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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98화 (299/310)

298화. 새로운 어둠 (4)

“하수의 상태는 어떠한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날씨가 날씨인 터라……. 나이 든 노인들은 자칫 둑이 터질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쥐 수염이 난 책사. 권열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늘도 무심하시군. 이놈의 비는 대체 언제 멎으려는지.”

회봉왕 주원.

옛 명조의 피를 이은 이는, 쟃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솨아아아아.

장마철이 이미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줄기줄기 뿌려 대는 비.

이제껏 늦은 장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시기의 빗줄기는 명백히 이상했다.

회봉왕이 기치를 세운 이 땅은, 원래 기후가 따스하고 장강의 풍부한 물을 근본 삼아 이모작- 일 년에 농사를 두 번 지을 수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비 때문에 논의 물이 넘치고 자잘한 수해가 나니, 이러다 자칫 곡식을 산출하던 옥토를 망칠 지경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신위병들을 동원하도록. 외부로 돌렸던 인원들은 최대한 빨리 복귀하게 하고, 추가 지출은 막도록 해. 자칫 둑이 터지게 되면 이 땅의 많은 생명들이 위태롭다.”

“명 받드옵니다.”

신위병. 회봉왕 직속의 무인들로, 학관이나 무림맹에서 경력을 쌓은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옛 명조 때라면 금의위나 친위대 역할을 맡았을 부대. 본래라면 출신부터 가려서 뽑았을 주요 전력이다.

물론 세상이 여러 번 뒤집힌 지금에 와서는, 가문이 어쩌고 조상이 어쩌고 하며 문턱을 좁힐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명 황실의 기틀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회봉왕 본인부터 따지고 보면 얼자의 태생이니까.

그런 만큼 덕분에 생각에 유연성이 있었다. 친위대는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왕실의 위엄을 만방에 보이는 목적 또한 있다,

그런 고급 인원을 고작 강둑 보강에 투입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전조-명나라-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자도 필요하겠지. 주변 상단에 전갈을 보내게. 토목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죄다 사들이거나, 놀고 있는 이들을 역꾼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음…….”

사각. 사각.

회봉왕은 빈 종이를 들어 바쁘게 몇 가지를 써 내렸다. 말을 하다 말고 뭔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외부를 들이기 이전에 내부부터 확실히 해야겠지. 큰 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쉬고 있는 백성들이 있을 것이다. 강역 내에 관리들을 돌리고, 세수와 노비 문서를 찾아 노동할 인원을 확인하도록.”

“부역을 명하시렵니까?”

“그래야지. 하나 징발은 아니 된다.”

사각사각.

회봉왕은 종이에 몇 가지를 더 적었다.

“내탕금에 남은 재물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도록. 동원하는 백성들에게 하루 밥값이라도 나눠 줄 수 있도록 해야한다.”

“저, 전하……. 그랬다간 국고의 지출이 막대할 것이옵니다. 이제 겨우 세수를 회복하고 있는데…….”

“그 세수가 자칫 뿌리부터 뽑힐 수 있게 생겼어. 그리고 내탕금이라고 하지 않았나. 재물과 인력을 아끼지 말고, 수해를 방비해야 해.”

책사의 부정적인 말에도 회봉왕은 거침없었다.

역사적으로 왕조가 망하는 데에는 백성들의 피폐함이 원인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들고 부역으로 고생시키는 것.

“맹자 왈, 나라를 유지하는 근간은 신뢰라고 하였지. 그게 무너지면 군대가 있어도, 먹을 것이 있어도, 스스로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백성들이 미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며 들어가는 돈을 줄이려면, 당장은 무급으로 백성들을 끌어모아 일하게 만드는 게 손쉽다.

하지만 그 부담. 배를 주려가면서 세금을 내고, 거기에 몸이 부서지는 부역까지 하게 되면, 먼저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다음으로는 몸이 떠난다.

그게 유민이 되든, 죽음이 되든 간에.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한다. 이 나라는 그것이 상식이 되어야 해.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만금의 가치가 있다.”

“전하… 참으로…….”

“쓸데없는 소리 말게. 나는 그저 내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할 뿐이니.”

책사의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을, 회봉왕은 코웃음 치며 손을 내저었다.

