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진흙탕 (5)
사전 회의에서 나온 말은 바로 맹주에게 직보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리그웨더가 직접 하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오운풍은 혀를 차며 그날 저녁에 회의를 열었다.
바로 전날, 천무학관이 도착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맹주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이번 안건이 보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인사치레가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간 지 고작 1각 지났을 무렵.
“…지금 뭐라고 하시었소?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삼주(三住) 중 한 명인 섭광생이 되물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리지요.”
사실 그가 귀가 나빠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정보단장이라는 책무는, 서류만이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말을 듣고 판단을 해야 하는 자리니까.
그 정도로 청력이 떨어졌다면 일찍이 단장을 사임하는 편이 맞았다.
하지만 방금 리그웨더가 한 말은,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머리를 의심해야 할 정도의 내용이었다.
“천무학관은 무림맹에 옛 천마신교의 내공 심법을 전달하겠습니다. 그 어떤 조건도, 요구도 없는, 무상 제공입니다.”
“…….”
섭광생은 잠시 굳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귀도 머리도 멀쩡했다. 하나 그랬기에 섭광생은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얼굴에 노기를 띄워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불측하기 짝이 없는 사마외도들의 마공을, 무림맹의 무인들이 배워야 한다. 이렇게 말한 것이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도무림맹에게?”
나이 든 무림고수가 느릿하게 안색이 붉게 변해 가는 모습은 꽤나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예.”
리그웨더는 짧게 답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섭광생이 하는 말에는 가시가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 대신, 아예 통째로 삼켜 버렸다.
“허허… 허허… 허허…….”
그래서 차라리 반박을 기다렸다가,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는 섭광생.
리그웨더는 그런 그에게 한 마디를 더했다.
“한 가지 정정하자면, 천마신교는 섭광생 대협의 말씀처럼 불측한 사마외도는 아닙니다. 그저 무력을 조금 숭상하는 종교단체일 뿐이지요. 화산이나 소림처럼.”
“학과장? 지금 무슨 망발을……!”
벌떡!
천하의 마교를 화산, 소림과 비교하는 말에 섭광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상세한 것은 전 무림맹 군사이셨던 제갈유진님께 직접 들으시길. 간단히 한두 마디로 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더군요.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
제갈유진.
그녀를 언급하자 막 발작하려던 섭광생이 주춤했다. 아무리 그가 맹의 정보단장이고, 그래서 견문이 많다 해도, 대격변의 날을 직접 겪은, 살아 있는 전설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눈에 리그웨더의 차가운 눈동자가 들어왔다.
“정도무림맹과 천마신교. 수백 년에 달하는 오랜 악연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밝혀진 사실로 그 악관계는 일부 우연에서 비롯된 오해이거나, 혹은 누군가 불측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천마신교를 만인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공작에 의한 것이더군요.”
푸른 눈. 냉정한 눈. 무슨 말로 포장해도, 그 본질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눈이.
“그리고 귀 맹에서는… 때로는 몰라서, 때로는 알고도 세파를 거역할 수 없어 침묵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정확히는 모르실 겁니다. 저 일과 연관되지 않으셨으니까, 그렇지요?”
“크흠…….”
“어흠! 그, 그렇소…….”
장내는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맹주와 천무학관이 동석한 회의. 이 자리에 참석한 인원들은 대개 나이가 많다.
그리고 나이가 많다는 것은 세상에 많은 부조리가 있고, 때로는 그 부조리를 어쩔 수 없이 외면해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닫는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 불려 나온 이들은, 과거 무림맹의 치부를 알거나, 혹은 몰라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리그웨더의 짤막한 말이 더욱 싸늘하게 들렸다.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러니 닥치고 따르시지요.
-아니면 뭡니까? 제가 세간에 이 모든 것을 다 까밝힐까요?
-모르는 척해 줄 때 그냥 넘어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좋소이다. 본 맹과 마교… 아니 천마신교 간의 감정의 골은 대단히 깊지. 하지만 그 문제를 차치해도, 무공의 전수에는 여전히 위험이 존재하오.”
