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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302화 (303/310)

302화. 진흙탕 (4)

세상 사람들은 다소 우스갯소리로 ‘하늘이 공평하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 초인에 가까운 천재라도, 도무지 못하는 게 하나씩 있을 때 나오는 말이다.

천마에게도 그런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 눈치 보는 것. 흔히 세간이 말하는 도덕, 혹은 절차였다. 쉽게 말해, 남에게 보여 주는 요식 행위를 끔찍하게 귀찮아한다는 것이었다.

한데, 그보다 더 못 참는 것이 있었으니.

그 요식행위를 할 각오를 다졌는데, ‘안 하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장난해? 아니, 아무리 무림맹주라도 이건 아니지!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천마는 전갈을 전한 시종을 때려눕힐 기세였다.

기껏 사천에서 하북까지 발걸음 해 놓고, 무림맹을 설득할 말도 준비해 놓고 다음 날 만남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리그웨더만 알현이 허락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러게 일을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일수에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드시다니요.”

이유는 바로 오태수인가 오달수인가 하는 무림맹 위사장에게 천마가 손을 썼기 때문이다.

초면부터 가식덩어리에다 대놓고 시비 거는 말들을 찍찍 싸대길래, 주먹으로 입을 닥치게 만들었는데.

“아니, 그게 저렇게나 약해 빠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건 웬걸. 한 방에 벽에 처박혀서 모가지가 또각 부러져 버렸지 않나. 천마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일이었다.물론 그건 천마에게 억울한 거지, 리그웨더 입장에서는 노기가 하늘을 찌를 일이었다.

“현경도 우습게 본다는 탈마의 고수께서, 화경의 사람을 상대로 손에 힘 조절도 못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 음.”

리그웨더의 삐뚜름한 얼굴에 천마는 벽만 쳐다봤다.

이제껏 무슨 짓을 해도 날 선 말 한 번 하지 않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살얼음이 바싹 낀 얼굴로 비아냥거리는 데는 천마조차 변명할 말도 없었다.

“아니, 무슨 화경을 노름판에서 땄냐고.”

“교주께서도 한 세력의 수장인 몸. 부탁드리건대 부디 자제를 해 주십시오.”

“뭐… 알았어.”

평소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것이다. 애초에 천마가 그토록 힘을 추구하는 까닭 중 하나가 바로 힘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귀찮은 절차? 생략.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체면? 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불만을 표시하는 놈이 나오면 한 주먹씩 대가리를 후려쳐 주면 되는 일이었고.

하지만 그런 그가 생각해도 사천에서 화북까지 와서, 기껏 열리는 회담을 파투 내는 짓은 좀 과하다 싶었다.

문제는.

“이제 쉬시면 됩니다.”

“…….”

쉬란다. 뭘 쉬어? 뭘 했다고? 애초에 피곤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웃긴 놈들이다. 아무리 정파의 무인들이 탈마의 경지가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른다 해도, 최소 화경보다 높은 것임은 다 알 것이다.

그 화경급 고수만 해도, 하루에 반나절은 쉬지도 않고 싸움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런데 탈마의 고수더러, 피곤할 테니 쉬라고?

다시 말하지만 뭘 했다고?

“바깥 좀 나가 봐도 되나?”

“저기, 그건 좀…….”

물었더니 굉장히 곤란한 얼굴로 시종이 말끝을 흐린다.

“뭐야, 나 지금 감금된 거냐?”

“가, 감금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귀하께서는 맹의 귀한 손님 신분으로…….”

“그럼 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건데?”

천마의 말에 시종이 식은땀을 흘린다.

“그… 저기, 피곤하실 테니 휴식을…….”

“안 피곤한데? 그래서 나갈 건데? 주위도 좀 둘러보고.”

“보실 만한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여기는…….”

“무림맹 본단이잖아. 개나 소나 들를 수 없는 곳이고. 당연히 볼만한 게 많지. 설마하니 개방처럼 청소도 안 된 지저분한 소굴이겠어?”

“그… 하, 하지만…….”

시종이 더욱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잘하면 졸도할 것 같다.

천마는 그에 홱! 소리가 나도록 돌아섰다.

“감금이 아니라면 막지 마라. 정 막으려면 힘 좀 쓰는 애들 데리고 오고.”

“…….”

그도 딱히 시종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정 자리에 있어야 한다면 좀 지루하긴 해도 가만히 내공 운기나 해도 된다.

하지만 천마는 뭘 하지 마라고 하면, 더 뿔이 나서 일을 저지르고 마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사람을 주저앉혀 놓고 하염없이 기다리라고? 왜? 뭐 하러? 누구 좋으라고?

“흐음… 여기가 본단 건물이고…….”

그게 천마가 당당하게 무림맹 안을 걷는 까닭이었다.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기어이 따라오고 있지만, 경공으로 떼어 내지 않는 것만 해도 그로서는 참아 주고 있는 셈이었다.

“으리번쩍하네. 확실히 돈이 많은 놈들이야.”

주변을 돌아보니 크고 높다. 회백색 대리석과 붉은 벽돌로 마감된 건물들. 예전에 숨어들었던 때의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중원의 양식을 기반으로, 다소 서역식 색채가 서린 건물들. 이 또한 변화의 바람인가, 하고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후우! 쿵! 쿵!

“오?”

본채 뒤의 공터. 연무장으로 쓰는 건물인 걸까. 우렁찬 기합 소리에 천마의 발이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대, 대협! 이, 이쪽은 아니 되십니다!”

“왜?”

발길을 돌리는데, 시종이 식겁해서 두 팔을 벌려 막아 섰다.

“이… 그… 이쪽은 맹의 귀하신 분들만 몸을 푸시는 곳으로, 아무나 함부로…….”

