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천마학관(天魔學館) (4)
“…그렇게 선조께서는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하며 기록을 만드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그 기록은 자료가 되고, 후손들은 더 깊은 심도로 연구를 할 수 있었지요.”
“호오.”
“흐음.”
교수들은 장귀산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했다. 이는 그들이 무인이지만, 동시에 학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달(吳達)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그에게는 무인들의 무용담만큼 학자로서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연구 개발의 난항과, 구석에 몰린 장인이 도박처럼 내질렀던 혁신적인 시도.
붓이든 망치든 한 분야에서 평생을 고뇌한 자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리는 법.
“운철이 가치가 높은 까닭은, 천연의 합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성 과정은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이야기를 전환할 겸 행수가 묻자, 천무학관의 교수들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운석이 대기권을 돌파하면서 엄청난 마찰열이…….”
“…아음속을 넘는 속도 아래서, 어지간한 불순물은 전부 기화되거나 흘러서 날아가 버리지.”
와글와글.
말할 기회를 주니 바로 떠들어 대는 교수들.
씨익.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 행수 장귀산은 가볍게 웃고 난 뒤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운철은 그렇게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금속이라 드물고 귀하죠. 그런데 이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선조 야장들의 도전 과제였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 끝에서, 그들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일단 가능은 하다고.
다만 기존의 고로와는 차원이 다른, 초고열을 내는 특수한 화로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렸다.
철은 용광로의 온도가 높을수록, 장인이 다루기 쉬워진다. 충분한 열이 있다면, 투여하는 숯가루나 다른 촉매를 쉽게 받아들인다.
“철광석을 녹이며 오래 열을 먹이면, 녹아서 물처럼 되어 버리는데, 이때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철은 아래로, 돌이었던 것은 위로 떠오릅니다.”
물과 기름처럼, 자체의 무게로 갈리는 것이다.
이때 윗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부어서 버려 버린다. 벌겋게 녹아 흐를 뿐, 어차피 그냥 돌이니까.
무거운 아랫물-철은 자연스레 아래쪽에 고이는데, 그 와중에 묘하게도 아주 미량이지만 철보다 더 아래로 가라앉는 금속도 있었다.
강철보다 훨씬 무거운, 그리고 더 단단한 금속.
특제로 만든 거대한 용광로의 바닥에서 아주 약간 얻어 낼 수 있는 것들. 그것들을 모으고 모아, 물성을 연구했다.
“그럼 그것이……?”
“예, 옛 문헌에 따르면 오사(텅스텐)라고 하더군요. 금보다 더 무겁고 강철보다 더 단단한. 운철 상태로나 조금 엿볼 수 있었던 놈이지요.”
대격변의 날 이후, 세상은 리그웨더가 가진 새 지식으로 정립되었다.
마법과 물리학, 화학으로 인해 수많은 기술이 개량되었고, 이유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하라’는 옛 전통은, 미신과 합리적인 개념 정립으로 정돈되었다.
거기에는 금속 기술도 당연히 있었다.
철에 섞을 경우 우수한 합금이 되는 금속들. 이에 대한 연구는 대격변의 날 이전에도 있었다.
그렇게 정확한 개념 구현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천 년을 넘는 중원의 대장장이들 경험도 우습게 볼 것은 아니었다.
“치(티타늄)에 대해서는 발견이 조금 늦었습니다. 비중이 철의 반밖에 되지 않아, 가벼우니 응당 약하리라 여긴 것이지요. 장난처럼 이루어진 모험적 시도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티타늄, 그리고 텅스텐.
이 두 금속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강도를 지녔지만, 철과 몇 가지를 더 섞어 넣으면 훨씬 더 대단한 물성의 변화를 보였다. 이런 합금에서 대표적인 예는 바로 청동이다.
구리에 주석을 섞어 넣으면 만들어지는 합금. 흔히 세간에 청동이 철보다 약할 거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실제 청동은 강철과 거의 비슷한 강도를 지닌다.
또한 기존 강철에는 없는 연성(延性)까지 가지고 있으니 화포 같은 분야에서는 귀히 다뤄진다. 애초에 구리는 금, 은 다음의 귀금속. 철처럼 흔한 물건이 아니다.
어쨌든.
티타늄과 텅스텐이 철보다 더 단단하건 가볍건 간에, 장인들에게 있어서는 훨씬 더 중요한 항목이 있었으니, 바로 수급. 철 못지않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금속이라는 점이다.
“저희 회회리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있습니다. 한번 달구는 데만 사흘이 걸리는 특제품이지요.”
고온. 고열. 고압.
광물을 녹이기에 필수적인 요건이다.
철보다 더 강한 소재를 녹여 내려면, 철이 녹아내리는 것보다 더 뜨거운 화염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한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구조물이다.
‘쇠도 녹여 버릴’ 고열을 일으키는 가운데, ‘녹아내리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건물을 어찌 쉽게 만들까.
“대단하시군요. 비결이 대체……?”
