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마공과 정공 (1)
“으어어어… 그래서 제가… 제가아…….”
“그래그래. 이해한다.”
한편.
리그웨더가 맹의 수뇌부와 설전을 벌일 때, 천마는 시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대작이 아니라 넙데데한 얼굴의 시종과 마주 앉아 그의 주사를 들어 주고 있었다.
“크흑… 정말… 제 마음으을 알아주시는 부느은… 교주님 뿐입니다아아…….”
“아니야. 아니야. 내가 딱히 그리 대단한 사람인가.”
처음에는 웃다가, 다음에는 주절주절 지껄이다가, 이제는 급기야 질질 짜기까지 하는 시종.
“그저 그대가 미처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야. 자리가 자리이지 않은가. 서로 속을 털어놓기 힘든.”
“그러게요~ 어찌, 하.”
술에 취한 시종은 말이 많았다.
아무래도 업이 업이라, 맹의 손님들을 상대하며 온갖 험한 꼴을 당하다 보니, 그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이놈의 정도 무림매앵~ 겉 다르고 속 다른 양두구육으로 점철된 놈들 같으니. 사람이 솔직하게 속을 도통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랍니다아~”
“하하. 이곳이 다소 그런 구석이 있다고 듣긴 했네. 엄격, 절도, 명예. 그러다 보니… 숨 막힘, 가식, 위선, 이런 것들이 생겨나지.”
후르륵.
천마는 한 잔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거든. 결국은 한계가 찾아오지. 문제는… 혼자 그렇게 속앓이하고 있는 사람을 아무도 못 알아봐 주거든.”
“제 말이! 제 말이 그겁니다아--!”
마치 지음(知音)이라도 만난 듯이 탁자를 쾅쾅 두드리는 넙데데 시종.
그는 어느새 못 하는 말이 없어졌다. 주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고성방가 한다거나 물건을 때려 부순다거나 하는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뭐,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난 맹 바깥의 사람에게, 오만 가지 비위 사실들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다 바치고 있으니.
빈객을 맞이해야 하는 시종이 부릴 수 있는 주사 중에서는 최악의 주사라고 할 만한 것이다.
‘거참. 분명 무림맹에서도 접객을 담당하는 시종을 아무나 뽑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아마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림맹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싸움을 말리려는 입장이었다.
천마라는 현경급-탈마에 대해 그는 아는 바가 적었다-고수가, 무림맹 소속 고수들의 훈련을 보고, 시비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그래서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천마를 붙잡아 둘 생각이었지만.
시작이 어쨌든 간에 과할 정도로 술이 들어갔다.
“자네도 차암~ 힘겹게 사는군 그래. 그게 다 처자식을 둔 가장의 비애지.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들. 내가 굶으면 모를까 가장 된 도리로, 처자식을 굶길 수야 없지 않나.”
“그렇지요. 그렇지요. 교주님.”
“한데… 내가 안타까운 건 말일세. 자네가 이렇게 속으로 곪아 들어가는 걸, 자네 내자나 자식들은 알고는 있나?”
“…….”
그리고 일단 술이 들어가고 자제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따금씩 정곡을 찌르는 천마의 말에, 벽에 쩍쩍 금이 가더니.
“그래… 그럴 줄 알았네. 참 너무들 하는군. 아니… 너무하는 건 자네 처자식이 아니지. 자네가 그리했겠지. 그렇지 않은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픔을 건네주고 싶지 않았겠지. 고생하는 건 나 혼자면 된다. 이렇게 생각했겠지. 아네. 이 사람아, 다 알아. 누군들 아끼는 사람 마음에 그늘을 늘어뜨리고 싶겠나.”
“…크흑. 으흐흐흑…….”
결국에는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옛말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어허, 이런. 잔이 비었군. 한 잔 더 받게. 괜히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해서 미안하네.”
“감사합니… 교, 교주님. 어찌 이러십니까?”
시종은 눈물을 삼키며 잔을 내밀다가 화들짝 놀랐다.
천마가 술병을 두 손으로 잡고 공손히 따라 주는 것이다. 듣기로 자그마치 천마신교의 지존이라는 이가!
“본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신분 고하를 따지고 싶지 않네. 내가 교단의 교주라지만, 그대 역시 고생 많은 한 집안의 가장 아닌가?”
“…….”
“어차피 따라 주는 술에 손 하나 더 붙은 걸 가지고 뭘 그리 대단하게 여기나. 어서 받게. 팔 떨어지겠네.”
“흐. 으윽. 흐흐흑…….”
시종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천마. 마교의 교주.
그 위치는 무림맹에서 얼굴도 함부로 마주치지 못하는 무림맹주에 못지않다. 아니, 어쩌면 더 존귀할 것이다. 마교라는 단체에서는 신이나 다름없이 군림하니까.
툭. 쭈우우욱!
그런 그가 두 손으로 예를 갖춰 따라 주는 술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달았다.
정확히는 마음의 상처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콧대 높은 무인들의 진상질에 입어 왔던 마음의 상처가.
“교주님은… 정말… 듣던 것과 다른… 전부 거짓말…….”
“음? 방금 뭐라고 했나?”
“아니, 아닙니다. 제가 소싯적에… 어…….”
계속 마신 술이 과했던 걸까. 아니면 천마가 따라 준 술에 마음이 풀린 걸까.
“그르륵… 끄응…….”
시종은 기어코 얼마 지나지 않아 널브러져 버렸다. 방 안 가득히 퀘퀘한 술 냄새만 자욱하게 남기고.
“…후우. 이것도 참 오랜만이군.”
후욱!
천마는 내공을 돋워 몸에 들어온 술기운을 싸그리 몰아내 버렸다. 그리고는 인사불성으로 쓰러진 시종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참… 미련하기는.”
