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움찔, 움찔.
임민혁은 저 구석에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느껴지는 반응을 보니 암시는 확실하게 들어간 것 같았다.
이제 철부지 애들처럼 각성만 믿고 나섰다가 불필요한 사고(?)가 나는 일은 없겠지.
일반인들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을 테고.
사실, 원래라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태수 친구라는 점이 컸다.
비록 할머니가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아이였으니까.
게다가…….
아니, 이건 태수에게 나중에 이야기해 줘야겠다.
“태수야, 저녁 장사 준비 확인.”
“예. 형님.”
특별히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육수는 넉넉했고, 반죽도 숙성이 잘된 상태였다. 손님이 오면 밀대로 밀어서 적당히 잘라 삶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양념장도 다진 마늘도 넉넉해 딱히 더 마련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물론 면 삶을 물은 한 번 갈아줬다.
생각보다 밀가루가 많이 풀렸는지 조금 뻑뻑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끝나고 나니 금치수가 다가왔다.
“형님, 저는 뭐 도울 거 없습니까?”
“흐음, 설거지는 다 됐고. 혹시 모르니까 밑반찬만 좀 담아줄래?”
“예? 바, 반찬요? 아, 알겠습니다.”
잠시 움찔하던 금치수는 이내 주방 쪽으로 움직였고, 그러자 임민혁도 다른 친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청소라도 돕겠습니다.”
“오, 그래? 생각 잘했다. 안 그래도 힘쓸 일이 좀 있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말이야.”
“힘쓸…… 일요?”
“입구 옆에 있는 밀가루 포대 안쪽 창고로 좀 옮겨놔라. 하는 김에 바닥도 쓸고 정리도 좀 하고.”
임민혁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군말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애들이 하나씩 움직이자 가게가 조금 부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군대 가기 전에는 진상 손님들 때문에 사람이 싫어졌는데, 거기 있다 보니 달라지더라.
오히려 사람 냄새가 그리워진다고나 할까.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조금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잠시 테이블 닦고 쉬는데, 저녁 개시 신호가 울렸다.
드르르륵!
정겨운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언젠가 얼굴 한 번 봤던 것 같은 아이들이었는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부터 하더라.
“저희 칼국수 다섯 그릇 주세요. 양 많이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태수에게 곱빼기 주문을 넣고 학생들을 쳐다봤다.
운동하는 애들인지 다들 덩치가 좋았는데, 진심으로 배고픈 표정이었다.
탕탕탕탕탕!
이것도 조건 반사인가?
얇은 반죽이 일정하게 썰리는 소리가 울리자, 학생들이 군침을 흘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곱빼기가 나왔다.
양념장과 다진 마늘을 듬뿍 올린 다음 테이블로 나갔더니 학생들은 이미 숟가락과 젓가락, 앞접시로 전투 준비를 마친 상황.
“뜨겁습니다. 조심해서 드세요.”
“예, 감사합니…… 다!!”
‘다’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움직이는 젓가락.
그걸 보는데 이상하게 흐뭇해졌다.
사실 이 가게는 곱빼기도 추가금을 받지 않기에 주머니 사정이 아쉬운 이들이 많이 찾았다.
덕순 할머니는 그랬다.
어렵고 못 먹던 시절부터 장사를 하면서 그렇게 방침을 세웠고, 지금까지 지켜왔다.
태수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야 한다면서.
‘사실 아버지도 이런 가게를 꿈꾸셨다는데…….’
드르르륵-
바로 동네 아저씨들 두 분이 오셨고, 근처 공사하는 인부들도 네 명이나 들어왔다.
태수는 능숙하게 칼국수를 삶아 줬고, 나는 거기에 양념장과 다진 마늘을 듬뿍 올렸다.
그사이 금치수가 정구지 무침과 깍두기를 준비했다.
임민혁도 어느새 포대를 다 날랐는지 슬쩍 주방을 기웃거렸다.
“흐음, 이거 뭔가 뚝딱뚝딱 잘 맞는 느낌인데?”
“저희, 전에도 할머니 아프실 때 여러 번 도운 적 있어요. 아마 형님보다는 잘 알걸요?”
