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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96화 (297/310)

296화. 새로운 어둠 (2)

깡. 깡. 쾅. 우르르!

수를 셀 수 없는 그린 스킨들이 움직인다.

거대한 동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크들. 초록빛 물결은 한도 끝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주변에 인간의 탐색자들이 있었다면, 기겁해서 특급 경보를 전파했을 정도로.

쿵. 쿵. 와그르르르.

녀석들은 하나같이 제 몸집만 한 자루를 짊어지고 있거나, 아니면 저보다 더 커다란 광차를 밀고 있었다.

동굴이 꾸역꾸역 토해 내는 토사. 그리고 자갈과 돌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산 하나를 깎아 내는 중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

입구 주변은 이미 토사로 이뤄진 작은 동산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굴이 뱉어 낸 다음 토사는 한참이나 멀리까지 밀거나 끌고 가야만 했다.

털썩. 털썩. 기르르르…….

멀리다 토사를 쏟아붓고 헉헉대는 그린 스킨들.

체격으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이들은 제대로 된 전투 부대가 아니었다. 움직이는 그린 스킨 중 반은 고블린이고, 나머지 반은 오크들은 떠돌아다니던 잡졸 출신이었다.

“흐음. 무럭무럭 크고 있군.”

다만 눈에 띄는 것이라면……. 점점 오크들의 덩치가 커지고 있다는 것.

처음에는 말이 오크지, 고블린 비슷하게 약해 빠진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동굴에 들어가서 토사 자루를 끌고 나올 때마다, 녀석들의 덩치는 한 뼘씩이나 커졌다.

이유는 고블린이다. 오크들과 함께 들어간 다른 그린 스킨들은 나오는 숫자가 확 줄었다. 열이 들어가면, 다섯이 나올까 말까 했으니 말 다 한 거다.

“비결이 뭔가? 마니쉬.”

지팡이를 짚고 선 트롤이 턱을 쓸었다.

그랜드 샤먼 지르케.

“별것 없습니다. 잘 먹이고,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걸 반복하면 힘이 생기는 거지요.”

“흐음. 기본에 충실한 조련술이군. 하지만 기본만으로 이 정도로 성과를 보이기란 쉽지 않은데. 아쉽군. 잠재력이 있는 군세인데.”

“저도 그게 아쉽습니다.”

마니쉬. 새로이 각성한 오크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오크 로드의 힘은 무리에서 나온다. 무리의 덩치가 커지고, 병력의 질이 높아질수록, 로드는 더 큰 힘이나 혹은 권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라도, 같은 동족들이다. 이제 겨우 날개를 뻗기 시작하는 부하들인데, 곧 소모당해야 하니 아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고블린들이 도망치려 하진 않던가?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고?”

“고블린이 말입니까.”

마니쉬의 얼굴이 잠시 흐물흐물해졌다. 웃는 것이다.

트롤이나 오거와 달리, 오크와 고블린은 동족 포식을 한다. 같은 종족을 잡아먹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오크에게 동족 포식은 일종의 장례문화다.

강한 전사가 죽으면 그를 기억하려고, 혹은 그의 강함이 자신에게 남겨지기를 기원하는 그런 문화에서 출발했다.

반면 고블린은 애초에 서로를 잡아먹는다.

고블린을 가장 많이 먹는 것은 트롤도 오거도 아닌, 같은 고블린이다. 늙은이, 다쳐서 약해진 이는 말할 것 없고, 애비가 배고프다고 제 새끼도 잡아먹는 종이 이들이다.

오죽하면 그린 스킨들 사이에서 ‘고블린 같은 놈’이란 말이 최악의 욕으로 쓰일까.

그러다 보니 고블린은 오크가 동족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딱히 연민이나 반감을 품는 일은 없다. 그냥 일상이니까.

“불만을 가진 놈들이 있기는 합니다. 자원 소모가 많고 비효율적이라고.”

“…자원? 비효율? 고블린이 그런 말을 한다고?”

트롤 주술사의 입이 벌어졌다.

“들어 보면 웃으실 겁니다. 반짝이는 철을 소모해서, 왜 가치도 없는 돌을 캐느냐고. 아깝다고 그러더군요.”

“허!”

고블린. 그린 스킨계의 까마귀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반짝이는 것들을 모으기를 좋아한다.

