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마공과 정공 (2)
다음 날.
“교주님, 간밤에는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전담 시종이 아침이 되자마자, 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넙데데한 얼굴은 숙취 때문인지 부석부석하게 부어 있었다.
“덕분에 별일 없었네. 음… 조반으로는 좀 과하지 않은가?”
천마는 그가 차려 온 아침상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맹의 빈객이라 해도 받기 쉽지 않은, 엄청나게 공을 들인 호화로운 식사였던 것이다. 고기 반찬부터 조를 넣은 밥까지, 거기에 반주로는 여아홍. 입가심으로 들기에는 꽤 비싼 술도 올라와 있었다.
“하하… 대천마신교의 지존이신 분께서, 이 정도로 과하다고 하십니까. 저어. 그런데…….”
눈이 잔뜩 부은 시종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인이… 어제 심히 실례를 한 듯하여…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쯧.”
“…교주님?”
“본인은 말이지. 무림맹의 이런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
천마는 호화로운 식사를 받아먹으며 툭, 하고 말을 내던졌다. 덕분에 시종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어찌 죄를 물어야 할지…….”
“그 말투. 그런 자세. 그게 마음에 안 든다니까. 자네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나?”
“…예?”
시종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마는 게걸스럽게 밥과 찬을 입으로 쏟아 넣으며 우물우물, 한참을 씹은 다음 말 했다.
“예의범절이 너무 과하다는 말이야. 말투며 행동이며, 책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는 거. 보는 이쪽이 불쾌해. 마치 내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
“그리고, 실례를 한듯 하여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다? 뭐 이런 두루뭉술한, 구렁이 담 넘어가는 말이 있나? 사내가 사내답게. 사과를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거지.”
“…어.”
시종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천마의 지나치게 솔직담백한 성격은, 이제껏 맹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서 처음 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접객 담당. 그는 곧 얼굴을 고치고 두 소매를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 제가 간밤에 술이 과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음. 좋아.”
끄어억!
한 식경 만에 호화로운 밥상을 다 비워 버리고, 여아홍까지 홀라당 비워 버린 천마.
그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여전히 초조한 안색의 시종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또 남았나?”
“그… 소인이…….”
시종은 안색이 창백해지다가, 다시 펴다가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술이 과하여 너무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셔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
풀썩.
시종을 보지도 않고, 푹신한 침상에 몸을 누인 채, 천마가 말했다.
“나도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싸그리 다 잊어버렸다고. 그러니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
“여튼, 실례한 것 없고, 사과할 것도 없으니, 가서 오늘도 일하게. 먹고살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 않나?”
“……!”
시종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술이 과했다고 해서, 현경의-탈마의 의미를 잘 모르는 그였다- 고수가 지난밤의 이야기를 싸그리 잊는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마의 저런 모른 체가 한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또. 또. 그냥 1절만 해. 은혜는 무슨.”
“하하. 알겠습니다. 이 입이 방정이군요.”
이제 적응이 된 시종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제 입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가외로 부탁하나 하지.”
천마는 손사래를 치며 시종에게 말했다.
“예, 무슨 분부이신지요?”
“무림맹주.”
“……!”
“좀 보자고 말 좀 전해 줘.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독대로 보자고.”
오운풍이 시간을 낸 것은 저녁 즈음이었다.
그는 손님의 객실도, 자신의 집무실도 아닌, 외딴 서재로 천마를 불러냈다.
“누추한 곳에 귀인을 모셔 송구하오. 노부가 입장이 있어서.”
“음. 감수하지.”
털썩.
그래도 깨끗이 청소는 해 두었고, 주안상은 단촐했지만 향기가 그윽한 것이 보기드문 명주를 준비해 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쪼르륵.
“와. 이거 엄청나네. 무슨 술이야?”
“50년 된 공부가주요. 마음에 드시나 보오”
“하, 과연… 이름값을 하는군.”
공부가주.
유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공자. 그 가문에서 빚어내는 술이다. 딱히 비전이나 비술이라 할 것은 없지만, 오로지 좋은 물과 좋은 쌀로 빚어 만드는, 기본에 충실한 술.
한 해에 담그는 양도 얼마 되지 않고, 돈에 파는 술이라기보다 명사들에게 선물로나 진상되는 귀한 술. 그런 공부가주는, 천마도 처음 맛보는 술이다.
뭐, 전생에 교주였을 때, 구하려면 못 구할 것은 없었지만, 마교의 교주로서 유가가 만든 술맛이 궁금하다고 구하려는 건 뭔가 구차스러웠으니까.
“입에 짝짝 붙는다. 저 와중에도 거긴 안 망했네?”
“아니, 가문은 사라졌소. 대격변의 날에 입은 피해가 너무 컸지.”
무림맹주가 씁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공부가는 유가의 뿌리인 공자의 가문. 술만 빚어내는 곳이 아니라, 지역의 명사로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대격변의 날, 사방에서 양민들이 몬스터에게 학살당하자, 그들은 격문을 돌려 인근에서 의용군을 결성했다.
무인이든 문인이든, 공자의 이름을 추앙하는 이들은 합심하여 그들과 함께 싸웠고, 그렇게 무림 문파도 아닌 일개 문인 가문이 자그마치 반년을 버텨 냈다고 한다.
몬스터 웨이브. 그 괴물의 파도 속에서.
“…조금 의외네. 공부가쯤 되면 따로 후손을 도피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하고자 하면 그랬을 거요. 본 맹도 그리하라고 권유했고. 하나 공부가는, 조상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 없다며, 열 살 먹은 장손까지 그 자리에 남았소. 자진해서.”
