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새로운 어둠 (1)
크르륵. 크르르륵.
거친 숨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사자처럼.
일부러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라 그저 목을 통과하는 공기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고, 또한 장소가 장소였다.
똑. 또옥. 퐁!
지하의 종유 동굴.
습기가 많고 서늘한, 깊은 동굴 특유의 청량한 공기.
천정에서 송곳니처럼 내려온 종유석은, 천혜의 자연 동굴 특유의 것이었다. 그 광대한 너비와 크기는 결코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동굴 일부에는, 분명히 한쪽이 깊이 베어 먹힌 듯한 흔적이 있었다.
흐르르륵. 그르륵. 크르르르륵.
깨져 나간 조잡한 곡괭이.
여기저기 상처 입은 석회암의 벽.
크르륵. 크르르륵…….
거기서 잠든 생명들의 수많은 코골이 소리는 주변에 온통 메아리쳐, 사자들의 헐떡임처럼 들렸다.
-부콰악!
일어나라고, 뜬금없이 누군가가 명령했다.
즈르륵.
그에 여기저기서 번뜩번뜩 뜨이는 눈동자들.
사위는 횃불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지금 뜨이는 눈동자들은, 그런 인공적인 빛이 없이도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슈우욱.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종유 동굴 안의 미미한 인광만으로도 주변을 볼 수 있도록.
둘러보면 다 같은 형제들. 초록 피부(Green Skin)의 동족들이었다.
-카루욱!
움직여라. 그렇게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에 초록빛 얼굴들이 갸웃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명령인데, 뭔가 따르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게 좀 이상했다.
“우그으…….”
그린스킨들에게 상위종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듣는 순간 일절의 의문도 없이 바로 따라야 하는 강제력이 존재한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헐거웠다.
인간으로 치자면 뭐랄까, 같은 옷, 같은 몸, 같은 얼굴을 가졌는데.
목소리만 앵앵대는 모기처럼, 힘 하나 없는 이가 명령하는 경우랄까.
“그아우…….”
너 뭐냐. 하는 말이 어색했다.
오크.
엘프와는 다른 형태로 신록의 생명을 이은 존재들은, 개체가 곧 단체이며 단체가 곧 하나다.
오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전사 오크이며, 전사 오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족장뿐이다.
그래서 전사 오크는 괴리감을 느꼈다.
힘? 있었다. 자신보다 분명 강했다. 하지만 위압감? 존재감? 그런 것이 없었다. 아니, 부족했다.
원래라면 사납게 헐떡거리며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버릴, 그런 사납고 짐승 같은 야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다시 오크 전사를 되묻게 만들었다.
“그아우-!”
너 뭐냐고. 동시에 네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그의 피에 흐르는 인자가, 복종을 거부하고 거역을 하게 만들었다.
부우웅. 퍽!
그다음에 이어진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턱. 데구르르륵. 촤아아아…….
머리를 잃은 오크 전사의 목이 피 분수를 뿜어냈다. 상위종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그린스킨은, 당연히 목숨을 빼앗겼고 그 몸 또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콱. 찌이익! 으지지직!
쓰러진 오크 전사의 몸을, 날카로운 송곳니가 물어뜯었다.
우걱우걱. 으지직. 꿀꺽.
한 입에 한 줌 씩. 씹지도 않고 삼키는 그 모습은, 주변의 수많은 그린스킨들에게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폭식이라는 이명의 존재를.
우적우적. 우적우적. 끄지지직.
희끄무레한 인광 속에서, 오크 전사의 몸을 꼭꼭 씹어 삼킨 그린스킨은 꺼억, 하고 더러운 트림을 토해 냈다.
그리고.
“카루욱!”
눈을 번뜩이며 아까와 같은 울림을 토해 냈다.
같은 소리, 같은 울림이건만 그 안에 실린 무게는 조금 전과 달랐다. 그 때문인가. 작고 비실비실한, 상대적으로 약한 그린스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으으.
키케켁…….
고블린. 떠돌이 오크. 무리의 피라미드 가장 말단에 처하는 이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동굴 안으로 움직였다. 그 수는 제법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 움직이지 않는 그린 스킨들이 더 많았다.
카루욱!
그아우!
움직여라! 너 뭐냐! 하는 두 울림이 동굴 안으로 안으로 퍼져 갔다. 그리고 이어진 일은 아까와 같았다.
퍽! 파각! 데구르륵.
촤아아악. 철퍽. 철퍽.
목이 날아가고, 머리를 잃은 몸이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고.
우그적. 우그적. 아작. 아작.
피와 살은 물론이고 뼈까지 통으로 씹어 삼킨 거대한 그린스킨.
카루욱!
그아우…….
퍽! 퍽! 퍽!
반발하는 하위종들은 차례차례 상위종에게 처단당하고, 다음으로 포식당했다.
그 수가 열둘을 넘어갈 때쯤.
카루욱!
크우우. 크륵…….
오크 전사급 그린스킨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여 마리의 동족들이 살해당하고 잡아먹혔지만, 그들은 오히려 ‘아, 이제 좀 말이 통하시네’ 하는 태도였다.
오크. 그저 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존재답게.
“역시. 시작부터 쉽지는 않군.”
쿨럭쿨럭.
피를 토해 낸 늙은 트롤은 거의 회색이 된 얼굴로 신음했다.
옷가지 대신 주렁주렁 몸을 가린 온갖 주술 물품들은, 푸른빛을 띠는 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점점 성장에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일단 콥스(Coprs)들은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혹, 달리 광증(Blood Lust)은 느껴지지 않나?”
“아직은 그런 것 없습니다.”
콥스.
노예, 혹은 잡부를 말하는 단어다.
오크는 태생이 전투 종족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오크가 똑같은 등급의 전사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애초에 오크 부족장이나 오크로드도 태어나지 못 했을 터다.