정구살이 눈을 부릅떴다.
대장간의 가마에 흔히 쓰이는 재료는 내화 벽돌이다. 열에 강한 소재에 일부러 공기층을 넣어 만들어 낸 내화재.
하지만 아무리 내화 벽돌로 열기를 막아 낸다 해도, 그 기간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대격변의 날 이전에는 대장간이 일정 이상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우연히 노달 장로가 가져온 ‘열기의 룬 스톤’이 아니라면 회회상단 또한 생각도 못 했을 터.
“허허, 아니, 철물을 파는 장사치에게 그런 걸 물으시면 아니 되시지요?”
“험, 험…….”
“크흠…….”
웃으면서 하는 질책에, 천무학관의 교수들이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장사치에게 장사의 밑천을 말하라고 하는 건 더없는 실례다.
하지만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작은 마을의 지역 상단으로 생각했던 곳에서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철물의 발전에서 수백 년간 넘지 못한 벽. 그걸 둘이나 넘고 있었는데.
“뭐, 앞으로 기회가 되면 기술의 공유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아시지요?”
장귀산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 알겠소. 커흠.”
“초면부터 너무 서둘렀군. 실례했소이다.”
천무학관의 사람들이 끄덕였다.
충분히 신뢰가 쌓인 동업자라면, 비술이라 해도 전해 줄 수 있다. 많은 이득, 오랜 협력관계가 지속되면 가능하다. 그리고 그건 시간만 지나면 충분히 이루어질 일이었다.
천무학관은 애초에 철물이나 병기를 만들기보다 소비하는 입장. 회회상단에게 좋은 고객이 되면 되었지, 경쟁자가 될 턱이 없는 곳이니까.
“뭐, 앞으로 자주 보면서 천천히 친해지면 될 일이지요. 그런데… 불? 재? 음… 잠깐, 귀하들은……?”
문득 화일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을 신성시하는 이들. 잿더미도 풍요의 기초라고 하는 말.
문득 기록상에 남은 어떤 ‘단체’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보니 살짝 주변을 갑갑하게 만드는 불편한 기감까지.
“실례가 안 된다면 혹… 귀 상단의 선대께서 밑천이 별로 없어도 되는 장사를 하셨소?”
밑천 안 드는 장사.
나름 예의를 차린 말이지만, 강도나 몰락한 사파의 후예라는 말이다. 그렇게 묻자.
“예, 저희는 옛 천마신교의 후예들입니다. 그게 궁금하셨던 거라면야.”
씨익.
장귀산이라는 이름의 상단 행수가, 꺼리지도 않고 자신들을 내보였다.
“……!”
“…허어.”
천무학관 사람들의 몸이 긴장으로 움찔했다.
천마신교.
근래 들어 자주 접하는 이름이다. 당장 얼마 전 학관에 신임 교수로 부임한 구옥경. 그가 당장 천마 아닌가.
사라진 줄 알았던 마교의 잔존 세력이 아직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다니.
“왜들 그러십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천무학관에는 옛 명문 정파의 후손들이 많으시지요. 혹, 본 교와 과거에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아니, 아니오. 딱히 그런 것은 없소.”
“한때 악연이 있었다 한들 너무 옛일이니까.”
천무학관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교가 몰락한 이후, 자그마치 한 세기 하고도 반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예전에 그들과 어떤 원수지간이었든 간에, 그저 이름만 기억하는 옛 종교 단체와 새삼 경계나 반목을 할 이유 따위는 없으니,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저희는 그간 천무학관이 강호에 이바지한 바를 높이 평가하는 바. 본 교의 지존께서 귀 학관에 직접 몸을 담으시며 절차탁마하고 계십니다.”
천무학관도 천마신교도 당장은 공통의 적이 있다.
바로 리치왕, 그리고 그 휘하의 몬스터들.
대격변의 날, 마교는 총단이 괴멸당하고 그들의 선조가 머물던 ‘성지’를 점령당했다. 당연히 몬스터들에 대한 복수와, 빼앗긴 땅을 수복하는 것이 지상 명제일 터.
“그쪽도 우리도, 언제고 천하 만민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과 싸울 터이니, 옛 허울에 지나지 않는 과거는 잿더미 아래 덮어둠이 어떠할지요?”
“으음…….”
“뭐, 확실히 그야 그렇소.”
그리고 천무학관은 대격변의 날 이후, 흔들리던 중원을 힘겹게 조율해서 붙잡고 있는 터다.
함께 싸워 줄 수 있는 상대가, 알아서 몸을 숙이고 나오는데 거부할 까닭이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화일로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이제 보니 회회상단은, 상단이라기보다 신교의 사절이시구려?”
화려한 입담. 딱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친화력.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전략 물자. 회회리라는 옛 마교의 새 이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배포까지.
이쯤 되면 대격변의 날 이전, 얼마 없었던 마교-중원의 평화 시대가 생각날 지경이다. 앞서의 거래 내용을 충실히 지켜준다면, 옛 시대의 사신단 같은 역할이 아닌가.
