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진흙탕 (3)
맹주의 지시로 아침부터 임시 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위한 회의랄까. 본래 무림맹 본회의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임시 회의가 열리는 것이 보통이다.
무림맹주나 리그웨더 같은 외교 정상(頂上)들은, 관행상 그저 얼굴을 비치고 왔다 갔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 이상이면 오히려 위험하다.
정상의 격이 높을수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한 의미부여나 오해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이른바 실무자 회의라는 것이 하루 종일 물밑으로 지속되고, 치열하고 복잡한 서로 간의 계산서를 들이민다.
그리고 각 세력을 대표하는 정상들은, 그 계산서가 끝난 다음에야 간단하게 얼굴만 비치고 도장 찍고 끝이다.
그런 것이 보통이고, 원래라면 이번에도 그래야 했다.
“…실무자가 없다고? 단 두 명?”
그래서 본회의가 열리기 전에 구성된 무림맹의 임시 회의는, 시작부터 깊은 당황에 빠졌다.
천무학관에서 온 참석자는 단 두 사람.
리그웨더와 천마뿐이다.
마차를 몰아 온 마법사는 그냥 마부의 역할로 온 것뿐.
즉, 물밑에서 서로의 의견 조율을 할 담당자를 아예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거 이제 보니 작심을 단단히 한 모양이외다.”
누군가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보통 실무자를 따로 두는 까닭이 무엇이외까? 현장의 방대한 지식량을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요. 당연히 사람이라면…….”
“그런데 상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룡이지요. 그에게 기억의 망실이나 수치의 착각 같은 것은 없소이다.”
“……!”
말인즉, 이제까지의 협상 테이블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제껏 인간들 간의 협의는 그나마, 꼼수가 통했다.
사람이 머릿속에 도서관을 넣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사료나 정보의 확인에서 부족함이 있으면 잠깐의 유예를 청하는 것도 흠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회의를 정지시키기를 틈타, 이쪽 또한 필요한 보고서나 관련 지식을 재빠르게 보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유예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난리 났군. 이거.”
상대는 만 개의 두뇌가 움직인다고 평해지는 금룡.
그녀가 가진 지식 체계와 빠른 점검은, 어지간한 정보 조직 한 개가 통째로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리라. 혼자 모든 것을 알고, 혼자 검토하고, 혼자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곧.
“협상에서 상대의 제안에 검토할 시간이 없다는 건……. 치명적이오.”
그 어떤 정지 절차가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볼 필요 있소? 그쪽의 제안을 우리가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허어, 참. 그런 말은 곧 이쪽의 실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백이나 다름이 없지 않소.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다른 곳을 상대할 때!”
“아, 아차…….”
무림맹이 협상을 해야 하는 상대가 오로지 천무학관만이라면 속내를 털어놓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 그렇게 한 번 크게 밑지고 나면 ‘앞으로’ 어찌 되는가?
다른 세력, 다른 집단과 교류를 나눌 때 더 이상 ‘허세’ 같은 건 쓰지 못하게 된다.
무인들의 단체라는 속성상, 때로는 없어도 있는 척, 있어도 없는 척을 해야 하게 마련인데, 한번 역량이 탄로 나고 나면, 그런 허세는 시작부터 막힌다.
이는 앞으로의 무림맹이 다른 세력들과 조율을 하게 될 때,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오게 마련.
“…일단은 이번 일에 집중해 보도록 합시다. 뭐, 여차하면 판을 엎는 것도 방법이지.”
누군가가 한 말에 모두가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럴수도 있군.”
“뭐.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오만… 어쨌든 방안이 있긴 있구려.”
하기야 협의와 제안이라는 건, 미뤄질 수도 늦춰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 상황의 여의치 않으면, 당장 깽판을 놓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방책의 하나.
물론 상대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하나 아무리 천무학관이라 하더라도, 무림맹을 겉으로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는 법. 이는 체급에서 우러나오는 배짱이었다.
“그럼, 그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대체 뭔지나 들어 봅시다.”
“그래요. 가지고 온 선물 보따리가 금인지 옥인지 알아야 판별이 가능할 테니.”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렸던 임시 회의의 사람들은, 반 시진 후 제공된 ‘사전 자료’ 너댓 장을 읽어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공군… 이라고?”
“길들인 마수를 타고 하늘에서 공… 격?!”
반각 후.
사람들은 뒤집어졌고, 무림맹의 머리 좀 쓴다는 사람들은 죄다 호출을 당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삼주라 불리는 실세들도 있었다.
삼주.
무림맹의 세 기둥이라 불리우며, 무림맹주 오운풍의 동료이자 정적인 이들.
