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천마학관(天魔學館) (3)
철물을 잔뜩 가져온 상단. 그들이 내민 물목을 보고, 천무학관의 거래 담당자는 되물었다.
“회회(灰灰)상단… 이라고요?”
“예. 저희 마을 회회리(灰灰里)의 이름을 딴 겁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물론 문제 될 건 없다. 상단이 자기네 본거지의 이름을 따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당장 오가상단만 해도 오가장의 이름을 따서 지었지 않은가.
다만, 회(灰)라고 하면 재를 말하는 것이고, 그 회를 두 번 쓴 회회리라고 하면 보통 끔찍한 화재, 커다란 불길에 소실되어 버린 마을을 뜻한다.
보통 상단의 이름은 부유함과 풍요함, 혹은 천하니 금룡이니 하는 패기 있는 걸 넣게 마련인데, 불타 버린 잿더미를 이름으로 달다니. 무슨 생각으로 작명한 건지 모를 일이다.
“하하. 재라는 것은, 끝이자 시작이지요. 당장 화전(火田)만 하더라도 숲에 불을 질러, 재를 비료 삼아 밭을 일구는 방식 아닙니까. 모든 것이 불타 버리고 남은 잿더미. 그 위에서 다시 싹이 자라고 곡식이 열매를 맺지요.”
“뭐… 그건 그렇군요.”
“옛 전설의 불사조(不死鳥)만 하더라도, 잿더미 속에서 새로 생명을 얻어 날개를 편다고 하지요. 삿된 것을 정화하는 불, 그 뒤의 재는 새로운 생명의 발판이 됩니다.”
장귀산.
그렇게 이름을 밝힌 회회상단의 행수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연덕스럽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문답을 자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그리 보면 나름 깊은 의미를 둔 이름이군요.”
잿더미 속에서 다시 영광을 찾는다니. 한 번 무너졌던 명가의 후예가, 절치부심하는 심정을 담아 지은 이름 아닌가. 꿈보다 해몽이라고, 그렇게 들으니 괜찮았다.
“그럼 한번 보시지요. 부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 오히려 우리가 잘 부탁드리오.”
천무학관의 사람들은 거만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내린 큰 폭우와 장마 때문에, 평소에 천무학관에 철재를 납품하던 철방들의 형편이 별로 좋지 못했다. 특히 가까운 야하상단의 경우, 불량률이 자그마치 3할이나 된다고.
하지만 품질은 둘째 치고, 당장 물량부터 많이 줄어들었는데, 때마침 회회상단이라는 곳에서 적절한 때에 많은 물량을 가지고 왔으니 수고를 덜게 된 것이다.
팅팅.
“흐음…….”
“오호?”
대충 인근 지역의 중소 철방. 그렇게 생각하고 큰 기대 없이 확인해 보았는데… 생각 외로 철물의 품질이 좋다.
아니, 품질만이 아니라 철봉과 철판의 규격이 일정한 점에서, 더더욱 담당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대량으로 철재를 소모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균일화(均一化)는 대단히 중요한 여건이다.
“이거, 이거…….”
“음, 이 정도면 바로 쓸 수 있겠구려.”
어차피 들어온 철봉과 철재는 필요에 따라 잘라서 쓰지만, 같은 규격으로 균일화된 철재는 자르기도, 덧대어 쓰기에도 품이 덜 든다.
화일로(華一露)는 차곡차곡 적재되는 회회상단의 철물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쭈욱 줄을 세워 보니 크기가 거의 동일한 것이, 마치 완성품처럼 만들어진 철물인 것이다.
“귀 상단의 역량이 상당하시구려. 고작 중간재의 손질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허허. 뭘 이 정도를 가지고… 저희는 특히 불을 다루는 데 능하니, 철물이야말로 저희의 전문이랍니다.”
대단치 않다는 듯 여유롭게 웃는 얼굴. 철봉과 철판을, 이렇게 균일하게 만들었다는 건, 상단으로서 보이는 시위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철물도 각을 잡을 만큼 여유가 넘친다!’라고.
왠지 느낌이 좋아, 화일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거래처 하나가 새로 생긴 것 같군.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아이고. 이를 말씀입니까. 저희야말로 좋은 관계 부탁드립니다.”
화일로는 그를 방으로 따로 불렀다. 철재를 확인하고 가격을 셈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 차와 다과를 대접할 셈이었다.