분위기를 바꿀 겸, 과천성 장로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는 리그웨더의 분홍빛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확히는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느릿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마… 아니, 천마신교의 내공심법은 세간에서 마공이라 불리오. 학과장께서는 그 의미를 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안다면 더욱 납득하기 어렵군. 마공은 분명히, 정종 무공에 비해 일견 성취가 빠르나, 대신 수행자의 몸에 큰 부담을 주고, 여차하면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오.”
과천성이 조금 시선을 들어, 리그웨더의 이마를-여전히 눈과 마주치는 것을 피해-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툭하면 주화입마를 일으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공. 그런 걸 본 맹의 무인들에게 익히게 하라고? 천무학관은 멀쩡한 사람들을 실험체로 삼겠다는 생각이오?!”
과천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끝에 격분이 터져 나온 까닭이다. 리그웨더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정성에 대한 문제라면, 귀 맹이 부담하실 필요 없습니다. 맹의 인재들은 천마신교의 많은 신공 중에서, 안전이 검증된 내공심법만을 골라 취사 선택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냔 말이오! 그 마공의 안정성의 검증을 누가……!”
“저희 천무학관에서 하겠습니다. 아니, 이미 검증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원자들에 한해서.”
“……!”
“……!”
뚜욱.
그치는 소리가 난 것처럼, 회의장의 모두가 굳어 버렸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후, 삼주의 마지막 한 명인 백일봉이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오. 학과장?”
“정말입니다. 본인 무력의 상승을 원하는 학관생들 중 자원자를 다수, 그리고 연구 목적으로 직접 익히는 교관 교두들이 있습니다. 그 수는 가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요.”
“…….”
“…….”
“그리고 현재까지는 고문헌에서 말하는, 위험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외려, 평균적으로 개개인의 무력이 최소 2할 이상 증대됨을 학인했습니다. 그래서…….”
“미쳤군! 미쳤어! 리그웨더! 귀하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알고 계시오?”
와당탕!
백일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리그웨더에게 삿대질을 했다. 맹의 감찰단주로서, 항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이 정도다.
당연히 다른 이들도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번듯한 무인들을 기르는 것이 학관의 본분이오. 그런데 뭐?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공? 앞날이 창창하던 젊은이를! 죽거나 미친 광인으로 만들 수도 있단 말이오! 이런 인체 실험을 이미 진행 중이라고? 당신, 그러고도 인간……!”
멈칫.
폭갈을 쏟아 내던 백일봉이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천무학관의 리그웨더. 그녀의 외형은 얼핏 보면 그냥, 금발 벽안의 서역 미인으로만 보인다.
조금 낯설지만 그래도 인간.
하나 지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이 싸그리 날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백일봉 대협.”
“…….”
차갑고 푸른 눈은 한없이 깊은 심연을 연상하게 했다.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실리뿐.
“저도 이 조치가 다소 무리인 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원 대수복. 언제고 되살아날 리치왕과 그의 수하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 천무학관에서 마공의 위험성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렇게 판단한 까닭입니다.
“허허… 이거. 내가 실로…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무림맹주 오운풍이 개탄했다.
사람을 잘못 봤다니. 면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비난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는 리그웨더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오운풍 자신을 자책하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천무학관.
대격변의 날 이후, 학관연합체를 구성하고, 중원의 수많은 문파 및 단체에 무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학관.
그런 곳의 수장이라면, 인덕이 넘치고 사람을 귀히 여기는 그런, 군자나 덕망 있는 이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너무 사람이 좋아 만만한 존재로까지 여겼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제껏 전혀 잘못 알고 있었음을.
리그웨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애초에 인간과 다른 종이며, 천년을 넘게 사는, 더군다나 강하고 지혜로운 자.
그런 그녀가 왜 인간에게 호의적일 거라고 막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걸까.
‘의심하고 회의했어야 했다. 이런 실책을…….’
세상에 공짜는 없다. 천무학관이 중원 전체에 풀어 낸 많은 도움은, 의도가 있었기에 행한 ‘작업’의 일환이다.
그러니 무림맹의 맹주라면, 그들의 선행을 보고도 좀 더 의심하고, 다른 시각으로 보고, 저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계속해서 자문해야 했다.
