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진흙탕 (1)
다각다각. 쿠르르릉!
석양의 빛 아래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마차가 있었다.
덩치가 큰 대완마가 네 마리나 달린 호화로운 마차. 흰색과 검은색의 배합이 눈에 확 들어오는 옆면에는, 커다랗게 ‘천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히히잉! 푸르르륵!
가히 질풍처럼 빠르게 달리는 말들.
체구가 큰 대완마는 순간 가속이 일품이다. 그래서 랜스 차지라는 서역 특유의 거창 돌격은,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숴 놓는다는 무시무시한 위명을 날렸다.
하지만 대완마는 다른 말들에 비해서 지구력이 떨어졌다. 무적이라 불리웠던 서역의 거창 돌격이, 몽골의 조랑말 부대에 처참히 깨져 나간 것은 유명한 일화다.
순간 가속이 빨라 봐야 뭐 하나. 중갑을 입고 마갑까지 씌운 채로 돌격한 서역의 기수들은, 가벼운 몸으로 마상에서 활만 쏴 대는 칭기즈칸의 스웜 전술을 당해 내지 못했다.
그렇게 힘은 좋지만, 유지 속도가 짧은 것이 대완마.
히히히히힝!
한데 묘하게도, 지금 천무학관의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은, 전혀 지침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렝스. 리커버리.”
마부로 있는 이가 고위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후르릉. 피이잉!
지친 기색이 조금만 보이면 바로 강화와 체력 회복을 걸어 버리니, 말들의 체력이 떨어질 일이 없다. 마법사의 마나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하루 온종일도 달릴 수 있다.
히히히힝!
그리고 재미있게도, 말들도 하루 종일 질주만 계속 시키는데, 꾀를 부리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들에게 버프를 걸어 주던 마법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핫, 녀석들 하곤…….”
아마 녀석들 입장에서도, 아무리 달려도 달려도, 피곤해서 늘어지는 것 없이 경쾌하게 움직이는 것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지구력이 떨어져서 한 마장만 달리고 나면 퍼져 버리는 대완마 주제에, 언제 이렇게 미친 듯이 질주해 봤겠나?
다각다각. 다각다각!
휘이이이잉!
무한히 이어지는 전력 질주란, 묘한 마력이 있다.
거칠게 몰아닥치는 바람.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는 나무들. 속도에 빠진다고 할까. 마침 길도 한도 끝도 없이 쭉쭉 뻗은 잘 닦인 대로다.
정신 줄 놓고 달려가다 보면, 어느새 해가 거의 저물어 갈 지경에 이르렀다.
“후우… 호북성입니다! 이제 완전히 들어섰습니다!”
마부는 길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고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법사다. 그것도 고위 마법사다. 평소라면 마차를 몰라는, 단순하고 하찮은 일을 결코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경우 나름.
지금 그가 모는 마차는, 천무학관의 학과장 리그웨더와,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가 타고 있었다.
한 명은 자타 공인 중원 제일인이고, 또 한 명은 살아생전 만나기도 어렵다는 탈마의 -현경보다 더 보기 힘든- 고수다.
이쯤 되면 마부건 뭐건, 동행만 시켜 줘도 감읍할 노릇이다. 비록 수행인으로나마, 저 살아 있는 전설들과 함께 무림맹의 방명록에 이름을 써 갈기게 되었으니.
“속도를 좀 더 올리겠습니다! 자정 전에 무한에 닿을 것 같습니다!”
히히히힝!
마부의 버프가 연달아 쏟아지고, 말들이 우렁차게 투레질을 했다.
* * *
바깥은 시끄러웠지만, 값비싼 마차라서 그런지 마차 안의 흔들림은 적었다.
흔들흔들.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묻고 있던 천마는, 마법사 마부의 외침에 살짝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호북의 무한… 무림맹이라…….”
정도 무림맹.
한때는 불공대천의 원수였다. 수많은 교인들이 죽었고, 그 원한은 계곡처럼 깊디깊었다.
하지만 이제 바뀌었다. 예전에 적대했던 세력은 이미 없어졌다. 그렇기에 이름만 옛 무림맹의 것을 계승한 세력.