그랬더니 회회상단의 사람은, 눈짓을 해서 다른 이들이 두툼한 궤짝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이게 뭐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회회상단은 불을 다루는 것에 특히 자신 있는 쪽입니다, 당연히 철물도 철물이지만, 근래에 새로운 합금을 발견했지요.”
“새로운 합금? 그럼…….”
“예. 이것들은 초도 물량으로, 과연 어느 정도 쓰임새가 있을지를, 천무학관의 고인들에게 평가받고자 합니다.”
덜컥. 번뜩.
말과 함께 궤짝이 열렸다. 드러난 내용물은 철창 몇 자루와 갑주 몇 벌.
마침 납품된 철재로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품목이다. 철봉을 조금 손보면 바로 창이 될 테고, 철판을 잘라서 모양을 만들면 바로 갑주가 될 테니.
한데, 때깔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시리도록 흰 은빛에, 기묘할 정도로 광택을 흘리는 판금 갑옷. 그리고 새카맣게 빛을 흡수하는 창.
겉만 보면 거의 명품 반열에 속할 물건이다. 그런 것들이 탁자 위에 차곡차곡 올려지자, 천무학관의 교수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딱 봐도 대단하군요. 그럼…….”
“하나씩 봅시다. 이건… 으음?”
흠칫.
천무학관의 교수들은 먼저 창을 들어 보고, 생각보다 엄청난 무게에 당황했다.
창을 촉부터 자루까지 통짜로 철로 만들어도, 그 무게는 고작해야 열 관 정도.
한데 이놈은 그 두 배 정도의 무게라 손이 축, 하고 내려간 것이다.
슉.
“어어……?”
다음으로 갑주를 들어 보고 교수들은 또 한 번 놀랐다.
놀랍게도 창과는 반대로, 갑주는 기존 것들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가벼운 무게였던 것이다.
“이거 대체…….”
“…좋은 물건이군. 허어……?”
팅팅. 우우우웅!
창과 갑옷을 두들겨 보고, 힘을 주어 내력까지 넣어 보고, 천무학관의 교수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회회상단.
첫 만남에 신제품의 평가를 바란다니, 나름 자신 있는 명품을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써 보면 써 볼수록 이건 보통의 무구가 아니었다.
절걱. 절걱.
갑주는 깡통처럼 구조가 단순했다. 그리고 사용자의 움직임을 생각했는지, 약간의 연성도 있었다.
문제는 그 무게다. 일반 판금 갑주의 절반 이하.
혹시 얇게 만든 종잇장인가 싶어 눌러 보니, 두께가 한치에 가까운 튼실한 물건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방호력이 확보된다.
후르륵. 치이이익!
천무학관의 교수들 중에서는, 화염이나 뇌전 속성의 내력을 가진 무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갑주에 내력을 넣어 본 뒤 경악했다.
파스스슥!
“이게… 뭐야?”
“바스러졌어? 어찌…….”
뇌전의 충격도, 화염의 열기도, 고스란히 흡수해 버리다가 바스러지는 갑주.
보통 금속제 무구는, 속성 공격을 받으면 착용자의 전신으로 퍼지는 법이다. 전격을 맞으면 감전되는 것은 당연하고, 화염 공격을 받으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은빛의 갑주는, 손상이 되기는 하는데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웠다. 마치 두꺼운 나무로 만든 갑주처럼. 이는 대단히 유용한 특성이다.
“마법…? 아니, 아닌데. 그저 철물로 이게 가능하다고?”
학관의 교수들 중에는 당연히 마법사도 있었다. 그들은 은빛 갑주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이게 아이템이나 인첸트(마법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아예 경악해 버렸다.
“세상에. 놀라운 물건이군. 이걸 어떻게 만들었소?”
그러자 장귀산, 회회상단의 행수는 커흠, 하고 예상했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희 선조들께서 쌓아 온 기술 덕분에요. 이 합금 무구는 당장은 몇 점 안 되지만, 앞으로는 한 달에 창 천 자루, 갑주 백 벌의 생산이 가능할 겁니다. 양산품이라는 말이지요”
“……?”
“……!!!”
천무학관의 인물들이 더욱 경악할 말을.
* * *
스윽.
장귀산이 몇 장의 서류와 짤막한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서류는 전문 감정인들에게 보이는 내용인 듯했고, 쪽지는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알기 쉽게 내용을 축약한 모양이었다.
-유사 미스릴 갑주.
-강철에 버금가도록 단단하지만, 무게는 절반 이하.
-소금물에 1개월 이상 넣어 두어도 부식되지 않음.
-전격, 화염, 자성에 저항을 가지고 있음.
