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새로운 어둠 (3)
“그럼, 잘 부탁합니다.”
탁. 풀썩.
리그웨더가 서류를 받쳐 놓으며 말했다.
“예, 잘 다녀오십시오.”
구용천이 한 무더기의 서류를 받아 들었다.
오랜만에 리그웨더가 무림맹으로 발길을 향할 일이 생겼다. 목적은 정식으로 항구적인 단체를 발족시키는 것.
인류연합.
이제껏 여러 번 입에 올랐지만, 오르기만 했을 뿐 실제로 진행되지는 못했던 주제다.
중원의 학관연합을 필두로 하여, 맹과 지방 세력, 새외와 멀리 서역까지 전력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
한때는 거의 체결 직전까지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했었다. 바로 대격변의 날 근처.
리치왕의 휘하가 세상을 휘두르고 다니던 그때는, 어떻게든 뭉치는 시기였다. 분열된 상태로 체계적인 적을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로지 그때뿐.
최초의 반전을 성공시키고 난 후, 일주일이 지난 뒤 거짓말처럼 연합은 내분에 휩싸였다. 너무 빠르게 축배를 들어 올렸다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기억이 돌아간 구용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학과장님. 이게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멸망의 위기를 앞두고도, 아니, 겪어 보고도, 힘을 하나로 뭉치고 통합하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까요. 자기 가족이, 가문이, 위험할 때는 다 함께 힘을 모으자고 주변에 외칩니다. 하지만 자기네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면…….”
스윽스윽.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구용천.
그는 인간이라는 자기 종족 전체에 피로해진 얼굴로 말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교무처장님.”
리그웨더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드래곤. 인간 개체의 감정까지 읽기는 힘들다. 천 년 단위로 오래 사는 존재이기에, 개개인의 마음은 너무 작고 많은, 흡사 개미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돋보기처럼, 일단 이해할 수 있는 테이블 위로 올려 두면 그녀는 그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는 그게 오히려 이 세계 인류의 장점이자 강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장점이란 말씀입니까? 이렇게 사분오열 쪼개져서 흔들리는 것이?”
“네.”
구용천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에, 리그웨더는 끄덕였다.
“하나로 뭉치지 않았다는 말은, 제각각 자신들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저 천무학관이 고삐를 쥐고 있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그리고 극단적인 가정으로, 제가 통합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교무처장께서도, 또한 다른 분들도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심을 제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
구용천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하지만 제가 겪어 본 바로는,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교무처장님, 큰 위기 앞에서 단결하여 하나로 뭉치고, 모든 힘을 통합해 내는 경우도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경우를 꽤 많이 보았지요.”
“그러… 십니까?”
“네, 제가 있었던 그라나다 대륙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때 인간이었다면, 아마도 한숨을 쉰 다음 먼 곳을 보는 눈이 되었을 것이다. 감정이 압도하니까.
물론 리그웨더도 어느 정도 감정이 몰려오는 것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어쩌면 같은 인간이 아니라, 종이 다르기에, 멀리서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일까.
“용사가 나타나고, 신탁이 내려오고, 대륙에 온갖 징조가 있었지요. 그래서 인류 대통합 같은 과업이 성사됩니다. 하지만 그게 끝까지 이어진 경우는 손에 꼽았었죠.”
“어째서…….”
“대개의 경우, 마지막 고비인 마왕 토벌을 앞두고, 갑자기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더군요. 결국 최후의 과실을 눈앞에 두고도 얻지 못했지요.”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빠른 수확은 결국 익지 않은 곡식을 거두어 농사를 망칠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스러져 가는 목숨들은 안타깝지만, 그들을 위해서 빨리 움직이면, 그 후대가 언제고 대가를 치를 뿐이다.
그런 역사의 반복을 리그웨더는 겪었다.
“신이든, 용사든, 혹은 드래곤이든. 외부에서 입김을 불어넣으면 인간은 오히려 내심 분열하고 반발하더군요. 교무처장님 말씀대로 어쩌면 그것이 본성일지도요.”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본성을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번만큼은, 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래곤이 도우고. 신이 개입하고.
그런 절호조의 기회에서, 마왕의 토벌을 최후에 실패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던 것을, 어정쩡한 ‘봉인’으로 마무리지어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같은 일이 여러 번 이어지자, 리그웨더는 오히려 개입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차라리 인류가 모든 힘을 다 모아서 썼다면,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었을 상대를, 괜히 외부의 입김으로 그르친 것이 아닐까 하는.
불만을 내심으로 남겨 놓은 상태에서, 마지못해 잡은 손은 언제든지 도로 놓쳐 버릴 수 있다.
“리치왕. 그 존재만큼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한 세계를 우습게 멸망시킬 힘이 있는 존재.
당장 그녀의 세계 그라나다를 잿더미와 뼈들만 남긴 채 불태워 버렸다.
그렇기에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토벌.
반드시 성공해야 했기에, 그녀는 기다렸다.
대격변의 날 이후 140년을.
인간들이 저 재앙을 자신들의 일로 받아들이고, 누대에 걸쳐서 충분한 논의가 오가서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이제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에 답답한 것은 우리만이 아닐 겁니다. 무림맹도, 지방의 유력가들도, 이제는 천천히 마음을 먹을 때가 되었을 겁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시는지…….”
