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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307화 (308/310)

307화. 마공과 정공 (4)

“우선은, 솔직하게 말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교주 또한 한 종파의 지존으로서, 말하기 쉽지 않은 고충이 적지 않으셨음을 짐작할 수 있소이다.”

척.

무림맹주가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뜻밖의 인사에 천마는 황당해서 손사래 쳤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하나. 모르면 몰랐어도 알게 된 이상, 이 불민한 오 모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소이다.”

스윽.

감사의 자세 그대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오운풍은 정색을 했다.

그는 본래 성정이 맑고 어둠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천성을 그리 타고나기도 했지만, 무당에서 성장해 가며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도덕군자.

그게 지나쳐 호구 취급 받을 정도의 대인배.

오운풍이 당대 맹주로 추대를 받은 까닭도 거기 있었다. 맹의 장로들이 보기에는, 적당히 명분만 앞에 놔두면 조종하기에 딱 좋은, 만만한 사람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법.

“아무리 기존의 부작용을 없앴다 한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만든 내공심법이라면… 그건 정말 마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소이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무고한 희생이라니? 스스로 자원한 이들이라니까?”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소이까?”

“…뭐가?”

“귀 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강함을 추구해 왔지요. 그 가운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인체 실험까지 한 자들이 있었소이다. 그들이 교인이 아닌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일이, 정말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하십니까?”

“…….”

무림맹의 맹주쯤 되는 위치에서, 거대 문파들과 음험한 복마전을 벌이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명문이라는 이름을 뒤에서 받치는 검은 그림자들.

뒷돈, 압박, 회유, 횡령 등.

잠재적 경쟁자를 도태시키고, 신진 세력을 무너뜨린다. 한 지역의 패자로서 영역을 독점하기 위해,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음험한 일들을 벌인다.

거대 문파를 오랫동안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혹은 더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저지르는 잘못이다.

오운풍은 그런 일들을 혐오했지만, 근절도 처벌도 할 수 없었다.

뭔가 까발려서 뒤집으려 하면 평소에 으르렁대던 대문파들이, 서고 합심해서 지켜주고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답을 못 하시는구려. 역시.”

입을 다문 천마를 보고 오운풍은 씁쓸하게 웃었다.

명문의 이름을 달고 몸을 사려야 할 정파도, 안 보이는 뒷구석에서 수작질을 벌인다. 그런데 마교는?

이름부터 아예 악의 집단, 아니,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 곳이 마교다.

교인만 수천 수만이 죽었다면, 그게 공식 집계라면.

과연, 교주도 모르게 끌려가거나, 속거나 해서 희생당한 이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정도무림맹의 맹주로서 말하리다. 본인은, 천마신교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소.”

정파의 음습한 어둠과, 천마신교가 벌이는 일은 거기 묻은 피의 차원이 달랐다.

수만을 희생시켜 완성된 내공심법?

그런 부정 탄 심법을, 맹의 무사들에게 익히게 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무림맹 앞에 붙은 정도를 간판에서 떼 버려야 할 터.

하나 무엇보다, 지금도 맹에 파견된 무당의 제자들.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들에게, 저런 얼룩 묻은 심법을 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까닭이다.

“뭐, 그럼 그렇게 하든가.”

“…허?”

그리고 무림맹주는 당황했다. 거절의 말을 꺼내며 그는, 내심 잔뜩 긴장해서 언제든 내공을 끌어올릴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한데 상대가 너무도 쉽게 수긍한 것이다.

“아쉬운 건 이쪽이 아니니까. 이건 본 교에서도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거든. 그걸 받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떠넘기는, 애물단지로 만들 생각은 없어.”

“…….”

오운풍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지금 그를 보는 천마, 그의 눈길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히려.

측은함, 동정. 그런 것이 서려 있었으니까.

“무림맹주. 직접 보니 사람이 나쁘지는 않은데, 어째 그 오만한 시각은 맹주직과 함께 전해지는 모양이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긴. 너, 네가 세상의 중심이고 전부인 걸로 여기고 있잖아. 그간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거든?”

쪼르륵. 쪼르륵. 쪼르르륵.

천마는 병을 들어, 남은 공부가주를 한 잔씩, 한 잔씩 차례차례 채웠다.

퉁.

그리고 완전히 비어 버린 병.

내용물인 공부가주는 잔에 나눠지고, 속이 텅 빈 병을 맹주 앞에 내렸다.

“상단. 세력가. 심지어 제후나 왕을 칭하는 자들까지 중원에 널렸더라. 너희가 아니라도, 한 번 말이 돌면 배우려는 사람은 쫘악 널렸어. 알아?”

“……!”