솔직히.
천마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가장의 책임도, 가족 때문에 일터에서 모진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참기만 해야 하는 시종의 속마음도.
구옥경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무예에 두각을 드러냈다.
당연히 대우는 넘칠 정도로 받았고, 남의 말이나 윗사람을 대하며 자존감이 쪼그라드는 경험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뒷처리를 해야 하겠는데… 뭐, 그 정도는 술 깨서 본인이 하겠지.”
드르륵.
그럼에도 천마는 교주였다.
십만 마교인들의 우두머리이며, 아무리 강자존이 교의 율법이라 해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때때로 그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 교인들도 적지 않게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 못 할 짓이란 말야. 이 짓도.”
그는 잘 대응하지 못했다.
애초에 근본부터 약자로 태어나질 않았고, 그런 그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했으니까.
수련하고, 강해지고, 싸우고, 더 강해지는.
오직 그것밖에 없는, 어찌 보면 한쪽으로 편향된 삶.
덜컥. 탁.
하지만 십만 마교인들의 우두머리. 교주라는 자리는 때때로 솔직한 자신이 아니라, 교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로 난감해할 때 천마가 떠올린 것은, 바로 자신의 사부가 한 말이었다.
-굳이 고민에 해결책을 마련해 줄 필요 없다. 그냥 맞장구만 쳐 줘라. 네가 다 옳고, 지금 잘하고 있다고.
-그게 힘들면 그냥 듣기만 해라. 가끔 고개 좀 끄덕여 주고. 혀도 차 주고. 아, 너는 딱 한마디만 안 하면 된다.
-다 네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 더 노력하라고. 그 말만은 하지 마라. 애초에 갉아 먹히는 이에게는 상처에 뿌린 소금과 같으니.
“후우…….”
천마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 가식을 떨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걸로 충분한지.
따지고 보면 그냥 듣기 좋은 거짓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실행해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사부의 말이 맞았다는 걸.
천마에게 술병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냥 고개 좀 끄덕여 주고, 그렇지 그렇군 하고 맞장구만 쳐 줘도.
다음 날이면 언제 근심을 했었냐는 듯 쌩쌩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으니까.
-감사합니다, 교주님. 하해와 같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 그래.
그럴 때마다 천마는 어색했다. 미미한 자기혐오도 살짝 들었다.
-그냥 내가 처리해 줄 수 있는데.
자신보다 약한 이가 토로하는 고민은, 대부분이 보잘것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천마가 손 한 번 휘두르면, 바로 해결될 만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래서 천마가 손을 쓰면 일이 오히려 복잡해지거나 나빠지거나 했다.
딴에는 교주라는, 천마신교의 기둥인 그가 교단의 일에 신경을 꺼 버린 까닭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뭐, 어쨌든 간에.”
시종의 밑도 끝도 없는 주사를 두 시진가량 받아 준 끝에, 천마는 그럭저럭 요긴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현 무림맹주.
무당파 장로 출신인 오운풍이라는 인물이었다.
‘적당히 때가 묻고 세간과 타협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순한 성미라…….’
한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 조직의 말단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안다.
그리고 그런 위치인 시종은, 맹의 장로들은 몰라도 무림맹주 본인에 대한 험담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건 맹주가 인성만큼은 제대로 박혀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맹주인 이상 무인으로서는 상당할 테고.”
천마는 얻은 정보를 토대로 오운풍, 현 무림맹주에 대한 판단을 다시 내려 보았다.
최소 화경의 극. 어쩌면 현경.
현 무림맹의 얼굴이라는 면에서 보면, 일신의 무예야 충분히 고강하여 모자랄 것이 없다.
듣기로는 무당의 절기인 태극혜검을 대성한 인물로 일대 일, 혹은 다대일 전투에서 전천후로 무력을 보일 수 있다니까.
“장로들에게 견제당해서 뭘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 했고.”
다만 오운풍 개인의 무위가 뛰어난 것과, 그가 무림맹주로서 뛰어난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 된다.
사람이 만드는 조직들이 수장에게 필요로 하는 첫 번째 덕목은, 힘이 아니라 정치력이다. 이는 비단 무림맹만의 문제가 아니라 덩치 큰 조직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단기적으로는 포용력, 꾸준함, 시의적절하게 조치를 내리는 과단성, 순발력 등이 있다.
그리고 장기적인 측면에서 맹 전체의 전력이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의 수장으로서 가져야 할 철학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인맥이 없다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천마는 잠시 장고에 빠졌다.
무당파 출신의 오운풍. 마교의 입장에서 무당파는 딱히 악연도 좋은 인연도 없다.
역사적으로 마교가 가장 충돌을 많이 일으킨 방파는 청성파나 곤륜파, 그리고 가끔은 화산 정도가 해당된다.
‘참. 개같은 놈들이라니까.’
딱히 악감정을 가지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화산이나 청성은 묘할 정도로 마교와 싸움이 잦았다.
일단 경계하면 바로 짖어대고, 다음에는 물어뜯는 놈들이었으니 개나 다름없다. 덩치가 작아서 그런 걸까.
외려 무림맹에서 가장 강대했던 이들. 소림과 무당은… 솔직히 마교와 큰 충돌이 없었다.
싸움과 견제는 분명 있었지만, 그게 시일이 지나도 용서 못 할 만큼 극악한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을까?”
천마답지 않게, 이번만큼은 묘한 감회가 서렸다.
빈객 전담 시종.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을 알 수 있다던가. 그가 술에 취해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낸 와중에도, 끝까지 맹주에 대한 험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묘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다. 이제껏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임에도.
“흐음.”
천마는 그렇게, 오랜만에 혼자 사색을 하며, 이 정치질에 어떤 패를 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