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마공과 정공 (3)
휘르르르...
태극이 돈다. 빙글빙글 돈다.
허공에 아로새겨진 문양을 구성하는 것은 공부가주.
천마가 비운 잔의 바닥에 남았던, 몇 방울의 술이다.
벌떡!
무림맹주는 경악한 나머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다, 당신이 어떻게! 본 파의 절기를 알고 있는 것이오!”
“뭘 이 정도로 그래?”
천마는 웃었다.
허공섭물로 술 방울을 아롱지게 하는 것은, 보기에 신기할 뿐 크게 어렵지 않은 재주다.
현경에 비교되는 탈마의 고수라면, 이 정도 장난은 눈감고도 칠 수 있다. 그게 상식이지만.
“이 정도라니! 내가 장님으로 보이시오?”
오운풍. 무당파 장로 출신인 그에게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창날처럼 내뻗으며, 천마의 손에서 돌고 있는 소태극을 가리켰다.
“그 내기 운용은 그저 흉내 내기가 아니오! 그래서 묻는 거요! 마공에 물든 몸으로 태극을? 교주가 어찌 정종 무공의 정화를 쓸 수 있는 것이오?!”
“오오.”
천마는 실실 웃었다.
고작해야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자평했는데, 그걸 본 무당파 출신 맹주의 격노라니.
이보다 더 진심인 찬사도 없으리라.
어찌 보면 그간 천마가 했던 노력이 평가를 받는 것이다.
“하긴, 자그마치 사흘을 죽어라 처 맞으면서 도망 다녔거든. 아무리 소싯적이라도 말이야.”
“……?”
“무당파… 너네 진짜 세긴 세더라.”
현 무림맹주는 모를, 전생의 옛일을 떠올리는 천마.
당시의 그는 소림 출신 맹주를 암습하기 위해, 무림맹의 천라지망을 뚫었다.
그리고 침입에는 성공했지만, 웃기게도 정작 퇴각할 때 호되게 작살이 났다.
-정도 무림맹의 최심처에서, 맹주가 피습당했다!
절대 용납불가할 일이 벌어졌으니, 맹에서 엄선한 추적자들이 목숨 걸고 따라붙었던 거다.
그게 총 7인으로 구성된 무당의 고수들.
그리고 그들이 펼친 공수일체의 태극검은, 상대하는 천마 입장에서는 욕이 나올 만큼 사기적인 무예였다.
“진짜 치사하게. 내 공격은 받는 족족 다 흩어 버리고, 지들 공격은 온갖 곡선으로 휘어져 들어오는데… 아주 그냥.”
빙그르르 하고 무당파의 태극을 묘사하는 검이 휘둘러지면.
이쪽의 공격을 휘르륵 빗나가게 만들어 버린다.
찌르기도, 베기도, 심지어 검기까지도.
강기가 아니면, 내공을 펑펑 쥐어짜서 뽑아낸 일격이 아니면, 도무지 그 벽을 뚫지 못했다.
덕분에 사흘 밤낮을 개처럼 쫓겨 다니면서, 천마는 톡톡히 뼈에 새겼다.
왜 무당이 소림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문파인지.
왜 태극검이 강호의 일절로 칭송받는 절기인지를.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지. 온몸이 아주 걸레짝이 되었다니까?”
“…….”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겨우 본 교로 귀환한 천마는, 부상을 치유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자칫 죽을 뻔했던 그는 뒤늦게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마 역시 딴에는 검술이 장기인 검사. 살기 하나는 일품인 마교의 검에 자신을 가졌다.
그런데. 무당의 느슨하고 부드러운 태극검 앞에 패하고 만 것이다.
대체 어째서?
태극검은 그냥 태극권을 검으로 펼치는 것 아니었나? 그리고 태극권은 시중에도 널리 퍼져, 동네 노인들이 건강 체조로나 하는 흔하디흔한 권법이었는데?
-강기가 아니면 뚫을 수도 없는 방어라니, 대체 이게 뭐야?
그게 평소의 생각이었는데, 무당의 검수들이 펼치는 진짜 태극검은 겪어 보니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추적자들은 천마보다 내공도 검술 경지도 낮은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죽을 뻔했다.
그 까닭은 바로 태극검.
그들이 쓰는 검법 자체의 수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패배를 맛본 천마는, 태극검을 연구하는 데 집요하게 매달렸다.
-내공으로는 내가 이기고, 경지에서도 내가 이기는데, 검술에서는 진다? 이게… 바로 그 심(心)이란 건가.
대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무가의 진리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완벽한 방어 또한 최선의 공격이 될 수 있음을 천마는 몸에 새겼다.
추구하는 방향 자체가, 자신과는 정반대. 그야말로 상극이었던 검술.
알고 보니 자신은 무당의 태극검수들이 아니라, 검술의 기예에 서려 있는 심(心). 검에 태극의 이치와 묘리를 담아 창안한 장삼봉 선사, 그에게 패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무슨… 본 파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혼자서 이루었단 말이오? 태극을?”
“가르침이라… 죽도록 처맞았으니 그 정도면 호된 가르침 아닌가? 어떤 수법인지는 몸에, 아니, 뼈에 새겼거든.”
초식 자체는 외우고도 남았다.
사흘간 내리 죽음의 위기에서 맞서 싸우며, 천마는 무당의 태극검수들이 어떤 검술을 쓰는지를. 심지어 변초가 어떻게 되는지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가끔은 그날의 기억 때문에 악몽으로 꿈자리를 설칠 지경이었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한 10년은 갈고닦았다고. 야. 10년을 배우고도 못 하면 그게 사람이겠냐? 곰이지.”
빙글빙글.
천마의 손아귀 안의 작은 태극.
