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300화 (301/310)

300화. 진흙탕 (2)

아침이 밝았다.

무림맹주 오운풍(伍雲風)은, 새 하루를 뜨거운 차로 시작했다. 간밤에 음주가 과했던 건지 아직 어지러웠다.

후릅. 후르릅.

“크음. 으으음…….”

뜨끈한 찻물이 속으로 내려가며, 어지럼증과 메슥거림이 편안해진다.

보통 사람들은 전날 크게 취하고 나면, 혹자는 꿀물이나 죽으로, 혹자는 오히려 술로 해장을 한다.

하지만 오운풍처럼 술이라면 학을 떠는 사람은, 정신을 맑게 하는 찻물로 해장 아닌 해장을 하기도 한다.

“하여간에 사람들이… 출가인을 도무지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불콰해진 얼굴로 찻주전자를 두 번이나 비울 만큼 들이켠 후, 그는 데워진 몸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정신이 맑아지자, 그는 붓으로 명단에 있는 이름들 셋을 지웠다.

스슥. 스슥. 스슥.

-종남. 점창. 모용.

“휴우우우…….”

직접 붓질을 하니 무거운 짐덩이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간밤의 음주 대작으로 그동안 뻣뻣하게 무림맹의 결정에 뻗대던 이들, 두 문파와 한 가문에 양해를 받아 냈다.

사람을 다루는 때엔 많은 인내와 속에도 없는 찬사, 약속할 수 없는 빈말이 들어가야 했다. 새벽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퍼마셔야 하는 건 기본이다.

다행히 노력이 결과를 제대로 보아, 어제 만난 세 사람의 협력은 약속받았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이름들이 있어, 앞으로도 꽤나 퍼마셔야 할 참이었다. 당장 오늘 만날 이들은.

-청성. 남궁세가. 진가장.

“하이고……. 우화등선은 무슨. 이러다가 주화등선 하겠구만…….”

하나는 옛 구파일방이고, 또 하나는 오대세가고, 나머지 하나는 신흥 권가로 이름을 날리는 곳.

유명한 만큼 더 뻗대는 이들이라, 오늘도 꽤나 손바닥을 비벼야 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미 귀천하신 지 오래된 사부가 오늘따라 그리워져서, 무림맹주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부님… 그립습니다…….”

진작에 하지 말라고 하실 때 하지 말걸.

천하의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이렇게 더럽고 험한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예전에는 그냥 호령하며 손가락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놀고먹는 좋은 자리인 줄 알았다.

말 안 듣는 놈은 징계 먹이고, 개기면 맹에서 탈퇴시키고, 여차하면 무림 공적으로 몰아붙이고.

충분히 그럴 줄 알았다. 하나 아니었다. 그걸 사부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지만.

후르륵. 후르르륵

무림맹은 수많은 정도문파의 집합체다.

당장 옛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예들. 그리고 그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제각각 수십에 달하는 중소문파들.

이처럼 줄을 대고 있는 단체는 많지만, 정작 맹의 뜻대로 움직여 주려고 하는 이들은 드물다.

“후우우우…….”

힘 좀 있고 이름 좀 날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제 목소리를 먼저 높이고, 무인 아니랄까 봐 여차하면 싸움부터 붙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중재하고 설득하며 양보하게 하는 일이 무림맹주의 일이다. 당장 어제와 오늘처럼.

즉, 오운풍이 불행한 까닭은, 그가 어리석거나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 무림맹의 맹주로서, 자신의 위치와 책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한 번씩 불쑥 충동이 들긴 했다.

‘확 미친 척하고 권력 한번 쥐어 봐?’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무림맹이 아니라 맹주 자신의 힘과 권력만 일시적으로 끌어 모으려면.

내 말부터 들어줍세, 하고 모여드는 유력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책임지지 못할 공수표를 날리며 그들을 맹주 뜻대로 마구 움직이면 아무도 무림맹의 행사에, 그리고 맹주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되리라.

실제로 책임은 지지 않고 권리만 휘둘렀던, 암군이나 폭군에 가까운 무림맹주도, 무림맹의 오랜 역사에는 몇몇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마구 휘둘렀던 힘의 대가는.

‘관두자. 사문 이름에 똥칠하는 놈이 될 수야 없지.’

그 무림맹주를 배출한 가문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사실, 자기네 문파에서 무림맹주를 배출한다는 건 대단한 영예다. 주변에서 우러러본다.

또한, 알음알음 당대 맹주에게서 받을 수 있는 혜택도 여러 가지다. 그래서 다들 좋게만 생각하는데…….