결국 나라의 경영이란 백성에게 의식주를 마련해 주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 대명 황실의 복원에는 농민의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신위병 같은 무력 단체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계속 유지하려면 백성들이 먹을 것과 재물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와 필지 목록을 가져와 보게. 참. 복구조를 짤 때, 인근을 잘 아는 노인 한 명씩 반드시 넣을 수 있도록. 농지는 군대가 아니라 농부가 잘 아는 법이니.”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열은 회봉왕의 말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분이라면.’

그도 알았다. 회봉왕이 마냥 덕이 높은 성군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야망 가득한 사람이라고 해도, 회봉왕은 기본은 할 줄 아는 군주였다.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막고, 병이나 수해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줄이려고 항시 신경 썼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난세에서는 성군이라 불릴 만했다.

팔락. 팔락. 스으윽.

지역경략은 무릇 우두머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밤늦게까지 마법 등잔을 켜고, 수해 예방과 경작지의 상황을 손수 들여다보는, 회봉왕의 치세는 건전했다.

그는 대명 황실을 복원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날개 아래에 선 백성들은, 그럭저럭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후우우… 이것 참.”

정치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한도 없이 자유롭고, 분주하게 움직이려고 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일이다.

늦은밤까지 서류와 서류를 들춰 보며, 뚱뚱한 몸을 움직이는 그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자가 어마어마하군. 한동안은 긴축재정인가.”

일한 만큼 먹을 것을 준다. 너무도 간단해 보이지만, 이걸 충실히 따른 왕조는 역사에도 몇 없었다.

나라 살림은 보통 빚에서 시작되고, 세금으로 보충하는 법이다. 그런데 빚은 늘어나고, 세금은 줄어들게 생겼다.

이렇게 부족한 돈을 가지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듯, 정신없는 줄 타기를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치다.

“그렇다고 관리들 녹봉을 줄일 수도 없고…….”

희봉왕은 혼잣말을 하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출의 가장 큰 항목은 인건비였다. 특히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녹봉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걸 줄일 수는 없었다. 녹봉이 부족하면, 결국 백성을 털어 먹는 것이 관리다. 때문에 회봉왕의 치세는, 관리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것이 시작이었다.

선의와 도덕만으로 청렴함을 요구했다간, 너 나 없이 죄다 거짓 장계를 올리고 속이리라. 제 주머니를 풍성하게 채워 주어야, 딴 욕심을 품지 않는 게 사람이다.

“군대를 줄일 수도 없는데.”

골치가 아팠다. 권력은 결국 칼끝에서 나오는 법. 왕이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줄어들면, 다른 야심가가 들고일어나리라.

당장 회봉왕 본인이 그러했듯이.

그는 한참을 장부와 다른 서류를 비교해 가며, 놓친 것이 없는지 찾았고, 자신이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동시에 적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좌절을 느꼈다.

“하아… 전하 폐하 소리를 들으면 뭐 하나, 어디 큰 상단에서 돈이라도 빌리고 싶군.”

왕 체면에 돈 빌리는 일이라니. 정말로 억하심정이었다.

하지만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쓸 구멍만 널렸으니, 고개 한 번 숙이는 수치를 감내해야 할 형편이다.

그렇게 그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

“전하.”

“무슨 일인가.”

“사정이 정 어려우시다면, 저희가 월봉을 반납하겠나이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호위로 주변을 지키던 신위병장. 막현이 뜻밖의 말을 해 왔다. 회봉왕은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아니되네.”

풀썩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들은 이 나라에 있는 무인들의 상징이야. 노력하고 능력을 얻으면, 부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지표이지. 그러니 항상 부유하고 미녀를 끼고 살아야 하네.”

“소관은 딱히 욕심이 없사옵니다.”

“아네. 자네가 그런 사람인 걸. 하지만 다른 사람도 그럴까? 신위병 모두가?”

신위병장 막현은 더 오를 자리가 없다. 대장군 같은 새로운 자리 개편이 없는 이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당연히 욕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권세를 꿰찬 젊은 관리들도 그럴까? 무인, 아니, 문무관료 모두를 막론하고, 대개의 경우 능력 있는 사람은 욕심 또한 있는 법이다.