철도 일단 금속이다. 잘 닦으면 반짝이는 것이니, 귀해 보일 터. 빈약한 고블린의 지능으로서는, 이 토목공사가 자원 낭비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문제는 이 덜떨어진 것들이, 의욕이 있고 없고에 따라 활동량이 달라진다는 것.

말을 물가로 끌고 가는 거야 채찍만으로도 된다. 하지만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채찍으로 할 수 없는 문제.

되도 않는 잔꾀를 부리며 게으름을 피는 놈들이, 수만, 수십만에 달하면, 일일이 때려잡으며 강제하기 어렵다.

결국 어떻게든 살살 달래 주어 노동 의욕을 끌어올리는 것이 방법인데. 대체 무슨 수로?

“녀석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해 줬습니다. 저 멀리 인간의 둥지가 목표라고,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집과 보석으로 만든 도로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믿던가?”

“믿더군요. 그걸.”

“커커커커!”

트롤 주술사는 정말로 웃고 말았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많아서 썩어 넘친다 해도, 인간이 황금으로 집을 지을 리 없다.

금은 무겁고 물렁물렁한 데다, 단열이 안 되는 금속이다. 건축 자재로는 최악이다. 보석으로 깔린 길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

금과 보석을 산나물처럼 캐내는 드워프도, 그런 말을 들으면 돌았냐고 할 지경이다. 하지만 고블린은 애초에 이치를 따지는 지능이 없었다.

“강한 인간이 있어서 싸우러 간다고 하니, 강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보물도 많을 것이라고, 적당히 흘리기도 했고요.”

“오호. 고블린의 기준에 맞춘 말이로군.”

고블린들은 무리 중에 가장 강한 녀석이 가장 많은 반짝이-금을 가진다. 그러니 인간도 그러리라 여긴 것이다.

강한 인간들의 둥지 = 엄청나게 많은 금붙이들이 있는 곳. 이런 기적의 논리가 만들어졌다.

“의심하지는 않던가? 기껏 찾은 황금의 동굴을 오크들이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법한데.”

“그렇지 않아도 의심하더군요. 오크는 싸움을, 명예를 탐하지 금이나 보석을 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믿던가?”

“안 믿더군요. 몇 번을 말해도. 좋은 무구는 모조리 오크가 차지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겨우 믿는 눈치였습니다.”

“…정말이지 훌륭한 오크 로드야. 자네는.”

트롤 주술사는 감탄했다.

보통 오크 로드는 압도적인 힘이나, 권능으로 찍어 누르는 식으로 불만을 으스러뜨려 통치한다.

폭력과 공포는 쉽고 간편하며, 오크의 본능에 부합하는 도구다. 하지만 마니쉬는 그런 폭정에 더해, 교활함까지 갖춘 오크 로드였다.

말을 할 때 듣는 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는 것은, 지능과 노력. 둘 모두가 있어야 가능하니까.

“저 쿠아토가 마니쉬 자네의 그릇, 그 반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내가 그렇게 대립 각을 세울 일도 없었을 텐데.”

“…….”

마니쉬는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노랗게 번들거리는 눈을, 지르케는 보지 못했다.

“흠… 훌륭해. 믿음직해. 어쨌든 이번 공습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네. 이유는 알고 있지?”

“넘치는 심장 말씀이군요.”

마니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넘치는 심장. 그린 스킨들 중 특히 오크의 생장력에 강한 힘을 부여해 주는 종족의 신물.

아락취. 4대 수호장 중 하나인 전설적인 오크가, 리치왕의 도움을 얻어 오크 종 전부가 활력을 얻을 수 있게 내려준, 말 그대로 신물이라 할 수 있는 목걸이다.

모종의 사고 후 꽤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 홍매학관을 붕괴시키면서, 그 신비한 목걸이의 위치가 다시 파악되었다.

천무학관.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의 심처로.

“자네들의 역할이 중요하네. 전투는 켈베로스 님과 찰레스 님이 맡으실테니, 지하 통로의 확보에 만전을 기해 주게.”

“켈베로스 님까지 나서십니까. 그분은…….”

“진형이야 어쨌건, 출신은 우리와 같은 그린 스킨이시니까.”

천무학관. 인간 측 최후의 보루.

대외적으로 인간이 수비하는 전력 외에도, 리그웨더의 마법으로 대단위 결계와 함정이 더해진 요새.