그게 맹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을 이제껏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결과가 지금 이 순간 드러났다.
오운풍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게으르고 무신경한 사람이었나를 지금 와서 반성하게 되었다.
“잠시 지나치게 감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군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리그웨더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녀는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감정에 좌우되는지를.
좋지 않은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감돌 때,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얼마나 충동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리치왕. 그도 시작은 인간이었으니.’
“그간 천무학관이 앞서서 세칭 마공, 천마신교의 내공심법을 익힌 것은 다가올 전쟁에 그것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마공. 역혈신공으로 대표되는 13종의 내외공.
가급적 정공을 익힌 이들도 주화입마에 들지 않도록, 천마가 직접 손을 보아 바꿔 버린 무공이다.
천무학관의 젊은이, 중년인, 장년인 모두가 시범적으로 익혀 보았으며, 현재까지는 딱히 부작용이라 할 것이 없다. 반면, 그 위력은 대단했다.
수련한 지 고작 2주 만에 전력의 2할 정도가 급상승. 이건 전략 전술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더 이상 중원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며 유격전을 벌일 게 아니라, 탐색 및 토벌이라는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첨단을 달리게 되는 것이 바로 ‘공군’
테이밍된 그리핀을 타고 적들의 상공으로 날아가, 항거할 수 없는 불벼락을 내릴 수 있는, 새로운 군제의 탄생이다.
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략 전술의 폭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었다. 하나 여기에 한 가지 전제가 깔렸으니.
그리핀을 길들이는 자. 그리고 타려는 자는, 몸속에 몬스터의 어두운 기운과 비슷한 무언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마공, 옛 천마신교의 내공심법들이다. 그리핀에 올라타서, 공군이 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마공의 수련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물론, 완벽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본 학관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작용의 여부를 엄밀히 검증. 수행자가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는 것을 최소화할 것입니다.”
“…….”
“…….”
무공. 그것도 상승의 무공을 그냥 전해 준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냥 들으면 너무도 좋은 말이었으나, 무림맹 인사들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혹여 말이오. 리그웨더 학과장.”
한참을 침묵하던 끝에 오운풍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무림맹주.”
“이건 강제 사항이오? 본 맹이 원하지 않는다면 물리력을 행사할 생각이오?”
“그런 일은 결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맹주의 물음에 리그웨더는 즉각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은 가능하되, 물을 먹는 것은 말 스스로의 의지.
“원하지 않는 이에게 무공을 익히게 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지요. 저도, 천무학관의 중의에서도 결론을 내린바, 그런 강압적인 수단을 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흐음…….”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엄연히 개인의 자유다.
나쁘게 볼 말이 아니건만, 맹주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좋소… 그럼 혹시, 본 맹이 귀 학관의 제공 의사를 무시하고, 그 신공의 습득을 거부하겠다면?”
“먼저 묻겠습니다만, 그 결정은 무림맹에 가입한 모든 맹원들의 결정입니까? 아니면 맹주님의 결정입니까.”
리그웨더가 되물었다.
“…그럴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무릇 조직의 수장은 때때로 조직원들 개개인의 의사를, 때로는 강제로 집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제 오운풍은 이를 악물기까지 했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그게?”
오운풍은 리그웨더의 담담한 말에 눈을 홉떴다.
“말 그대로, 알겠다는 말입니다. 무림맹이 그런 결정을 내리신다면, 저희는 존중할 수밖에요. 이 일로 어떤 위해도, 압박도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호오.”
맹주의 얼굴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어진 리그웨더의 말에.
전보다 두 배는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신 무림맹에 기대했던 역할을, 대신해 줄 다른 이들을 찾을 겁니다. 다른 학관. 중소 문파. 심지어 왕이라 불리는 지역 유지가 그 대상이 되겠지요.”
“……!”
“저희, 아니, 저에게 인류연합. 이는 어떻게든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이 계획에 무림맹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하십시오. 그렇게 스스로를 고사시키고 싶으시다면.”
분명 사자로 왔을진대, 리그웨더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아쉬운 것은 무림맹.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