“과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소인이 맡은 일은 그저 거래일 뿐입니다.”
“그게 진심이오? 불가침 선언이라든가, 우호 관계 선포라든가 그런 목적이 없으시다고?”
“본 교가 이 정도로 그런 걸 원할 만큼 궁하지는 않습니다. 사절에 대해서는 따로 사람이 올 예정입니다.”
장귀산이 씨익,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뒷배가 이렇게 무섭다. 과거라면 상상도 못 했을 포부다. 그리고 사절이나 사신 대접이라면, 이제껏 노구를 끌고 고생해 온 웃어른이 있으니 과실은 그가 따야 한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고작 저따위가 그런 역할을 맡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엉덩이를 걷어차일 테니까요. 하하하하!”
“…….”
“…….”
교수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상대가 거짓말하는 기색을 느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거야 원. 판이 장난이 아니군.”
“그러게. 이게 그저 관계를 맺기 전의 거래라면, 본격적인 사절은 누가 오시는 게요?”
“아, 그게. 어쩌면 안면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장귀산이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본 교의 노달 장로라고 합니다. 혹시 아시는지?”
* * *
다각. 다각. 다각.
차악. 차악. 차악.
가도를 걷는 행렬은 수십이었다. 전원이 검은 칠을 한 갑주와 창을 들었고, 선두에는 암흑처럼 검은 흑마 몇이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마침이랄까. 참으로 날이 좋았다.
막 정오가 되어 그림자가 가장 짧게 줄어들 무렵.
두두두두!
저 멀리 선두에 선 기마 둘이 빠르게 본대로 돌아왔다.
“천무학관이 보입니다!”
“장로님, 천무학관이……!”
“음.”
노달은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다는 체를 했다. 그리고는 낮게 울리는 저음으로 말했다.
“행렬을 다시 정비하도록. 한 치의 틈도 보이지 마라.”
“충!”
“추웅!”
타다다닥!
앞서서 왔던 기수가, 대열의 뒤까지 돌아가며 명령을 전파했다. 그와 함께 다시금 삼엄하게 일어나는 기세.
좌악. 좌악. 좌악.
철컥. 철컥. 철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광경이다. 일사불란하게 모두가 하나의 박자에 맞춰,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진군하는 모습은.
휘익! 펄럭!
-창천위사. 천마도래.
뒤이어 옛 푸른 하늘은 떨어지고, 천마께서 오시리라. 는, 검은 바탕에 하얗게 쓰인 여덟 글자가 깃발에 박힌 채 펄럭거린다.
“스읍.”
때아닌 울컥거림. 괜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 감상적으로 된 게 아닐까. 민망하게.
하지만 딱히 부끄러워할 것도 아닌 듯했다.
크흠. 크흐흠. 어흠.
노달만이 아니라 사절단 행렬 여기저기서, 한껏 벅차오른 가슴 때문에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울린 것이다.
교의 특성상 정련된 기세와 충분한 무예를 지닌 이들은 대개가 청년보다는 장년층이었고, 그런 만큼 쌓인 감상이 많았던 탓이다.
펄럭. 펄럭.
“허허…….”
노달은 선두에 나부끼는 천마도래기를 보고, 그 뒤를 따르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푸르르륵!
흑요석처럼 검은 털의 말. 그 위에 올라탄 노달은 전신을 새하얀 면의로, 그 소매와 바지 자락에는 붉게 수가 놓여, 타오르는 불꽃을 드러내고 있었다.
옛 고서에서나 보아 왔던, 마교의 부대 ‘삼개전단’
수는 고작해야 서른일곱이다. 하지만 힘을 잔뜩 넣어 통일된 의상으로 차려입은 옷은, 아군에게 기세를 상대에게는 위압감을 주는 법이다.
‘돈 너무 많이 썼는데…….’
조금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은 있었다.
그간 온갖 전장과 마물의 찌꺼기들을 헤집으며 아이템을 얻고, 그걸 한 푼이라도 더 받고 팔기 위해, 손바닥을 비볐던 세월이 몇 년이던가.
‘아니지, 아니야. 이것이… 우리다.’
하지만 고난 끝에 드디어 낙이 오니, 이제부터는 그간 모은 힘을 겉으로 투사해 나갈 때였다. 이야기 중에 가장 맛있고, 가장 속이 시원한, 금의환향.
“창천위사-!”
“천마도래!”
누군가가 외친 선창에 이어, 수십의 후렴이 뒤를 따랐다.
자왁. 자왁. 자왁. 자왁.
무거운 발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땅에 진동을 일으켰다.
“창천위사-!”
“천마도래!”
드드드득.
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도합 서른일곱 명.
구웅. 구웅. 구웅! 구우웅!
하나의 엇갈림도 없는, 옛 천마신교의 최정예가 천무학관의 정문 앞에서 기세를 피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