무림맹주 오운풍의 안색이 확 변했다.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세력. 도전. 분란. 쇠태의 여러 단어가.

“그건… 정도무림맹은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소이다.”

“용납 안 할 거면. 어쩔 건데? 싸울까?”

“……!”

장난처럼 던져진 천마의 말.

그러자, 라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살벌한 말.

“못 싸우겠지. 그쪽이나 이쪽이나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적은 몬스터라는 너무 명확한 놈들이 있는데, 센 무공 좀 풀었다고 인간끼리 싸워? 미친 거지.”

“……!”

폭언이나 다름없는 막말에, 무림맹주의 이빨이 악 다물렸다. 하지만 천마의 힐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데, 너네들에게 우선 순위를 먼저 준 건 내 생각이 아니야. 리그웨더의 의향이었지.”

혀를 끌끌 차는 천마에게, 오운풍이 찌푸린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류 연합?”

“그래, 그거. 현 중원에서 그나마 쪽수랑 조직이 제일 큰 게 무림맹이니까. 빠르게 출범하고 싶다는 거지.”

현 중원에 가장 넓게, 그리고 많이 퍼진 무력 집단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학관 연합. 천무학관을 필두로 한, 엘리트 무사들을 쭉쭉 뽑아내는, 군사 교육 전문 재단.

그리고 또 하나는 정도무림맹. 옛 구파일방의 뿌리들이 모인 역사 깊은 명문의 후예들.

비록 전성기 때만큼의 힘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들의 인맥은 중원 전역에 뻗어 있다. 특히, 보수적인 집단 특유의 폐쇄성은, 가끔 단결력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예컨대, 천무학관이 학관연합에서 모든 학관의 인류 연합 가입을 제창한다면, 몇몇 학관은 인상을 쓰고 들고일어날 수도 있다. 그만큼 권한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무림맹의 맹주가 명령하면?

당장 무당파는 우르르 본산까지 비우며 몰려올 것이다.

누군가의 사부, 누군가의 제자로 이어진 끈끈한 관계. 그렇기에 수직적인 명령 하달에 가장 효율적이다.

따라서 리그웨더의 1안은 이 둘이 먼저 결합하는 것이다. 두 단체의 인원과 재량이 합쳐지면, 자그마치 중원 무인들의 4할에 가까운, 초거대 집단이 만들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평소에 이리저리 저울질을 하던 중소 문파나 세력들도, 늦게나마 한배를 탈 수 밖에 없다.

안 그러면 뒤처지고 말 테니까.

‘이건…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사실, 막아서도 안 된다.’

큰 그림을 보게 된 무림맹주는 고뇌했다.

오운풍이라는 개인으로서는, 사람의 도리를 무시한 흉악한 마공 따위, 본 척 만 척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결정했다간 무림맹이…….

‘뒤처진다. 세력가, 야심가, 상단, 헌터, 클랜들에게…….’

대격변의 날 이후, 남자는 삼류 무인조차 못 되는 청년부터 죽어 나갔다.

지금은 한 줌의 곡식을 위해, 벌판에서 몬스터와 싸우며 매일매일 목숨을 거는 투쟁의 시대.

혹자는 명예를, 혹자는 몬스터 부산물을 통한 이익을, 그리고 혹자는 내 가문과 고향을 지키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다들 더 강한 힘을, 더 빨리 얻으려 한다.

그런데 강맹한 위력에, 빠른 시간에 연성이 가능하고, 심지어 마공 특유의 부작용도 사라진 새로운 신공.

과연 이걸 마다할 무인이 있을까?

부정적이다. 그들은 유래가 어쨌건, 만드는 과정에 마교에서 몇만 명이 죽어 나갔건,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뭔 상관이냐며 두 손 들고 반길 것이다.

지금의 무림맹과는 달리, 체면 따지지 않고.

‘한 번 밀리게 되면 끝이다.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게 간격이 벌어지게 될 뿐.’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되면, 무림맹은 이제까지 부려 왔던 영향력을 더는 휘두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강호의 중소 문파들이 그랬듯이, 이리저리 눈치만 보다 뒤늦게 합류해서 부스러기만 얻어먹는, 처량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 아니,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무림맹의 힘이 약해지면, 휘하의 중소 문파들이 대거 이탈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물론 구파일방이라는, 맹의 핵심 중추들은 어차피 침몰하는 배라도 계속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한 다리 건너 간접적으로 맹에 가입해 있었던 중소 방파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 심심한 유감을 표명하며 떠나면 그뿐일 터.

하나씩. 한 명씩.

처음에는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듯이, 하지만 점차 구멍이 넓어져서, 댐이 무너지는 사태로 벌어진다.