아무리 투지가 넘치는 오크라 해도, 그 벽을 넘어 진군하려다간 지역군을 다 때려 부어도 녹아 버린다.

“땅굴의 유용함은 홍매학관에서 증명된 바 있지. 욕심 부리는 바람에 쿠아토가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켈베로스 님까지 힘을 써 주신 덕에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네.”

켈베로스.

그는 리치왕의 또 다른 수호장, 링가드의 오른팔이다.

오크를 기반으로 한 키메라에, 아크 리치의 술수가 더해진 희대의 걸작.

자그마치 ‘몬스터 로드’라 불리우는 그는, 인간 기준에서 자그마치 위험 15등급의 재앙이다.

폭식의 쿠아토가 죽으면서, 오크들의 신물인 ‘넘치는 심장’에 대한 논의가 오갔는데 그 와중에 켈베로스, 그가 천무학관 탐지에 몇 달이고 달라붙어 시간을 쓴 덕이다.

“아무리 골드 드래곤이라 해도, 지하에까지 방비를 갖추지는 못한다는 것. 혹여 본신이 자리에 있다면 몰라도, 정작 결계의 주인인 리그웨더는 무림맹에 갈 예정이지.”

사흘 뒤.

엉덩이가 무거운 골드 드래곤이 무림맹-학관대연합의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안건은 바로 인류 대동맹.

얼마 전 있었던 필드 레이드 파티를 계기로, 리그웨더는 기존의 느슨하던 연합 체제를 공고히 하고, 대몬스터 전선의 단결력을 늘리기 위해 회의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건 켈베로스가, 몬스터 로드의 권능으로 집요하게 살핀 끝에 얻어 낸 정보다.

“전서구를 통한 기생체는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실패했지. 하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았네.”

당시 켈베로스는 천무학관 안에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가 추가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정체를 캐기 위해서라도 계속적인 시도를 계속했고, 기어코 골드 드래곤의 요새 안에 수십 마리의 패러사이트를 심어 넣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 매개체는 쥐.

땅굴을 파고 움직이며, 그 수가 너무도 많은 쥐.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라면, 음식 찌꺼기를 노리는 쥐들이 당연히 있게 마련이고, 천무학관의 지하를 통해, 최소 수십, 어쩌면 수백만에 달하는 생명체들이 움직였다.

아무리 리그웨더라 하더라도, 저 많은 쥐들에게까지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고, 결국 몬스터 로드는 바늘구멍처럼 작은 틈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철옹성이라 불리던 천무학관 내부에, 지금도 확실한 정보망을 건설하는 중이라는 말에 마니쉬는 끄덕였다.

“쥐라니… 재미있군요.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마니쉬가 하는 말에 지르케가 웃었다.

“자넨 참 인간의 말을 자주 쓰는군. 사실은 속내는 인간이라던가, 그런 거 아닌가?”

“약한 주제에 누구보다 위협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충분히 흥미로우니까요. 당장 우리 모두의 위대한 존재께서도 출신은 인간이시지 않습니까.”

“…흐음.”

지르케의 얼굴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리치왕만 하더라도, 원래는 일개 인간의 마법사였다.

지금에 와서는 도대체, 원래 인간이었다는 것이 상상도 가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되어서, 평시에 잊어 먹고는 있지만.

“그분을 그냥 인간과 비교할 수야 없지 않나.”

“그렇지요. 오크가 다 오크 로드가 아닌 것처럼, 모든 트롤이 다 지르케님처럼 대주술사가 아닌 것처럼.”

“…말로는 못 당하겠군. 여하튼 전력을 다해 길을 열게. 자네들이 실패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게야.”

지르케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휘말리는 느낌 때문이었다.

“찰레스 님과 켈베로스 님 말씀이지요.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두 분이 문제가 아닐세. 자칫, 이번에도 패퇴를 맛보게 되면…….”

카우욱! 우르르륵!

동굴은 그 동안에도 꾸역꾸역 오크와 토사를 토해 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언덕이 자라나는, 초록의 물결을 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화가 난 뼈다귀 놈들이 ‘저주받은 성배’를 쓰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런 일은 없어야지.”

언데드. 죽은 자들의 군단.

같은 몬스터 군단이라고 해도, 지르케는 일단은 살아 있는 쪽이었다.

같은 리치왕 휘하의 부하들이라고 해도 죽어서, 이성 없이 딱딱거리는 뼈의 무덤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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