아니, 그들이 살던 땅과 흔적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이신가요?”
복잡미묘한 천마의 얼굴을 보고, 리그웨더가 물었다.
“…손님으로서는.”
잠시 침묵하고 있던 천마가 대답했다.
“적으로 몇 번 들른 적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어가는 건 처음이야. 아마 이쯤에서…….”
천마는 창밖을 향해 잠시 눈길을 주었다.
백사십 년 전, 아니, 그보다 수십 년도 더 전에 그는 당대 무림맹주를 암살하려고 들었었다.
한밤에 기척을 숨기며 잠행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아무리 천마라도 적지에 단신으로 숨어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삐이이이!
“아. 그래. 저기지.”
멀리서 효시(嚆矢)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천마는 쓰게 웃었다.
최소 백오십 년. 어쩌면 2백 년 전의 기억.
당시 무림맹의 천라지망은, 천마도 학을 뗄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겼다. 지금 효시가 솟아오른 언덕을, 그때 당시에 이를 갈며 노려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산천은 의구하구나. 사람은 바뀌었건만.”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 시간을 20번은 거쳤는데, 의외로 풍경은 낯익었다. 바뀐 것은 그저 천마의 몸. 그리고 지금 이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여쭈어도 될까요.”
“뭘.”
“그 암습, 성공하셨나요?”
리그웨더가 다른 뜻 없이 그저 호기심으로 물었다.
천마는 다시금 곰곰이 예전을 떠올리다가 고개 저었다.
“…반반이었어. 반은 성공. 반은 실패.”
잠입은 성공했다. 당시의 천마는 무림맹주의 처소에까지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하지만 기습에 성공하고도 죽이지는 못했다. 천마로서도.
“…그렇게나 강했었나요? 당대 무림맹주가?”
“강했지.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이었거든. 우습게도 그걸 칼을 날린 다음에 알았고.”
천마가 다시금 쓰게 웃었다.
무명선사. 혜령인지 혜련인지 어쨌든, 혜자 돌림의 소림의 선승.
이름도 무엇도 다 버린 그는, 오히려 현상 유지를 원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정도 무림맹이 명 황실과 연합하여 마교를 기필코 지워 버리려는 계획을, 오히려 내부에서 막아 내고 있는 방파제였던 것이다.
“그런 기록은… 본 적이 없는데요?”
“당연히 안 남기지. 무림맹? 걔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일상이야. 저번에 제갈 할망구 봤잖아.”
리그웨더는 문서로만 과거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당대를 실제로 겪었던 몸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강한 고수가, 오히려 내 앞에서 고개 숙이면서 살려 달라고, 부디 강호에 피바람이 그치게 할 테니 살려만 달라고 하는데……. 듣는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아?”
그때를 떠올린 천마는 푸념을 쏟아 놓았다.
당시의 천마는 아직 탈마에 이르지 못 한 상태였다. 그때는 스스로가 탈마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
다른 많은 마교의 고수들처럼.
그리고 아마, 그게 계기였을 것이다. 더 이상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혼자서 수련에만 몰두하게 된 계기.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한 편으로 묶인 세력도, 속으로는 서로서로 견제하기 바쁘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적 세력의 최고 우두머리가, 실은 우리 편에 우호적이라는 것만큼, 골 때리는 현실이 더 어디 있겠는가?
“인류 연합… 그게 이번 회의의 주제라고 했지.”
“네. 일단은.”
“쉽지 않을 거야. 장담하는데. 걔들 보통 골 때리는 것들이 아니거든.”
“…….”
천마의 회의적인 반응에 리그웨더는 침묵했다.
기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인류를 대동단결, 하나로 묶으려고 이제껏 노력했던 세월이.
자그마치 백 년이었으니까.
“애초에 호북에다 맹을 세운 이유가 그거라고. 내분. 분열. 반대를 위한 반대. 상시 견제. 어휴…….”
천마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도 무림맹이 적이어서 다행이었다. 아군이었다면… 여러 가지 의미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천마라 해도.
호북성 무한.
현 정도 무림맹의 본단이 자리한 곳이다.
