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마공과 정공 (5)
드르륵. 그그극.
오래된 책꽂이 안쪽을 눌러 비틀자, 바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덜컥. 즈르륵.
그리고 빠끔히 입을 벌리는 지하로의 계단.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오는데, 공기 속에 곰팡내나 잡스러운 악취가 없다.
의외로 건물의 바깥보다 지하가 더 정돈이 잘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기관이네. 이런 곳에 이런 시설이 있었어?”
천마는 감탄했다. 맹주가 만날 장소를 왜 여기로 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썩어 가는… 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낡은 건물이라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집 같았는데, 그 안에는 이런 기관 시설을 갖추고 있다니?
“자리가 자리인지라.”
맹주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정도무림맹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공공연히 밝히고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때로는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조용하고 은밀히 처리해야 하는 일 또한 분명히 있을 터.
특히 그놈의 ‘정도’를 간판 앞머리에 달고 있는 이상,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맹주를 견제하려는 상대는, 대부분이 무림맹 바깥이 아니라 내부의 인물들이니까.
저벅저벅. 뚜드득.
오운붕이 먼저 지하로 내려갔다. 일부러 등을 보이는 게 얼핏 보기엔 무례할 수 있는데, 사실은 딴에 어떻게든 천마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 심사가 뻔히 보여, 천마는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내려갔다.
“호오…….”
지하 통로는 조금 어두울 뿐, 이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조명은 횃불이나 등잔 대신, 벽에 박힌 야광주가 은은히 빛을 뿌리며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마도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겠지만, 대신 사람이 주기적으로 와서 등잔 기름을 보충하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철저히 무인 관리에 중점을 둔 설계. 심지어 통로에는 함정까지 여기저기 있었다.
“여기, 이쪽 발판을 조심하시지요.”
“…구분이 안 가네. 설계 누가 했었어?”
천마도 소싯적에 기관 진식을 조금 들여다보긴 했지만, 지금 지나가는 통로는 도통 뭐가 설치되어 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과연 무림맹주 전용의 비밀 장소다웠다.
“당가요. 가문과 사이가 안 좋은 불운한 천재가 한 명 있었소.”
“과연. 과연.”
말만 듣고도 바로 납득했다. 사천당문은 독과 암기에 능하지만, 그 가문 내부는 기관으로 철옹성 같은 집안이다. 오죽하면 마교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고슴도치들.
“이거 밟으면 터지거나 그래?”
“이곳에 살상용 기관은 없소. 애초에 맹주가 따로 움직이는 곳이니. 대신, 격발되면 어마어마한 굉음이 발생하지.”
“…거 대단하네.”
소음 트랩? 조금 생소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지금 이 통로는 무림맹 한복판의 지하.
굳이 폭팔이니, 대인살상 암기니, 하는 거창한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그냥 큰 소리 한 번만 나도, 사방에서 무림맹 소속의 무사 및 고수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러니…….
천마는 조금 긴장해서 오운풍의 발만 노려 보았다. 앞서 나가는 맹주가 밟는 자리만 정확하게 따라 밟았다. 괜히 이런 거에서 실수라도 하게 되면, 무지무지하게 쪽팔릴 것 같아서다.
자박. 자박. 자박.
공기는 선선했다. 그리고 지하라는 환경을 생각하면, 습도는 의외로 낮았다.
통로 곳곳에 숯이나 방습을 목적으로 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 덕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식경, 아니, 반 시진 가까이 걸었을 때.
“대충 이 정도면 된 것 아냐? 더 가야 돼?”
지하에선 보통 지나 온 거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방향이 많이 바뀐 것도 아니고, 천마의 감각으로 볼 때는 이 정도 걸었으면 대충…….
맹의 바깥. 혹은 구석으로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듯했다.
“…다 왔소. 반각만 더 가면 되오.”
“그래. 빨리 좀 가자.”
