 연 노인. 그는 다시금 즈즙! 소리 나도록 와인을 빨아 마셨다.

“후우~ 백화가 일시에 만발하는 듯, 깊이가 있는 귀한 술이외다. 이런 향기를 허공에 날려 보내는 건 못 할 짓이지. 돈 푼이나 만지는 자라면.”

“그런데 왜… 아아… 그렇군요.”

구용천은 말을 하다 말고 노인의 주도를 이해했다.

그는 포도주의 주정 한 방울, 떨떠름한 쓴맛의 액체 한 톨 한 톨을 목 너머로 분무하듯이 들이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공기와 섞인 와인 특유의 향기를, 허공에 풍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가슴에 가둘 수 있으니까.

취향이라고 치자면, 지독히 탐욕스러운 주도였다.

“중원에도 예전에 포도가 있기는 했다오. 화식이나 생식으로 조금 맛을 보았던 이는 이 안에 오미(五味)가 다 같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귀히 여겼고.”

“오미… 입니까.”

단맛, 쓴맛, 짠맛, 신맛, 쓴맛의 다섯가지 맛.

중화요리는 오행이 어쩌고 하며, 이 다섯 가지 맛을 다 가진 음식을 귀히 여긴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이지만, 옛 기록을 보면 오왕(손권)이 구운 포도 때문에 서역과 교역을 했다 할 만큼, 왕후나 맛볼 기물이었다나.”

“그러… 시군요.”

지금은 아니지만 와인은 한때 값비싼 술이었던 만큼, 그 모든 맛, 향기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홀랑 다 마시겠다는 것.

그런데 화식… 이라면 굽거나 익혀서 먹었다는 말인가? 포도를?

차마 상상이 가지 않아 구용천은 갸웃했지만, 생각해 보면 또 이해가 갔다.

중원의 요리 문화에는 생식(生食)이 많지 않다. 과일을 씻으려면 분명 물이 필요한데, 누런 황하처럼 물은 많지만 수질이 좋지 않은 곳이 중원이다.

생것을 잘못 먹었다간 병이 걸리게 마련. 때문에 어지간한 것들은 무조건 굽고 찌고 하는 습성이 있었다.

당장 향초(香蕉: 바나나)만 해도 남방에서는 구워서 먹지 않나. 신맛이 강한 포도를, 적당히 겉만 구우면 나름대로 별미일 것 같긴 했다.

흐르르---큽!

“그래서. 학과장께서는 이 늙은이의 물건을 얼마에 사 줄 생각이시라오?”

다시금 괴이한 주도로 한 모금의 포도주를 넘기는 노인. 구용천은 잠시 풀렸던 긴장이, 확 당겨지는 걸 느꼈다.

“오가장주께서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지…….”

“허, 너무하는군. 팔 사람더러 물건 값을 말하라는 말이오? 그럼 천금(千金)으로 합시다.”

가볍게 내던지듯 천금을 입에 담는 노인.

오가장주. 사천제일 상단 오가장의 주인은, 자신이 팔러 온 물건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원하시는 가격이 그것이라면 맞춰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꿀꺽.

구용천이 답답해진 목울대를 울렸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핏빛 보석, 마노는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다. 그 값이 금자 천 냥이 아니라 만 냥이라 해도 천무학관으로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병기였다.

“그 많은 금을 어디에 쓰실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5천 냥.”

“……!”

구용천의 얼굴이 굳었다.

대뜸 가격을 다섯 배로 올려치는 오가장주.

가격을 두 배도 아닌 다섯 배로 말한다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이에 구용천은 살짝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상품을 어떻게 구하셨는지 출처를 알 수 있겠…….”

“만 냥.”

“…….”

이번에는 열 배.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다. 구용천의 얼굴은 더욱 굳었다.

“…이번에 가져오신 보주가, 개수가 백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그럼 다 합하면 금자 백이만 냥이군요.”

“큰 주문이니 2만 냥은 깎아 드리리다.”

선심 쓰듯 말하는 오가장주.

하지만 그로서도 말도 안 되는 거금을 요구하는 이유는 있었다.

보주의 출처를 말하면, 천무학관은 당연히 자력으로 자체 수급이 가능해지게 만들 터. 그럼, 지금 하나당 금자 천 냥을 받을 수 있는 가격은, 당연히 떨어지게 된다.

다시는 이런 짭짤한 거래는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을 돌려 하는 오가장주에게.

“…금자 백이만 냥. 사흘 안으로 지불 하겠습니다. 에누리는 쳐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구용천은 얼마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리 세게 내어 주어도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그리핀 라이더-가칭 공군의 전략적 가치는, 충분히 마리당 1만 금을 낼 만합니다.”

붉은 마노. 하지만 그 정체는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

오가장은 이번 천무학관으로 오는 상행에, 몬스터를 부화시킬 수 있는 홍마노 백여 개를 가지고 왔다.

비행형 몬스터 그리핀.

사실이라면 옛 고사에 나오는 적토마조차 비견할 바가 아니다. 대격변의 날 이전, 인류의 기동 수단은 도보, 아니면 말이었다.

하지만 말은 좋은 종을 골라서 부단히 훈련을 시켜도 최대 시속이 고작 80킬로미터. 그조차 전력으로 달리면 한 시간을 채 넘기지 못한다.

옛 기록에서 하루에 백 리(40킬로미터)를 달리는 말이 괜히 귀하게 여김 받은 것이 아니다. 천리마는 어디까지나 카더라 하는 과장된 이야기이고.

“대인께서 일러 주신 생육 조건대로라면, 길들일 수 있는 몬스터, 심지어 비행형 몬스터이지요. 고공에서 신속하게 기동하며, 작전 범위를 대폭 늘릴 수 있는.”