무림맹. 정도맹. 정파 회의. 십전단 등,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고, 성격도 조금씩 달랐으나 그들의 본단은 항상 무한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인구 백 만을 넘기는 대도시. 그래서 천하 정파인들이 다 함께 자연스레 모일 만한 곳이 달리 없다. 식자들은 보통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천마의 생각은 달랐다.
‘웃기는 소리. 결국은 견제. 견제. 견제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주력인 정도 무림맹. 본래 그들의 취지는 마교나 거대한 사파의 준동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힘을 합친 무림맹 내부의 실세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머리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립지.
총단이 호북에 위치한 까닭은 사실 그 위치 때문이었다.
중원 전도를 놓고 펼쳐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호북의 북녘인 하남 땅은 소림사. 천년 고찰이자 천하 공부의 근본이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남궁세가의 안휘성이, 서북에는 화산파와 종남파의 본산이 있는 섬서성이다.
서쪽을 보면? 사천성이라 당문, 청성, 아미라는 막강한 기둥들이 여럿 뿌리를 뻗고 있었다.
이러니 서로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기 편한 곳이 호북성이니, 무한에 무림맹 본단이 위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제갈 대가리들 탓도 있겠지만.’
한 가지 더. 영원한 무림맹의 군사 가문. 제갈세가의 본가가 또한 호북에 있었다. 뭐, 맹주야 수시로 출신 문파가 바뀌지만, 계속 실무를 담당해야 하는 군사의 입장에서는 잦은 이사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 군사의 입장도 한 세력이라고 따져 보면, 결국 이해득실과 정치질의 결과인 것이다.
-정지! 거기 정지! 마차는 거기에 멈추시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기어이 도착한 것인가, 위병 누군가의 창노한 목소리가 찌르듯이 마차를 두들겼다.
히히잉! 쿠르릉. 드르르륵.
바퀴가 판석을 거칠게 긁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완전히 정차하고 나자, 횃불을 든 일단의 무리가 새하얀 백의를 입고 주르륵 몰려들었다.
“이곳은 정도 무림맹의 본단이오! 야심한 밤에 방문하신 귀하들은 누구신가!”
지르르릉.
목소리에 내공을 잔뜩 담았는지, 마차의 벽이 가늘게 울린다. 최소 화경. 어쩌면 그 극에 닿은 고수다.
“어… 저희들은…….”
덜컥.
마부로 앉은 마법사가 대답하려던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천마가 얼굴을 드러냈다.
“지랄하고 앉았네. 너, 까막눈이냐?”
“…헉.”
어마어마한 폭언과 함께.
“…뭐가 어째?”
당연히 노고수의 하얀 눈썹은 하늘로 치솟았고, 마부는 식겁했고, 뒤늦게 리그웨더가 나와 수습에 나섰다.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천무학관의 학과장. 리그웨더라고 합니다. 귀인의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을지요?”
“크음… 오태수라고 하오.”
차악.
어느새 빼 들었던 검을 집어넣은 노고수. 그는 사나운 눈으로 천마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리그웨더라. 소문 자자한 금룡을 직접 뵈어 영광이오. 하나 본 맹을 너무 가볍게 보신 게 아닌지? 이런 늦은 시간에 내방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소. 야음(夜陰) 때문에 자칫 공격할 뻔했지 뭐요.”
“죄송합니다. 그것이…….”
“사과하지 마. 되도 않은 트집이다.”
리그웨더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천마가 막아섰다. 그리고는 척,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가리켰다.
“어이. 오태수라고 했지? 너 까막눈이냐? 여기 이거 안 보여? 못 읽어?”
천무(天武). 백 장 밖에서도 읽을 수 있도록 강렬하고 흑백이 대비되는, 마차 옆에 크게 씌어진 글자를.
“어두워서 안 보였다고? 기도 안 차네. 접객을 맡은 위병소 책임자가 이 커다란 글자를 못 봤다고? 요즘 무림맹 수준이 엄청 떨어졌나 봐?”
“……!”
천마의 지적에 오태수. 위병소 책임자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리그웨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선보이려고 했던 탈마의 고수, 천마의 무림맹 등장은 첫 만남부터 최악의 인상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