뭐, 목적이 비무 혹은 대련인 만큼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천마는 뻔뻔할 뿐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당대 무림맹주와, 잊힌 마교의 교주.
그 둘의 격돌이 무림맹에 얼마나 큰 여파를 가져올지, 그리고 그걸 현 무림맹주가 얼마나 꺼려 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으니까.
저벅. 저벅.
“다 왔소.”
한참을 더 가자 길 한쪽에 굽어진 갈래길이 나왔다.
“이쪽이야?”
“아니, 그쪽은 눈속임용이오. 자리는 여기지.”
끼긱. 끼기긱.
대답한 맹주가 벽 한쪽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비틀었다.
드르릉. 그그르르륵!
처음에는 작은 기관음이었는데, 그게 뭔가의 작동을 일으켰는지 지하 전체가 크게 울렸다.
철컥철컥. 그그그긍!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으로 보이던 문이 열리고, 드러난 것은 거대한 석실의 공간.
“…와.”
크고, 아늑하고, 무엇보다 견고해 보이는 지하 석실. 여기가 무림맹주만의 비밀 공간일까.
벽과 바닥은 온통 청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견고하고 내구도가 높아, 어지간히 내력을 담아 후려치기 전에는 금도 가지 않는 단단한 석재다.
“괜찮은데?”
석실 한쪽에는 잘 만들어진 인체상과, 몸 풀기에 좋은 수련용 기구도 몇 있었다. 아마 맹주 개인의 폐관수련도 겸할 수 있게 해 둔 모양이다.
반대쪽은 침상. 그리고 그 주변에 선반이나 책장. 그리고 벽곡단이 가득해 보이는 항아리도 두엇.
그리고 아마 의약품으로 보이는 약장도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뭔 일 생기면 여기 숨어 있어도 되겠다. 대피소처럼.”
“그런 역할도 겸하도록 만들었다 들었소. 최대 두 달 까지는 몸을 쉬며 버틸 수 있다고.”
맹주가 대답했다.
이곳은 평소에 그가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때, 혼자 조용히 생각이나 결단을 내리기 위해 찾는 곳이다. 당연히 편안한 장소가 되어야 했다.
그 김에 혹 맹주가 무슨 변고-예를 들어 암습-에 휘말렸을 때, 몸만 빼내 이곳에 당도하면, 바깥 사정이 정리될 때까지 절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두 달이라…….”
대피해서 치료를 하기에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운기요상으로 집중해서 몸을 추수를 수 있을 정도의 기간.
뭐, 당장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부상이라면, 그런 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기도 하고.
“근데 공간이 아깝네. 너비로 봐서 작정하면 1년도 있을 수 있겠는데?”
“어, 그건… 환기 문제 때문에 힘들다고 들었소. 아무리 벽곡단으로 곡기는 보충한다 해도…….”
“아, 똥 냄새. 그건 확실히 곤란하겠네.”
맹주가 머뭇거리는 걸, 천마는 바로 짚어 냈다.
“…사람을 곤란하게 하시는 취미가 있으시구려.”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천마의 표현이 너무 저렴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진지하게 충고하는 거야. 당장 나도 폐관수련이라면 어지간히 해 본 몸이니까.”
사실 배변 문제는 장기 거주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다.
대피소라는 장소는, 혹 모를 위기에 사용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쓸 일도 없다.
그래서 평소에 별생각 없이 만드는 이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사항이 바로 측간. 화장실 문제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하지만 먹으면 싸야(?) 한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 석실에서, 구리구리 풍겨 대는 변 냄새를 계속 맡고 있는다? 그건 대피자의 정신 건강에 심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얼마나 나쁘냐면 사람이 자살을 할 정도다. 여담으로 지금은 망해 버린 명왕조의 지하뇌옥의 경우, 죄수가 고문 때문이 아니라, 웃기게도 자기가 싼 똥 냄새를 참다못해 여죄를 토설했다고.