그리핀은 맹수다, 아니, 애초에 몬스터다.

그 자체로 대단한 전력이 되며, 추락하지 않는 이상 기수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그 전략적 효용성을 생각하면 1만금도 비싼 것이 아니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회전을 걸 수 있는 수단이 되지요.”

대몬스터 전선에서, 인간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지역 방어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최대한 손실을 줄이고, 적의 공세를 막아 낸 다음, 반격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수세를 강요당한다. 인간은 준비한 만큼 목숨을 아낄 수 있다. 유리하지 않은 지형과 시간은, 십 중에 칠은 손해를 본다.

그리고 그 손해에서 잃는 목숨 중에는, 초일류 및 화경급 고수도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

그리핀은 그런 중요 전력 자원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오히려 이쪽이 유리한 때에 강하 기습-이탈로 게릴라전을 펼 수 있게 한다.

화경 고수 한 명의 목숨 값으로 1만 금? 딱히 비싼 가격은 아니다. 물질은 써도 회복할 수 있지만 생명은 그렇지 못하다.

“호, 좋은 생각이오. 재능 있는 무인을 화경급 고수로 키우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 평균적으로 대략 금자 2천 냥, 금액적으로는 손해일 수 있지만…….”

“시간이라는 재원을 아낄 수 있지요.”

오가장주의 말을 구용천이 받았다.

시간. 가치 측정이 어려운 재원. 무림인 하나가 화경의 고수로 올라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빨라야 20년이다.

명문 학관에서 영약과 아이템으로 떡칠을 하고, 온갖 기연과 깨달음을 퍼부어도 최소 20년.

20년 뒤의 화경 고수를 지금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건 손해는 커녕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스윽스윽. 파라락.

구용천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몇 가지 사항을 적어 내렸다. 쌍방향 통신이 가능한 마법 아이템, 학관 총무부에 직접 대금을 지불할 수 있게 출납 요청을 한 것이다.

“대금의 이동을 준비시켰습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꾸벅.

구용천이 고개를 숙였다.

보통이라면 그냥 전표나 금자가 든 상자를 전하면 될 일이지만, 금자 백만 냥은 그저 천문학적인 숫자.

“내가 더 감사하지. 그보다 놀랍소, 이걸 통째로 사들이다니. 천무학관의 부유함은 끝이 없구료.”

“주인께서 골드 드래곤이시니까요.”

금자 백만 냥.

그저 황금으로 대저택을 짓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양이다. 산더미 같은 황금이 옮겨져아 할 것이고, 무거운 황금을 실을 수십 대의 마차도 준비되어야 한다.

“어이쿠. 그나저나 대금을 집에까지 어찌 옮기나…….”

오가장주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가 뒤늦게 골머리를 앓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천무학관이 그리핀 산업을 통째로 사들이다니.

장사가 너무 잘되어도 문제다. 말년에 돈 벼락 때문에 걱정하게 생긴 것이다.

“혹 원하신다면 오가장까지 대금의 수송과 호위를 해 드릴수 있습니다만.”

“…정말이오?”

오가장주는 놀랐다.

천무학관의 준걸들이라면, 황금 마차를 걱정 없이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단히 귀한 몸. 어설픈 상행에 동원하기엔 가격은 둘째 치고, 내키지 않으면 일도 마다하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지원해 준다니.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 많은 금을 다 어디다 쓰시려는지요?”

“어허… 상인에게 돈을 어디다 쓸지 출처를 묻는 것은 조금 예의가 아니지 않소?”

구용천의 물음에 오가장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상인에게 돈 씀씀이를 묻는 것은, 무인에게 출신이나 경지를 묻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실례다.

아니, 어찌 보면 더한 실례다. 상단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들의 약점과 부족함을 다 알 수 있으니까.

“대인의 말씀대로 본래라면 본 학관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 총무부에서 말하기로, 백만 금이라는 재화는 시중에 바로 풀리게 될 때 큰 충격을 가져온다고 하더군요.”

구용천이 수첩에 기록되는 글귀를 읽었다.

인플레이션.

중원은 예로부터 은 본위제로 경제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은 본위제도 아니고 은 실물경제다.

대부분의 거래는 배 모양을 한 은자나, 작은 지역 경제의 경우 잘게 자른 은 덩어리로 거래를 한다.

하지만 시중의 경제는 물품의 거래에 있어 제한이 있다. 대격변의 날 이후로 학관에서 흘려낸 신농업 기술이 있다 해도, 그 한계는 있는 법.

시중에 갑자기 대량의 은이 풀리게 되면 어제 은 한 냥으로 한 되의 곡식을 사던 것이, 내일은 그 반도 사지 못할 수 있다.

“은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지 않소.”

“금과 은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환전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금자 백만 냥은 어마어마한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데. 혹…….”

구용천이 말을 하다 말고 눈매가 우묵해졌다.

“사천제일 상단이 이참에 옛 촉한 지역을 다 경략하시려 하는 것입니까?”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구려. 기우요.”

오가장주가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

그리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오래된, 선대부터 내려온 자산이라오.”

그리폰 부화산업은 누대에 걸쳐 오가장이 가업 비밀로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 채굴(?)법과 지식을 한 번에 팔았으니, 그는 이번 거래로, 평생 벌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만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투자.

이제껏 소모해 온 수많은 물자와 시간에 대한 보상이 될 뿐이다.

“아, 그리고 새 세력과 친교가 필요한 것도 있고. 이제 막 개척을 시작하는 곳이니 돈이 많이 들 테니.”

“새 세력? 어디입니까?”

“귀하들도 알 만한 곳이오. 이참에 투자해 보시구려.”

오가장주는 씨익. 장난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천마신교… 아니, 천마학관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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