“시체나 짜깁기 하는 놈들하고 손을 잡을 줄이야. 생각도 못 했군.”
실로 치욕스럽다는 듯 트롤 주술사가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적응할 것이니, 그리고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니.”
마나쉬.
이 동굴 안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새로운 오크로드.
그는 차분한, 그래서 오크답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제고 진정한 오크의 궁극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였다.
바로 차분함.
인내를 모르는 종족 오크 중에서, 인내를 가지고 태어난 천재가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 싸움에 임해 날짜를 살핀다면.”
겉모습만으로는 딱히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살이 두툼한 뚱보 오크.
우적우적.
하지만 그는 쉼 없이 먹고 씹었다. 출렁이는 살과 살이 튼 자국은, 최근에 급격히 일어난 변이와 성장의 흔적이었다.
“우리는 나이테를 살필 겁니다. 50년. 100년. 꾸준히 먹고 기르며, 몸집을 불리는 것이니.”
오크는 인간과 종이 다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해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오크는 처음 시작값부터 강인했다.
5년.
새끼 오크가 성체로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인간이 이제 겨우 일어나 뒤뚱뒤뚱 걸어다닐 시기에, 오크는 고블린을 생으로 찢어 삼킬 수 있게 된다.
10년.
오크가 전사로, 그것도 베테랑급 전사가 되는 시간이다. 죽지만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게 된다.
먹고 자고 싸우고, 또 먹고 자고 싸우는 오크.
그들에게 내려진 강한 생장력은, 그 자체로 권능이라 할 수 있다. 오크는 강하지만 그건 외부의 물리적인 부분만 말하는 게 아니다.
내부의 소화력. 먹을 수만 있다면, 썩은 고기나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어지간한 병은 걸리지도 않는 튼튼함이 오크의 강점이다.
15년.
인간이 한 사람 몫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대개의 경우, 인류는 열 다섯 정도에 성인식을 치른다.
2차 성징. 여자애는 가슴이 봉긋해지는, 남자애는 하체가 불뚝거리는 시기다. 이르지만 번식이 가능해지고, 기력이 끊이지 않아서 끊임없이 달린다.
스물. 스물 다섯.
성인으로 인정받고도 인간의 육체는 더욱 성장한다. 서른에 달해야 성장이 멈추고 후대를 준비한다. 또한 드물지만 혹자는 이때부터 탈 인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무공의 고수. 혹은 마법의 익스퍼트 등.
수는 적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는 초인의 반열에 들려면 최소 30년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크에게 20년, 30년의 시간은.
적게는 수백, 많게는 천에 달하는 무리를 지을 수 있고, 중소 규모의 부락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의 편.”
인내를 가진 오크는 이제까지 드물었다. 그들은 굳이 인내할 이유가 없었다.
인간이 몸이 충분히 강했다면,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그런 오만이 오크 종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의 오크. 계속 뭔가를 우물거리며 먹어 대는 오크는, 이제껏 발현할 필요가 없었던 특이점을 가진 오크였다.
“급하게 가지 않습니다. 기다립니다. 세월을. 시간을.”
30년, 40년, 50년이 지나고 나면,
오크의 숫자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해 있을 터였다.
그들에게 지워진 천형(天刑). 조급함을 조금만 참아 낼 수 있다면, 오크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도 남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을 이 오크는 잘 알고 있었다.
-쿠르아악!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에 초록빛 동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깡! 깡! 깡!
땅을 파고 돌을 캐는 건 그린스킨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작은 개체인 고블린만 해도, 그 행 반경이 주로 땅속의 굴일 정도다.
인간과 비교해 보면, 전원이 광부이고 노동 인력이다. 밀어 넣으면 넣는 대로, 돌을 깎아 먹는 것처럼 우루루루 파낼 수 있다.
깡! 깡! 콰지직!
“…끼이익?”
물론, 그 장비는 열악하고, 기술은 터무니없이 조잡하다. 돌을 깨다 말고 부러진 곡괭이를 들고, 고블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파묻혀 버렸다.
쿠드득. 과르르르륵!
낙반 사고. 제대로 된 지지대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파들어 간다고 해서 그 굴이 든든하게 버텨 줄 리가 없다.
갱도는 10미터만 파고 들어가도, 돌들 사이의 균열을 버티지 못하고 인부들을 파묻어 버렸다.
끼르끼르! 깨개객!
우드드드드득!
애초에 천연의 종유 동굴은, 그 자체가 석회암. 물에 잘 녹고 부스러지기 쉬운 암반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충격이 가고,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면 무너질 수밖에.
크워우!
하나 상관없었다. 고블린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든 말든, 오크들은 두툼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등을 떠밀었다.
그걸로 말을 듣지 않는 놈?
콰드득! 으직으직!
깨개객!
그냥 잡아 죽여서 뜯어 먹으면 그만이다. 반항하던 소리는 금방 잠잠해졌고, 멈춘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다.
깡. 깡. 깡.
퍽. 퍽. 퍽.
죽으면 끌어내고, 묻히면 파낸다.
부상자 수습? 매몰 사체 수습? 그런 건 없다.
암반에 깔려 곤죽이 된 고블린의 다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콥스 오크가 흙과 자갈을 자루에 짊어지고 나갔다.
말 그대로 물량 공세.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체계를, 그린스킨들은 진행할 수 있었다. 깨끗한 물도, 든든한 음식 없이도, 마치 돌과 흙을 파먹어 가듯 캐 나가는 광부 부대들.
그르륵. 그르르륵.
공사는 순조로웠다. 그들이 이어 나가는 길은, 깊이 1킬로미터 아래로, 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앞으로 사흘…….”
바로 천무학관.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의 둥지로 알려진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