맹주는 선출직이고, 지나친 불합리는 무림맹 의사 기구에 의해 파면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그로 인해 맹주의 출신 문파가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출신 고수 하나 때문에 명문가가 망할까? 하고 의심한다면, 화산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소림과 무당, 그다음으로 언급되는 찬란한 천년 고찰은, 한때 3대에 걸쳐 계속해서 무림맹주를 배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와그작 망해 버렸다.

자신들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맹주. 그가 권력을 전횡하며 불이익을 준 문파들이, 나중에 화산파가 무너질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힌 것이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랄까.

주르륵. 스읍.

“크으으음…….”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고, 배알이 뒤틀려도, 오운풍은 막 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사문은 다른 곳도 아닌 무당.

도가 문파의 가장 영예로운 무문의 이름에, 오욕을 끼치는 당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똑똑.

“맹주님, 들어가겠습니다.”

“어이구.”

익숙한 목소리에 신음부터 나왔다.

아침의 달콤한 휴식 시간이 벌써 끝나 버린 것인가.

덜컥.

가슴까지 쌓인 서류를 들고 들어오는, 무림맹 군사 제갈홍연.

분명 군사인데, 자신보다 아래인데, 오운풍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불안해졌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그가 얼굴을 비칠 때면, 항상 달갑지 않은 이야기를 들고 왔으니까.

“음. 그게…….”

저거 보라지. 스윽 슥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뭔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낼 움직임이었다. 맹주가 조마조마해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을 때.

“간밤에 천무학관에서 본 맹에 방문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치들이 왜? 아, 인류 연합?”

되묻다 말고 오운풍은 이마를 탁하고 쳤다.

이미 식은 지 오래되어 잊어 먹고 있었던 밥인 탓이다.

“공문이 날아오긴 했는데… 진심이었던가? 이제껏 말만 오르내리고 지지부진했던 걸, 이제 와서 왜?”

“듣기로는 ‘이번에야말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온 모양입니다. 거부하는 쪽이 손해를 볼 만큼.”

“…그래서?”

스윽. 스윽.

중요 안건은 대충 머리에 넣었고, 무림맹주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뭐가 문제인가. 자네 얼굴을 보니 뭐… 상당히 큰일이 터진 것 같은데.”

“어, 음. 그게…….”

또다. 또.

또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나름 무표정하지만 상당히 말하기 껄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오운풍은 또 어떤 놈이 간밤에 사고를 쳤길래 저럴까, 하며 가슴을 졸였다.

“동생분께서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동생? 누구? 누구 동생? 나……?”

오운풍은 잠시 어리바리를 타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동생? 혈육?

그에게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

한미한 가문에서, 열 살도 되기 전에 무당파에 입문했고, 그 뒤로 오십 년을 가족과 왕래가 없이 지냈다.

오운풍이 당대 무림 맹주로 추대받은 가장 큰 까닭 중 하나가, 그에게 귀찮은 떨거지가 없다는 것 아니었던가.

“내가 동생이 어디 있어?”

내가 누군 줄 아냐고, 내 친지가 무림맹주라고 하며 사방에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사고뭉치는 맹주파에게든 반맹주파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백안시하는 법이니까.

“맹주님, 말씀드렸지만 천무학관이 지난밤에 늦게, 본 맹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

“본 맹의 정문을 맡고 있던 위사 조장이, 음, 학과장 리그웨더에게 좀 거만하게 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학과장의 동행인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래서 깨졌다? 흠. 좀 시끄럽게 생겼군. 그런데?”

스윽. 스윽.

맹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문의 위사들이 타 문파에게 땍땍거리다가 처맞는, 그런 경우는 안타깝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가슴팍에 금빛의 ‘맹(盟)’자를 새긴 옷을 입으면서부터, 정문 위사는 단순한 무인이 아니다. 무림맹의 얼굴이다.

스스로의 행동에 절도가 있어야 하고, 상대가 아무리 거대 세력이라 하더라도 결코 주눅듬이 없이 당당해야 했다.

하지만 당당함과 거만함은 종이 한 장 차이.

맹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타 문파에 대한 오만이나 결례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면서, 남에게 거만하지 않고 예의 바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정문 위사가 야밤에 초거대 문파-천무학관-의 방문을, 고양이 털 세우듯 으르렁대며 맞을 수도 있는 거고.

“그게 뭐 별일인가, 천무학관에서 뭐, 그 위사를 죽이기라도 했나? 그리고 그게 내 동생이라고?”

피식.

이제 무림맹주는 웃었다.