-생체 친화도가 높아 쇠 독이 없음.
-약간의 형상 기억 능력이 있음.
-유사 아다만티움 창.
-비중이 철의 두 배에 가까움. 충분한 근력이 담보되면 더 강한 공격이 가능.
-내삭성이 높아 세밀한 가공은 불가. 대신 주물로 생산하기에, 빠른 제조 공정 가능.
“으음……!”
내용을 읽어 본 천무학관의 사람들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특히 광택은 요란하지만, 의외로 구조가 단순한 갑주의 설명을 보고 더욱 놀라고 있었다.
가볍고, 단단하고, 녹이 슬지 않으며, 쇳독이 잘 오르지 않는 데다, 약간의 형상 기억 능력?
뭔가 이건 이쯤 되면 전설상의 진짜 미스릴이라고 해도 믿을 것 아닌가.
“유사… 미스릴 갑주라고 하셨소? 그럼 진품도 있으시다는 말이오?”
“아, 이런. 거기까지는 아닙니다. 저희가 좀 과장 광고를 했군요. 우선 확, 하고 눈길을 끄는 것이 먼저라…….”
“……?”
“…….”
교수들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회회상단의 행수는 뻔뻔하게 계속 말했다.
“문헌에 의하면, 미스릴 갑옷은 신물이나 다름없지요. 가볍고 단단한 데다, 어떤 충격에도 뚫리지 않는다고 하는 궁극의 갑주. 소재는 진은. 은에 축성을 하고 마법적인 조치까지 해야 하는, 보석보다 더한 귀금속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래서 유사라 함은……?”
“그냥 목표치입니다. 미스릴만큼 가볍고 튼튼한 물건으로 언제고 만들겠다는. 애초에 미스릴이라는 재료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탁.
탁자를 가볍게 두들기며, 행수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진은보다 더 좋은 점은 있지요. 바로, 자재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철보다 조금 더 양이 적을 뿐, 이 갑주와 창은, 흔한 광산에서 바로 구할 수 있습니다.”
“……?”
“……!”
운철이라는 것이 있다. 무림인이나 대장장이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소재.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 조각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활활 타오르는 상태로 떨어진다.
덕분에 어지간한 불순물은 다 알아서 빠져나가고, 철이나 그 외 무겁고 강한 물질만 남는다.
이것이 운철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철.
이것으로 만든 무구는, 대장간에서 두드려 만든 철보다 몇 배는 강인하다. 그렇게 좋은 소재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것.
어쩌다 큼지막한 운철이 떨어지면, 인근의 강호인과 무림인들이 죄다 몰려서 그걸 차지하려고 혈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런 개판을 보다 못해 염증이 난, 어느 대장장이는 불현듯 묘한 생각에 빠졌다.
‘운철이 정말 천외에서만 날아오는 걸까? 사실은 이 땅에도 있는 것 아닐까?’
처음에는 그저 궁금증이었지만, 나중에는 가설이 되었다. 천무학관 사람한테 몇 마디 배운 대장장이가 흘린 말로.
-거 말이지. 사실 세상은 커다란 공처럼 생겼다나.
-그리고 땅. 그저 그냥 바윗덩어리처럼 생긴 이 땅이, 사실은 흐른다네. 물처럼… 은 아니고 빙하처럼? 어쨌든.
-운철 있잖은가? 그게 실은 세상이 쪼개져 버린 그 조각 중 하나라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 같은.
-……!
운철, 현철, 만년한철 등.
가공하기 어렵고 손에 넣기는 더욱 어려운 희대의 소재들.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조건이 성립되어야 겨우 조금씩 자란다고 하는, 그 자체가 보물이라고 하는 금속들이 있다.
무인들에게 이런 금속은 탐나는 물건이다. 피 튀기는 싸움을 하더라도 반드시 가져야 할 만큼.
그리고 피는 튀기지 않더라도, 무인들 못지않게 이런 금속을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대장장이다.
-이 땅에… 있다. 분명히 있어.
-운철이니, 현철이니 하는 것들이. 분명히!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대장장이였기 때문이다.
철을 다루는 이들에게 철광석의 질은 대단히 중요하다. 녹이는 데는 굉장이 많은, 비싼 연료가 들어가기에, 채산성이 좋지 않으면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효율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어디서든 철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함량이 낮아서 문제지, 땅을 대충 걷어 내어 지남철(자석) 덩어리로 스윽 훑기만 해도 자잘한 사철 가루가 나온다.
그렇다면 희귀 금속이라 한들, 못 모을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