“물질이든 권세든, 욕심은 나쁜 것이 아니야.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니까. 자네도 한참 기량이 늘어날 때는 누구보다 욕심이 컸을 걸세. 그때 갑자기 욕심 부리지 말라고, 윗사람이 자네를 견제하면 기분이 어땠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좋지는 않았겠지요.”

“장담하건대 그 정도가 아닐 걸세. 아주 화가 나고 억압받는 기분이 들걸? 이보게, 자네와 신위병단의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네. 하지만 희생은 자발적이어야 하는 것이야.”

나라가 금전 문제로 허덕여서, 신위병단이 자발적으로 녹봉을 반납한다? 당장은 미담이 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일은 늘 그렇듯이, 누군가에게는 압력이 된다.

국왕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신위병들이 자진해서 자금을 각출하는데, 너는 왜 가만히 있느냐 하는 눈치.

그러니 주변을 의식해서 어거지로 봉급을 나라에 바치고는, 그 손해를 백성들에게서 쥐어짜려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과인의 나라는 범인 범부들의 나라일세. 자네는 무인이라 별개의 인종이지만, 세상은 욕심쟁이, 겁쟁이, 그리고 소인배로 가득 차 있다네.”

“…신료들을 너무 믿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가겠사옵니까?”

“나는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상황을 믿네.”

회봉왕은 딱 잘라서 말했다.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놓고, 사람의 인의에만 기대는 것은 암군이다. 어리석은 자다.

현명한 군주는 현명한 관리를 뽑아 일을 맡긴다지만, 회봉왕이 보기에 그건 대단히 운이 좋은 것.

능력은 있으면서 욕심이 없는 이는 돌연변이나 다름없다. 천리마는 분명 세상에 있긴 하겠지만, 다 모아 봐야 한 줌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찾기 힘든 천리마를 찾느라 세월을 허비하는 것보다, 다소 욕심 있고 어리석어도, 흔히 구할 수 있는 범인들로 국정을 채워, 파열음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낫다.

그런 회봉왕의 생각을 듣고, 막현은 한숨을 쉬었다.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지. 그러니까 왕의 일 아니겠나?”

충신과 능신을 가지고도 하기 힘든 것이 왕 노릇이다. 하지만 회봉왕은 그런 충신 능신 없이 나라를 꾸릴 셈이다. 어지간한 성군이나 할 만한 생각이었다.

“전하, 외람되오나… 정 그러하시다면 도움을 좀 받아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도움? 어디? 누구?”

“천무학관 말입니다. 이번에 인류연합이라는 안건을 가지고 무림맹에서 회의를 연다고 하는데…….”

“…거기?”

살짝 빛을 발했던 회봉왕의 얼굴이 곧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는 성군의 길을 목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야심가였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 야심만만한 패왕의 길을 가려는 그에게, 천무학관이나 무림맹이 주도하는 움직임은 그냥 권력 다툼이었다.

“인류연합? 그거 지난번에 완전히 끝났던 이야기 아니었나?”

“끝났다면 끝난 것인데……. 그렇다고 다시는 언급하지 말자는 발언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학과장 리그웨더는 다시 논의해 볼 이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 다시 논의는 무얼. 이참에 그쪽의 지배력이나 더 올려 보겠다는 생각이겠지.”

회봉왕 주영은 코웃음 쳤다.

“그래도… 저들이 가진 고수와 재물은 진짜이지 않습니까.”

“달란다고 주겠나? 이유도 없이.”

“줄 겁니다. 제가 아는 대로라면.”

막현은 진중한 얼굴로 확신했다.

그는 천무학관 출신이었고, 이후로도 여러 번 천무학관의 행사를 보아 왔었다. 리그웨더는 타산을 안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투자할 만한 대상이라면 금전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무림맹 회의는 이틀 뒤입니다. 거리도 멀지 않지요. 일단 시도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가 아는 리그웨더라면, 회봉왕이라는 인물에게 분명히 흥미를 보일 것이다. 시기만 받쳐 준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왕재. 그것이 막현이 보는 자신의 주군이었다.

“음…….”

파락파락.

회봉왕은 한참을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다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그래. 가 보지. 자네 말 대로 손해 날 거야 없으니까.”

그렇게, 대명 왕실의 핏줄 중 하나가 인류연합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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