-우리가 살자고 빠지면, 이곳에 우리를 보고 모여든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선조께서는 춘추전국시대. 저 전쟁의 시기에서 사람의 도리를 외쳤던 분이다. 아무리 핏줄이 중요하다 한들, 그 가르침을,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공부가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라 왔던 보답을 할 때가 왔다. 옛말에 남아로 태어나 죽을 자리 얻기조차 쉽지 않다 했으니!
그리고는 장렬하게 산화했다. 공씨 성을 쓰는 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땅에 뼈를 묻었다고.
“…….”
천마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륵.
공부가주. 그들이 남긴 마지막 유산.
그들의 술을 담은 잔을 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명예가 어떤 건지 아는 이들이었네.”
그건 사라진 명문가에 천마가 보내는 진정한 유감이었다. 평소에 조상 이름 팔다가, 여차하면 꼬리가 빠지게 튀는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던가.
그런 한심한 것들이 유가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천마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이야기다. 그래도, 책임질 줄 아는 가문이 하나는 있었구나. 하고.
쭈우욱!
이 술처럼. 화려함 없이 담백한, 그저 본분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공부가주처럼.
천마는 잠시 감상에 젖어 주향을 음미했다. 아마도, 이 날 이후로 이 술을 다시 맛볼 일은 영영 없으리라.
“멋은 있지만… 그래도 어리석어. 본 교와는 맞지 않는 방향이야.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 거잖아?”
“…귀교 역시 그동안 험난한 길을 겪었던 걸로 아오만.”
천마의 냉소에 오운풍이 돌려 힐난했다.
그러는 마교 너네야말로, 죽으면 죽었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텼지 않느냐는 뜻이다. 천마는 그에 으쓱 어깨를 추어 보였다.
“겪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거지. 한의 대장군은 한때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을 겪었고, 구천은 부차의 똥을 핥아 먹으며 살아남았다.”
“…한신의 고사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이야기로군.”
무림맹주는 천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생각 외로 역사에 박식하다고 속으로 뇌까렸다.
‘명예로운 죽음보다 구차하더라도 산다라… 명분보다 실리를 따지는 인물인가?’
방금의 문답으로 다시 한번 정보를 확인한 오운풍.
비록 대외적으로야 온화하다 못해 허점 많은 이라고 불리지만, 그 역시 노회한 무림맹주다. 뱃속에 구렁이 몇 마리는 당연히 품고 있었다.
담당 시종이 알현 요청을 알려 왔을 때, 맹주 역시 그시종을 통해 천마가 어떤 성격인지 시시콜콜히 물었다. 오늘 약속을 저녁 늦게로 잡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실제 맹주로서 일정도 많았지만, 천마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더 파악해 두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오운풍은 조금 더 속내를 살펴보려 천마의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륵.
천하의 무림맹주가. 마교의 교주에게 두 손으로.
“…….”
세간 사람들이 보면 턱이 빠지고, 마교의 교인들은 입꼬리가 찢어져 귀까지 오를 장면.
“호오.”
하지만 천마는 조금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을 뿐, 잔을 한 손으로 받아 가볍게 들이켰다.
“그쪽도 한잔 받지 그래? 아까부터 나만 마시는데.”
그러고는 똑같이, 맹주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오운풍은 그 모습에 살짝 눈이 가늘어졌다.
‘행동에 거침이 없다. 풍기는 기세로 보아서는 자아가 대단히 높은 인물인데… 오만하지 않은 건가?’
무림맹주의 두뇌가 바쁘게 돌아갔다. 일거수일투족으로 상대의 성향이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무림맹이라는 조직의 장으로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탈마의 고인께서 내리는 술. 감사히 받으리다.”
처억.
소매로 잔을 감싸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천마는 피식. 웃었다.
“술자리에서 술잔 오가는 걸로 뭔 감사? 그러는 맹주야 말로 현경이잖아. 꽉 찬 지 한 일이 년 됐나?”
“……!”
오운풍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제껏 흐트러짐이 없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자가… 어찌?’
가슴이 서늘해 왔다. 이쪽은 조심조심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인데, 상대는 바로 알아본 것이다.
꽉 찬지 일이 년?
그건 현경의 마지막에 다다른 시기였다. 오운풍이 최고의 성장이자, 최악의 벽을 마주한 순간이었는데, 그는 이날까지 그걸 누구에게도 말 한적 없었다.
칠 할을 드러내고 삼 할을 숨기는 것.
무림맹의 장로들이, 자신의 무위를 실제보다 낮게 보도록 애썼다. 현경의 극. 알렸다면 축하와 경애를 받았을 일을, 위기시에 꺼내 들 숨김 패로 남겨 두었다.
그만큼 오운풍은 은근히 독한 곳이 있었다.
그랬는데.
“어찌… 아셨소?”
한눈에 간파당했다. 오늘 처음 마주한 자에게.
어쩌면 그냥 찍어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표정에서, 행동에서 결국 들통이 났을 터.
맹주의 반문에 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태극이 손끝에서 빙글빙글 도는 게 보이는데, 모르면 그게 이상하지. 맹주, 태극혜검이 아니라 그냥 태극검만 죽어라고 익혔지?”
“……?!”
“당시에는 갑갑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어. 장삼봉 선사의 요결은, 사실 태극검에 들어 있거든. 후대에 손을 더 댄 태극혜검이 아니라.”
“귀하… 아니, 교, 교주께서 본파의 비의를 어찌……?!”
맹주는 말을 더듬다 말고 혀를 깨물 뻔했다.
휘르르르…….
천마의 손위로, 술잔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잔 바닥에 남았을, 몇 방울의 술이 허공에 떠올라,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소태극……!”
숨이 막히는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