“오, 그 말은, 나는 맹의 귀한 사람이 아닌 아무나라는 거지?”

“아, 아니, 그것은. 그것이 아니오라…….”

딱 걸렸다. 어떻게든 요처를 못 보게 하려던 시종은, 말실수 때문에 더욱 천마의 심지를 돋궈 버렸다.

“아니면 비켜. 구경이나 하게. 뭐 본다고 닳냐?”

“어어… 어어어어……!”

스으으윽.

흡사 마법처럼 천마가 내민 손길에, 시종이 3장가량 뒤로 주우욱 밀려났다.

‘허공섭물?’

친 것도, 내공으로 밀어낸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수한 의지로 밀쳐 버린 것. 시종은 그제야 눈앞의 이 골칫거리가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보통이 아니다!’

하기야 애초에, 무림맹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이 보통 실력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그가 겪은 허공섭물은, 단계가 조금만 더 성장하면 바로 이기어검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단계다.

그리고 이기어검은 현경에 들어서서야 손실 없이 수납이 가능한, 검의 지고의 경지.

“흠흠, 저기… 대협.”

시종은 새삼 몸가짐을 조심하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대협의 말벗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어찌 안 되십니까?”

“…말벗?”

천마가 뜨악한 얼굴로 달라붙은 시종을 쳐다보았다.

넙데데한 얼굴에 주글주글 주름이 잡힌 사내자식. 예쁘고 나긋나긋한 시녀가 와서 오순도순 놀아 준다면 모를까, 시커먼 사내자식을 상대로 무슨 말벗이라고?

“소인이 듣기로, 대협께서는 옛 천마신교의 후예라고 들었습니다. 하면, 본 맹에는 처음이실 터. 무림맹이라는 곳의 권력 구도가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

그런데 이 늙은이. 꽤 요망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천마가 혹할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무림맹에 처음은 아니지만, 확실히 듣고 싶은 부분이 많긴 했었다.

“흐음… 꽤 묵직한 이야기를 할 모양인데?”

“어디 이야기만 묵직하겠습니까. 배도 묵직해야죠. 혹 선호하시는 음식이나 술이 있으시다면, 제가 좋은 것으로 준비하겠…….”

“안내해. 당장.”

천마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 늙은이. 확실히 요망하다고.

뽕! 쪼르르르르!

거품이 부걱부걱 올라오는 차가운 술. 씁쓸하고 청아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차게 식힌 맥주입니다. 맛을 한번 보시지요.”

“음. 어디.”

쭈우욱. 크으!

한 잔 마시자마자 시원하게 트림이 올라온다. 거기에 안주로 나온 것은 기름에 튀긴 닭 요리.

우적우적. 크으!

트림이 아닌, 감탄사를 내뱉으며 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훌륭한 조합이다.”

기름기 많은 닭튀김에 씁쓸하고 톡 쏘는 차가운 맥주. 이보다 더 좋은 배합도 달리 없으리라.

“예,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무림맹주.”

“…예?”

“어떤 사람이야? 네가 보기론.”

천마는 한잔 받고 한 입 한 후에, 바로 본론부터 찌르고 들었다.

절대로, 음식에 혹할까 봐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으음~ 소인이 보기로는 글쎄요.”

시종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톡. 쪼르르!

버릇없이, 권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한 잔 크게 따라 마시면서.

“참으로 이상적인 분이십니다.”

“이상적이라.”

미묘한 어감에 천마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현 무림맹주 오운풍.

대외적으로 그는 무림맹주로서 이상적인 인물이라 일컬어진다. 여기서 이상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유능하지도 무능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평하는 이들이 당장 손익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대협께서도 아시겠지만…….”

“교주.”

“…예?”

“교주라고 불러라. 대협이니 소협이니 그딴 위선 잔뜩 묻은 말은 질색이니까. 우선 한 잔 받고.”

꼴꼴꼴. 쭈욱!

“허, 과연 호탕하신 분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교주님…….”

천마가 권한 술을 두 손으로 받으며, 시종의 얼굴에 긴장이 풀린다. 속에 난 불을 끄듯 한 잔 들이켠 그는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무림맹은 무림맹주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만요.”

맹주는 분명 무림맹을 대표하지만, 그가 무조건 맹의 지지를 받지는 않는다. 이끄는 방향에 따라서 어떤 부류는 이득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한다.

또한 정도 무림맹은 세력 자체가 아주 크기 때문에, 맹주의 방향이 자신들에게 손해가 가지 않아도, 어떤 장로들은 일부러 하려는 일에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일종의 길들이기, 혹은 자신들의 세력 과시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권력 다툼, 다음 혹은 다다음 대의 맹주가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

“개판이군.”

천마가 짧게 평하자, 시종이 그 뒤를 받았다.

“진흙탕입니다요. 아주.”

그래서 맹주와 함께하는 장로들은, 맹주가 지나치게 유능하면 불편해한다.

유능한 이가 맹주로 선출된다면, 그는 맹 전반을 틀어쥐면서, 힘을 단 하나로 모으려고 할 수 있다.

장로들의 권력은 크게 제한되고, 그게 고착화되면 나중에는 맹이 장로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유능한 맹주는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면 또 곤란하다.

당장 장로들 입맛에는 맞겠지만, 사방에서 흔들어 대는 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정을 내렸다가 엎어지기를 반복.

혼란만 거듭하다가 아예 맹 자체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예. 구렁이 같은 늙다리들 때문에 참 말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천마를 응대하며 붙잡으려고 하던 시종은, 점차 술기운과 함께 속엣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천마는 혀를 차고 적당히 시종을 추어주며, 그의 입이 점점 열리도록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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