“바로 구옥경.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번에 나타난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
구용천의 얼굴에 다시 잠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마교.
한때 무림맹의 주적.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이들. 대격변의 날에 본산이 궤멸당하여, 그간 쇠락했다고 여겨진 이들은 근자에 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회회리라는 잿더미 위에 다시 기반을 쌓고, 천무학관과 인근 주변의 여러 세력에 철물을 수출한다.
또 사람을 모으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새로운 무공-마공-을 알리며 협조할 사람을 구한다. 그렇게 손을 잡는 이들 중에는, 사천 제일상단 오가장도 있었다.
이쯤 되면 창립 이후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정도다.
“인간은 분열이 쉽지만, 동시에 서로 경쟁도 하니까요. 교무처장님께서 하시는 생각을 다른 학관에서도, 또 타 유력가에서도 동시에 할 겁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자극, 을 말씀하십니까?”
리그웨더의 말에 구용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질투와 경쟁의식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단독 세력으로서는 중원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천무학관에서도, 마교의 새로운 비상은 호승심과 승부욕을 가질 정도다.
그럼? 옛 역사에서 마교와 사이가 나쁘던 다른 곳에서도, 당연히 비슷한, 어쩌면 더한 위기의식을 가질 수 있을 터.
“그러고 보니 말인데, 구옥경 교두, 아니, 천마신교의 내공심법은 어떻다던가요?”
“아… 예. 역혈신공을 주로 해서 특이한 내공 몇몇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생각 외로 정파의 내공과 무리 없이 잘 섞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무적인 이야기군요. 그럼 수렴되는 결과를 종합해서, 이번 무림맹 회의에서 공조하도록 합시다. 실질적으로 전력 상승을 시킬 수 있다면 기원이 마교이든 어쨌든, 그쪽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구용천이 탄복했다. 이제 보니 리그웨더가, 이유도 없이 옛 마교의 세력을 지원해 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천마가 협력하면서 얻게 된 마공, 천마신교의 몇몇 신공은, 천무학관에서도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정도문파의 심법과 더불어,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종류의 마공도 있으니, 옛 정도 무림맹의 계승을 주장하는 문파들도 무턱대고 배척하기엔 아까울 것이다.
무인에게 정통성과 상징성은 분명 중요하지만, 결국 그들을 끌어올리는 근원적인 바탕은 결국 ‘힘’이니까.
특히 순수에 매달리는 종파가 아니라 실리를 따지는 이들. 지역 토호나 군벌. 혹은 대륙전장 같은 다소 개방적인 상회의 세력이라면 더더욱 그럴 터.
“마음 같아서는 신교의 교주. 그를 무림맹 회의 때 동반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그건…….”
구용천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리그웨더의 노림수를 생각해 본 그는 곧 입가가 씰룩 올라갔다.
“맙소사……. 현경에서 노닥거리고 계시던 어르신들이 엉덩이가 뜨겁겠군요.”
탈마의 경지. 정파 무공으로 치면, 현경에 달한 새로운 고수의 등장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미 화경을 넘어서서, 현경의 수많은 벽을 깨느라 고심하고 있던 정파 무인들에게, 소문으로만 듣던 탈마에 오른 마교 교주란 놀라운 소식일 터.
“어쩌면… 속세를 뒤로하고 심산유곡에 은거했던 노고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던가요. 꼭 천무학관만이 인류연합의 중심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리그웨더가 딴에는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명예를, 상징을, 자신들이 가져가길 원하는 단체는 많습니다. 인간들 중 절대다수의 학관이나 무인 세력이 그렇지요. 그러니 명예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명예를 던져 주고, 실리를 원하는 이들에게 실리를 던져 주면 됩니다.”
“그러면…….”
“어쨌든 결과는 나오겠지요. 항구적인 평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뿐입니다.”
인류가 하나로 뭉쳐서 리치왕과 그 휘하 세력을 타도할 수만 있다면.
그 과실을 천무학관이 굳이 독점할 이유가 없다. 명예도 권력도 주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세상의 평화만 가져올 수 있다면.
찍찍!
“이런… 어째 말하기가 무섭게 쥐들이 들끓는군요.”
문득 땅 아래에서 작은 기척 여럿이 움직였다. 구용천은 실례, 하고 말하고는 가볍게 바닥을 디뎠다.
드드득.
침투경으로 밀어 넣은 내력이, 가볍게 땅을 울렸다. 아마 저 아래서 움직이던 작고 지저분한 것들은 곤죽이 되었으리라.
“요즘 들어 쥐들이 많군요.”
“예, 이번에 연거푸 비가 많이 오는 것이, 굴에 물이 찼던 모양입니다.”
리그웨더는 덤덤했지만, 오히려 구용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자든 여자든, 무인이든 아니든, 축축하게 물에 젖은 시궁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법.
“…….”
“학과장님?”
“아니, 아닙니다.”
묘하게도 리그웨더는 잠시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신색을 되찾고, 구용천에게 말했다.
“그럼 다시 부탁드리지요. 마교의 마공에 대한 정리와, 한동안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학관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든든하게 지키고 있겠습니다.”
파라락. 척.
한 묶음의 서류를 다시 정리하며, 구용천은 환한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