그걸 바라보는 오운풍의 얼굴은 복잡했다. 자파의 비전 절기를 다른 사람이 술술 써 대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고작 10년? 마공을 익힌 몸으로 정공을 따라 한다고 그게 되오?”
“되니까 내가 왔겠지? 어이, 기분은 알겠는데 성질내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무림맹주, 애초에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까먹었어?”
“……!”
오운풍의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마교주 천마. 천무학관의 사절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왔다. 천마신교의 마공을 정파의 후예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종파가 다른 내공인데, 가르치는 사람이 잘 알아야 가르치지? 어설프게 대충 아는 놈이 가르칠 수 있겠어?”
그리고 그걸 위해서 천마신교의 교주가 직접 왔다는 것. 오운풍은 이제 신음밖에 내지 못했다.
“으음…….”
하기야, 정공의 사용자가 마공을 익히나, 마공의 사용자가 정공을 익히나, 그 난이도는 비슷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태생이 마공으로 시작한 천마가, 정공에 조예를 쌓는 것이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정도문파의 내공과 마공은 서로 융합될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한데 그런 상식이, 지금 눈앞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휘르르르.
천마의 손 안에서 일렁일렁 맴도는, 술 방울로 만들어진 작은 태극.
그냥 모양만 태극이 아니다. 오운풍은 태극권과 태극검에 대해서라면, 무당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고수다. 그렇기에 더더욱 충격이 컸다.
어찌, 마교인이 다루는 태극이 온전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태극은, 무당파의 장로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온전한 것. 말이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면, 그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만류귀종?”
“오. 감 잡았네? 맞아. 그거.”
무림맹주가 신음한 말에 천마가 끄덕였다.
검술이든, 권법이든, 창술이나 심지어 궁술까지.
모든 유파의 무술은 궁극에 이르게 되면, 결국 추구하는 바가 같음을 알게 된다.
누구는 계곡으로, 누구는 산등성이로, 산길을 올라가는 방향은 서로 달라도, 산꼭대기에 오른다는 목표는 결국 같은 것이다.
“하나 마공과 정공은…….”
“그것도 극에 올라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아. 낮에 오르나 밤에 오르나 정도. 혹은 이 산을 오르나, 저 산을 오르나 정도의 차이지.”
“…….”
“맹주 정도라면 이미 짐작 할 수 있을 텐데? 탈마나 현경의 극쯤 되면, 이미 사용하는 내공의 성질의 차이쯤 별 것 아니라는 거.”
“그건…….”
오운풍은 복잡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천마가 말하는 것이 맞다. 그도 근래에 와서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결론이다.
다만 그의 출신이, 명문 정파 중의 명문인 무당이라는 것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파는, 아니, 본 파만이 아니라 정도 무림맹은 끝내 융합에 실패했소. 한데 귀교는 어떻게?”
마공.
부작용은 있지만 위력 하나는 발군인 내공 심법.
정도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명색이 무림맹이다. 무에 대한 연구와 개선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곳이다.
당연히 이들 역시 정공에 마공을 융합하는 시도를 수없이 했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 했지만.
무당, 소림, 화산, 청성, 아미, 종남, 등등…….
심지어 독과 암기의 사천당문이나, 무예보다 술법에 더 조예가 깊은 모산파까지.
정공과 마공을 융합시켜 새로운 내공을 만든다는 건, 맹에 적을 둔 모든 문파들이 한 번씩은 매달려 본 주제다.
하지만 결국은 불가능하다고, 정도 무림맹의 최고의 무재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어째서일까. 무예에 대해, 마교의 해석이 더 뛰어나서? 그랬다면 진작에 강호는 마교 천하로 되었을 것 아닌가.
“아니, 뭐. 딱히 본 교의 심법이나 무공 해석 능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야. 그냥…….”
무림맹주의 복잡한 표정에, 천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설프게 덮으려다간, 맹주 또한 역량이 있으니 빈틈을 따져 물을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이건 교주인 그로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라는 게 문제다.
“본 교가 좀 더 집요했고, 더 미친놈들이 많이 있었을 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어. 그러니까…….”
조금 둘러말했더니 맹주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알기 쉬우면서, 매끄럽게 포장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천마는 그냥 확, 날것 그대로 질러 버렸다.
뭐,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인체 실험.”
“…뭣이?!”
“정공과 마공을 융합하는 데 선을 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그런 노물들이 많았거든. 무림맹도 제법 노력했겠지만… 본 교가 한 노력과는 양과 질에 큰 차이가 있어.”
천마는 조금, 거기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백 가지 다른 방식으로, 주화입마가 일어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수천 수만 명 단위로 집계를 내 봤어? 그중 9할 9푼은 죽는다고 해도?”
“…맙소사.”
맹주 오운풍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방식은 쓸 수 없다. 명색이 정도를 표방하는 이상, 무림맹은 마교처럼, 비인도적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귀, 귀교는 정말…….”
“아. 참고로 본 교도 지원자만 받은 거야. 여차하면 죽는 위험한 시도를, 강제로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맹주의 얼굴에 혐오가 깃들자 천마가 바삐 손사래 쳤다.
혹자는 마교에 대한 한없는 충성심으로.
혹자는 정파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으로.
혹자는 1푼의 성공 확률로 얻을, 힘에 대한 갈구로.
마교는 수천 수만 명의 죽음에서 자료를 얻어 냈다.
즉 천마가 제공하는 부작용 없는 마공은, 마교의 역사와 함께 수만 명의 목숨을 갈아 넣어 만들어진 내공심법인 것이다.
“…끔찍하기 짝이 없구료. 본 맹에 그런 것을 전수한다는 말이오?”
오운풍이 사나운 눈길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