천무학관의 학과장 리그웨더. 그녀의 성품은 그도 잘 알고 있는 바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골드 드래곤. 그녀는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무력을 통한 제패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존재였다.

당장 천무학관 자체의 전력만 해도, 총동원하면 무림맹의 3분지 1은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논의, 논의, 논의만 계속하며 근 백 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 온 입장 아닌가.

성품이 온순한 것이야 원래라면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무림맹주로 온갖 세파에 찌들어 버리다 보니, 오운풍 역시 은연중에 그들을 ‘만만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 시위장이 전신 마비의 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뭐?”

“목격자들의 말로는, 딱 한 번, 눈에 보이는 평범한 정권 지르기였다는데, 막으면서 튕겨 나간 오 시위장이 벽에 부딪히며 목이 부러지는…….”

“가만, 가만. 이게 무슨 소리야? 리그웨더 학과장이 주먹을 휘둘렀다고? 그… 그녀가?”

권력자들이 흔히 잊곤 하는 것이, 얌전하던 상대가 한 번 화를 내면 어마어마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면전에 삿대질을 당해도 쓰게 웃고 말던 그녀가, 정문 위사에게 주먹질을 하는 장면은 맹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손을 쓴 것은 학과장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온 동행인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오태수 시위장이 주먹질 한 방에 폐인이 되다니! 같이 온 동행이란 사람이 뭐, 현경의 고수라도 되는 게야?!”

“그… 현경이 아니라 탈마라고 합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있지만, 그간 멸문된 줄 알았던 마교 잔존 세력의 우두머리라고…….”

“…마교? 마교라고? 지금 말하는 게 내가 아는 마교가 맞나? 대격변의 날에 개 한 마리 못 살아남았다는, 십만 대산의 마교?”

“맞습니다.”

“어어어…….”

풀썩.

언제 일어났었던가. 오운풍은 잠시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마교? 아니, 어째서?

그리고 탈마? 그건 그냥 전설로만 내려오던 이야기 아니었나?

아침 숙취 해소 중에 듣기에는 너무 많고 묵직한 주제였다. 잠시, 자신이 술이 덜 깨서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야 말로 현실 도피라는 걸.

“…허어.”

수를 열쯤 헤아렸을 때, 오운풍은 무림맹주로서 돌아왔다. 그는 눈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까 옛 마교의 후예가 갑자기 발흥하여, 탈마의 경지에 올랐고, 그런 자신을 천무학관에 드러냈다?”

여전히 이해는 안 가지만.

“그리고 그런 그를 영입한 리그웨더가, 좀 더 확신을 갖게 되어 본 맹에 다시 인류 연합이라는 의제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인가?”

“현재로서는 그렇게 판단됩니다.”

“놀랍군.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어떻게든 해야겠지.”

오운풍은 평소에는 유약해 보이지만, 위기 시에는 누구보다도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런 평가를 확실히 입증하고 있었다.

“회의를 구성하게. 본래 예정보다 범위를 확대해. 특히 삼주들에게 필히 참석하라고 명하고. 상대는 단단히 준비하고 왔음을 알려, 결코 부화뇌동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군사 제갈홍연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막 나가려던 군사를, 맹주가 붙들었다.

“참. 하던 말인데, 동생이니 어쩌니 하는 그 이야기는 뭔가?”

“그게… 시위장 오태수가 맹주님과 같은 오 씨 성이지 않습니까?”

“같은 오 씨지. 그게 왜?”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었다고, 그리고 마침 맹주님께서 무당에 열 살 무렵에 입문하셨다고.”

“설마. 아니겠지.”

오운풍은 재미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성이 오씨라고 인척, 혹은 형제로 생각했다? 천하에 오가 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식으로 따지나?

그리고 그렇게 따질 거면 무림맹주가 아니라, 차라리 사천제일 상단 오가장부터 먼저 들를 것 아닌가.

심지어 오태수는 초입이기는 해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딱히 무림맹주라는 뒷배 없이도, 나름 큰소리 좀 칠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소문이 돌았답니다. 실은 맹주님과 그가 인척간이 아닌가 하고. 본인도 당시에는 그냥 웃어 넘겼다고 합니다만.”

“…설마.”

“예. 그 설마 같습니다. 마침 얼마전에 그가 뭔가 소식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제갈홍연이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꺼냈다.

“지금 와서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떠들고 볼 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맹주님의 친동생이 폭행당해 사경을 헤메고 있다고, 꽤 시끄러울 겁니다.”

“…미치겠군.”

소문이란 항상, 이용할 수 있는 이에게는 좋은 낚싯밥인 셈이었다. 특히 정치질을 일삼는 무리들 사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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