빠르지만 느린 시간.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무림 맹주는 얼굴이 잔뜩 굳었다.

‘천무학관이… 칼을 단단히 갈고 왔구나.’

이제 보니 리그웨더는 합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따르라고 통보를 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그녀답지 않은 과격한 행보다.

아니, 어쩌면 단위가 달라졌을 뿐 평소의 그녀일지도 모른다.

따르라고 명령하는 대신,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만들었을 뿐이니까.

“…교주께서는 리그웨더 학과장을 대단히 신뢰하시는 군요.”

그리고 그 대세의 시작은 바로 눈앞의 남자.

자신을 백사십 년 전의 마교 교주, 구옥경이라고 자칭하는 남자였다.

“신뢰라… 뭐, 그럴지도. 인간이 아니니까.”

천마는 끄덕였다.

인간이 아니니까 믿을 수 있다. 인간은 약속을 깨뜨리니까.

그게 욕심 때문이건, 누군가의 압력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정 때문이건 간에.

마교. 본래 천신교라는 숭고한 이름을 썼던 이들이, 등짝에 칼을 맞은 것이 한두 번이던가.

“그… 저, 그럼 교주…….”

“아니, 안 돼.”

맹주가 입을 열자 천마는 듣지도 않고 잘랐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뻔했으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무림맹주. 거절한다며? 어째 일각도 되기 전에 본인이 한 말을 뒤집으려 들어? 남아가 일구이언이면, 어? 내가 그 뒤에까지 말해야겠어?”

“…….”

무림맹주의 얼굴이 돼지 간처럼 시뻘게졌다.

일구이언이면 이부지자. 아버지가 둘이라는 뜻으로 부모 욕이다.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기분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맹주였다.

“솔직히 부끄럽소.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하나… 교주께서는 조금 전에 가르침을 주셨지 않소.”

“내가? 뭘?”

“한의 대장군은 가랑이 밑을 기었고, 월왕은 오왕의 똥을 핥아 살아남았다고. 일시의 부끄러움을 감내할 수 있어야 미래도 있다고.”

“…허.”

천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은근하게 걸고넘어진다. 확실히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여기서 나 몰라라 하면, 이번엔 천마가 자기 말에 책임을 못 지는 사람이 되는 격이다.

“말씀해 주시오. 이 불민한 오 모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귀 교에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시길.”

푸욱.

억지를 잔뜩 쓴 후 고개를 깊이 숙이는 무림맹주.

소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귀가 붉어져 있었다. 아마 분노와 수치심에 범벅이 되어 있으리라.

그에 천마의 기분은 심히 유쾌해졌다.

“…좋은데? 좋아. 마침 네가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하지.”

하늘 같은 무림맹주에게 몇 번이고 창피를 줄 수 있어서?

뭐, 그런 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역대 천마신교의 교주 중에서, 정도무림맹의 맹주가 이만큼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 이가 몇이나 되던가.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기록에는 남기지 않겠지만.

“무엇이든 하명하시지요. 내가 들어줄 수 있…….”

“붙자. 한판.”

그것보다 더 욕심나는 게 있었다. 현경의 고수. 그와의 제대로 된 싸움.

이 얼마나 탐이 나는 먹을거리인가.

“…다시 말씀해 주시겠소? 지금 교주께서 하신 말씀은 마치…….”

“어.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니랑 싸우자고. 실력 좀 보자. 무림맹주 오운풍.”

사실, 무당파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근질거렸다. 참았었지만.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전생에 칼을 맞은 곳이 뜨끈뜨끈할 정도다.

“사실, 물건도 안 보고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었지? 그러니 보여 준다.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

등짝의 흉터는 수치라던가?

스스로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천마는 이미 진작부터 달아올라 있었다. 바로.

저놈의 태극검.

“마공을 터전으로 쌓은 정공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감히 자신에게 몇 년이고 악몽을 꾸게 만들었던, 무당파의 유산. 무림 역사상 최고의 무인으로 검선으로까지 불린 장삼봉. 그의 심득,

그걸 자신이 손수 깨뜨린다면… 다시없는 짜릿한 술안주가 될 것이다.

“…교주, 지금 그 말은…….”

확!

오운풍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뭘 생각한 건지, 기세가 일변했다. 사방이 막힌 방 안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후우욱.

좀 전까지 치욕에 떨던 무림맹주는 더는 없었다.

지금 천마의 앞에 선 이는 명백한 일대종사.

무당파가 배출한 당대 최고의 검수. 오운풍이다.

“그래, 태극검. 한판 붙자. 현경이 센지 탈마가 센지.”

그에 도전하는 자는 천마신교의 교주, 구옥경.

상대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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