조사단 출신 장로 과천성(過天星).
감찰단 출신 장로 백일봉(白日奉).
정보단 출신 장로 섭광생(葉狂生).
흔히들 실세라 부르는 세 노인의 참석으로 인해, 회의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크흠. 크흠!
“일단 묻겠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사르락.
서류를 접어 내리며 과천성이 물었다.
공군. 이제껏 없었던 전략 개념을, 나이 든 원로들이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쉽지 않았을 뿐, 못 할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머리가 굳어 있기만 했다면, 무림맹이라는 빛나는 이름에 속할 자격도 없는 법이니.
“일단… 개념 자체는 가능합니다. 원거리를 격하고 공격하는 방식에는 뭐, 극단적으로 보면 이기어검술도 있으니까요.”
서관이 답했다.
주로 전략 전술의 사례를 찾아보는 연구원인데, 개인의 무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지금 같은 회의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대몬스터 전투에 나서는 것은, 더 이상 무인만이 아니다. 그리고 대규모 전투에서 가장 선호되는 것은 일방적인 화력 투사다.
궁시, 총포, 혹은 마법 등을 활용해 상대에게만 피해를 강요하는 것. 나는 안 맞고, 너는 처맞으라는 것.
다소 원색적일 수는 있으나, 고대로부터 이어진 모든 전술 전략의 개념 중 가장 알짜배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군이라는 개념은, 그 알짜배기를 현실에 가져다 놓은 형태의 군대다.
“누가 지금 그걸 묻나?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 그걸 물은 게 아닌가.”
백일봉이 물었다. 감찰단 출신인 그는, 물을 때 삼백안의 눈을 희번득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전혀 새로운 개념이라.”
식은땀을 흘리며 서관 무연모가 답했다.
현실성? 무림맹 쪽 식견에서 볼 때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애초에 이런 시도를 해 볼 시각 자체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사료고 자료고 간에, 전부 천무학관이 제공한 것들. 이걸 전적으로 믿는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껏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전략을, 눈으로 확인 한 번 하지 않고 글귀만 보고 믿는다?
천하의 호구나 할 일이다. 눈 뜨고 코 베인 다음 밑천까지 다 털려서 망해도 부족하다.
“그럼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말이지?”
“그게 또, 그렇게 보기엔 천무학관이 너무 강수를 들고 나왔습니다. 자그마치 사천 제일 상단의 보증이라…….”
서관이 도리질했다.
믿자니 안 믿기고, 안 믿자니 또 문제다. 아무리 상대가 천무학관이라 해도, 이건 서류 한 장에 아 그렇군요, 하고 믿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일 거라고 억측할 수도 없다. 어차피 시일이 지나면 참인지 거짓인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큰 사안에서, 그 천무학관이 이런 걸로 거짓을 논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결국 원점인데.
“아니, 그래서 어쩌자는 게야?”
짜증을 팍 내자, 나이 든 서관이 대답했다.
“시간, 시간이 필요합니다! 맹의 서고에 있었던 소수 의견 보고서를 모두 종합해 보면… 가불가를 예상할 수 있을겁니다.”
소수 의견 보고서. 세칭 창담(蒼談).
이름부터 하늘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로, 현실성, 가능성, 채산성 등의 문제를 제외하고 ‘혹 이럴 수 있다면’ 하는 상상으로만 가득 찬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현실적으로 무림맹은 인재의 거대한 바다다. 중원의 한 가닥 하는 무인들이 한 번씩은 크든 작든 문제가 벌어져서 들르는 곳.
또한 맹 내부에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각계 각층의 현자들이 한마디씩, 의견이나 혁신적인 생각을 뽑아내는 ‘식객당’도 존재한다.
강호의 기인 이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창안한 현실성을 무시한 황당무계한 발상의 기록. 그것들이 창고 단위로 쌓여 있는 문서고가 창담이다.
십인십색, 백인백색이라. 인간의 상상이 무한한 만큼, 그 무한하고 때로는 발칙한 상상력의 기록들만 점검할 수 있다곤 쳐도, 저 공군인지 궁군인지 하는 천무학관의 제안이 가능성 있는지 아닌지는 알아볼 수 있을 터.
“얼마나 걸리겠나?”
“딱 일주일… 더 확실히 하자면 한 달의 기한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에 요구되는 시간이었다.
창담은 앞서 말했다시피 현실성이 결여된 문제로 뒤켠으로 밀린, 일종의 ‘사담록’에 가깝다.
애초에 참신함으로만 가득한, 가치가 거의 없는 문서들. 그래서 인력을 투입해서 정리할 일이 없었고, 시간 순서나 항목 순서에 맞춘 체계가 없었다.