하기야 아무리 심지가 굳건한 지사라 하더라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자기 똥 냄새를 계속 들이마시는 건, 사람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다음에 만들 때는 지하수가 흐르는 곳으로 찾아봐.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싸는 문제다.”
“…참고하리다. 그건.”
무림맹주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이미 환갑을 넘은 장년에게 똥 이야기라니? 악의 없는 긴요한 충고라도, 별로 듣고 싫지 말이 있는 법이다.
“어차피 안식처는 새로 하나 마련해야 할 터. 일단 이곳은 교주께서 알게 되셨으니 말이오.”
“…야, 아무려면 내가 맹주의 비밀거점이 어디 있다~ 하고 바깥에다 떠들 거 같아?”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저 내 기분과 마음의 문제라.”
“뭐… 그건 또 그러네.”
안식처란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썼던 모양이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런 곳 하나를 날리게 만들었으니 천마도 조금은 미안한 노릇이었다.
“좋아. 사과의 의미로 잠시 저기 가 있을게.”
“……?”
“붙기 전에 마음 정리. 뭐야? 안 해도 돼? 그럼 나야 좋지만.”
천마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천천히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달려들 자세라, 맹주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확실히 필요하겠구려. 배려에 감사드리오.”
“어. 그래.”
차악.
일부러 차양막까지 쳐 주고 석실의 저~ 구석에 정좌로 앉는 천마.
별 의미 없겠지만, 물리적으로 거리를 좀 두게 되니, 아무래도 조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후우우우…….”
오운풍은 반가부좌를 튼 자세로, 천천히 깊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긴 하루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너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시간이었다.
비록 그도 현경의 고수.
그것도 현경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지고의 무위를 가졌지만, 상대인 천마는 최소 자신과 같이, 탈마라는 경지에서 역시 막바지에 다다른 호적수다.
전심전력으로, 만전을 기해야 한다.
후우. 후우…….
고수가 되면 될수록, 승부가 갈리는 것은 몸 상태나 내공보다 심력의 여유.
자잘한 잡념에 정신을 갉아먹히면,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된다. 이를 심마라 부르며, 현경 정도 경지의 고수들이 수시로 겪는 난마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성미로군.’
피식.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다가, 오운풍은 웃었다.
감각이 확장되어 가며 천마 구옥경, 차양막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수의 기질이 전해져 온다.
굶주린 맹수. 아니, 아니다. 굶주리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일부러 공복을 유지하여, 성대한 만찬을 잔뜩 기대하는, 고급스러운 입맛의 미식가 같달까.
천마는 진정으로 오운풍이 제대로 싸워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상대의 틈을 노리는, 승리라는 결과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바 서로 역량의 최대한을 끌어내는, 정정당당하고 멋진 싸움을 기대하는 젊은이 같았다.
그리고 그게… 묘하게 오운풍을 들뜨게 했다.
생각해 보면 대체 언제이던가?
역량을 숨기지 않고, 누군가와 전력으로 맞붙어 본 적이? 헤아려 보니 정말로 너무 오래되었다.
맹주직에 오른 이래, 항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리에 걸맞게 움직이느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주이기 이전에, 오운풍 역시 한 사람의 무인이라는 것을.
‘나도 아직 주책이군. 아니… 이런 생각도 그만.’
후욱. 후우욱.
오운풍의 호흡이 느리게, 깊게 변했다.
무당파 특유의 기류. 살짝 세상을 초탈하는, 존재감이 희박한 상태로 변해 가며, 오운풍의 좌정한 몸은.
스르륵. 둥실둥실.
자연스레 외기를 타고 허공에 떠올랐다.
꿀꺽!
차양막 너머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감지한 천마는, 요란하게 군침을 삼켰다.
‘진짜다. 저놈… 진짜 태극검이야…….’
맹주의 짐작처럼, 맛있는 요리를 기대하는 미식가의 눈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