근 백 년에 달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뒤집어 까서 내용을 확인하고 정립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
창고 단위의 보고서를 전부 뒤집어서 확인하고 정리? 그걸 고작 한 달? 솔직히, 무림맹의 사람이란 사람을 다 동원해도 될까 말까 한 어마어마한 역사가 될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그 시간이 없단 말일세.”
문제는 이것이었다. 분명 시일을 두고 찾아내면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상대는 이미 모든 자료를 다 가지고 와 있는데, 그게 가능성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데 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 얼마나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 시진, 아니, 길어야 두 시진.”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홱! 소리가 나도록 태도가 변했다.
좀 전까지 진땀을 흘리며 굽신거리던 서관의 얼굴이,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듯 냉랭할 정도로 딱딱하게 변했다.
덕분에 삼주는 당황했다.
“네 시진 주지. 아니… 다섯 시진. 그걸로 안 되겠나?”
“턱도 없습니다. 황하의 물을 바가지로 퍼낸다고 하여 줄어들겠습니까?”
서관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강물을 바가지로 퍼낸다고 하면, 한 바가지나 너댓 바가지나 거기서 거기다. 한 시진이든 다섯 시진이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저 어디에 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 해법 관련 자료가, 운이 좋아 서고 앞머리에 딱하고 비치돼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서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자네 말이 맞다고 보네. 하지만 지금 본 맹의 상황이 좋지가 않아.”
무연모를 달래듯 섭광생이 나섰다.
그는 본시 정보단 출신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명령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현 무림맹의 상황과, 천무학관의 제안서, 그리고 압도적인 시간의 부족까지, 일개 서관에게 과할 정도로 현 상황에 대해 세세히 일러 주었다.
“…결국 체면 문제입니까?”
“맞네. 하지만 체면이라는 게, 자네 같은 사람이 보기엔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또한 맹의 자산이네. 때로는 기 싸움으로, 때로는 실제 피가 흐르는 싸움으로 얻은.”
“음.”
“그러니 자네가 좀 의견을 내어 주게. 이 촉박한 시간에 저 방대한 자료를 다 뒤지는 건, 내가 보기에도 현실적으로는 무리야. 그럼 이제 우리가 어쩌면 좋겠나?”
“일단은, 그냥 일만 놓고 보아서는 말입니다만…….”
서관의 눈이 약간 반짝였다.
속내를 털어놓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상관. 그런 모습에 삐딱하게 대하는 부하 직원은 없다.
무연모는 이제까지의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천무학관의 자료가… 사실이길 바라고 전적으로 받아들여야죠. 겉으로는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들여 따로 조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끄응…….”
어찌 보면 뻔한 답. 하지만 이쪽에서 정보상으로 절대 약세를 보이지 않으려면, 그 방법뿐이다.
“결국 그뿐인가?”
“예.”
서관의 말에 삼주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사실 그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으니 그리 처리하게. 필요한 것은 없나?”
“시간과 예산입니다. 문서를 검수할 문인들과, 그들을 고용할 비용이 필요합니다.”
“…전적으로 맡기겠네. 얼마든지 요청하게.”
오늘따라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대단히 피곤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반면으로 시비를 좀 걸어야겠지요.”
“시비라.”
그래도 그나마 뭔가 쓸모 있어 보이는 이야기에 삼주가 눈을 빛냈다.
“정확히 어떤?”
“먼저 보내온 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것이 전부 맞다면, 일단 그리핀의 생육에 필요한 것이 옛 마교의 마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관은 일절 사감 없이, 필요한 사료만 보는 냉막한 눈을 했다. 흡사 유리알처럼, 차갑게 보이는 눈으로.
“그랬지.”
“하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한 기록은 없지 않습니까. 오가상단의 보증이 있기는 하나, 탑승자의 위험이나, 혹은 마수의 폭주 등, 안정성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호오.”
서관의 말에 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문제로 제기하면 되겠군. 마공이라… 확실히 폭주가 많이 발생한 무예지.”
그럴듯한 핑계였다. 적어도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하나 더 따질 수도 있소. 마침 리그웨더와 함께 온 자. 그가 마교의 교주라 하지 않소?”
“그렇소만.”
“그가 전신불수로 만든 이는 맹의 수위장이었소. 한데 마침, 맹주의 이복동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돌고 있지.”
“…….”
“…….”
섭광생의 말에, 나머지 삼주의 두 사람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럭저럭 잡아뜯을 핑계는 되겠구려.”
“그러게요. 갑자기 맹주에게 하지도 않던 친한 척을 다 하게 생겼군.”
마음에는 들지 않아도, 방향에서는 일치를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