“나 여기 주방 들락거린 지가 15년이 넘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예? 정말요?”
금치수는 화들짝 놀라며 정태수를 쳐다봤다.
“형이 나보다 오래되긴 했지. 물론 쭉 일한 건 아니지만.”
“그냥 간간이 도와주고 그랬지.”
행복 분식은 점심때가 제일 바빴고, 칼국숫집은 저녁 손님이 많았다. 그래서 방학 때는 종종 칼국숫집 일을 거들어주기도 했었다.
겸사겸사 태수랑 현지, 현아가 안방에서 공부하는 것도 지켜보고.
“어, 손님 또 들어온다.”
그렇게 작은 칼국수 가게는 멸치 육수 퍼지는 향과 칼국수 써는 소리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 * *
“가게 수리를 한다며?”
어제 막걸리 한잔하면서 우리 강 여사가 한참을 떠든 모양이군.
점심도 되기 전에 날 부른 게 그 이유 때문이겠지.
“예. 시설이 너무 오래되어서 이참에 삭 뜯어고치려고요.”
“하긴, 원래 그 자리가 여기 칼국숫집보다 먼저 지어졌으니 오래되긴 했지. 가만있어 보자.”
덕순 할머니는 취기가 남았는지 더듬더듬 뭔가를 찾고 있었다.
서랍 속에서 나온 건 명함 하나.
“준열이라고, 요 밑에서 작은 회사 하나 한단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콕 인테리어!
순간 우리나라에 곡씨도 있나 싶었다.
진짜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은 아니겠지?
“곽 실장이라고, 우리 민우 친구여. 너도 오다 가다 몇 번 보기는 했을 거다.”
“아, 민우 아저씨 친구분이세요?”
“그려. 재작년에는 저 안방 보일러도 그냥 고쳐주고 갔어. 나름 이 동네서 오래 했으니까 믿고 맡겨봐.”
“예. 감사합니다.”
민우 아저씨는 태수의 아버지였다.
오래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어서 얼굴 한 번 본 적은 없지만,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덕순 할머니 소개라면 이 곽준열이란 분도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현성아. 네가 보기에 어떠냐? 태수 일하는 거, 가게 맡길 만해?”
“칼국수 나가는 거 보면 그럭저럭하는데, 장사 방식을 조금 바꾼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 양념하고 따로 내가는 거?”
“예. 손님이 자기 취향대로 해 먹는 거요. 전 나쁘지 않다고 보거든요. 대신, 먹는 설명 같은 거 크게 붙여놓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덕순 할머니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으셨다.
하긴, 무려 40년 동안 장사했던 방침을 바꾸는 거니 고민이 되는 게 당연하겠지.
“그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리고 현성아, 우리 태수 좀 챙겨줘.”
“당연히 그래야죠.”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야.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언제 어떻게 돼도 모를 일이잖아.”
일전에도 한 번 하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내가 태수에게 미처 못 한 말이기도 했다.
태수는 부모님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 말로, 먹고 사는 거야 가게를 물려주면 되는 문제지만 없는 가족을 만들어줄 수는 없단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우리 가족이 이사 오면서 그게 많이 희석되었다는 거다.
내가 동생들하고 놀러 오는 걸 좋아하신 것도 그래서였다.
그때마다 칼국수와 먹을 걸 잔뜩 해주기도 하셨고.
“글고, 걔 친구들도 다들 착한 것 같으니까 너무 구박하진 말고.”
“하하, 구박이라뇨.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려준 거죠. 돈을 내든가 일을 하든가 하라는 겁니다.”
“그것도 맞기는 한데, 나중에 나이 들어봐라. ‘돈보다 사람’이더라.”
차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 말도 맞지만, 아직 태수는 장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했다가 망할 수도 있는 법이다.
“알어. 안다고.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거. 하여간 신경 좀 써주라.”
“예. 걱정 마세요.”
사실 태수에게도 고마움이 있기는 했다.
무려 7년간의 군복무.
그사이 태수는 현지에게 착한 동생이었고, 특히나 소심한 현아에게는 기댈 수 있는 좋은 오빠이기도 했다.
눈치를 보니 둘이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뭐, 앞날은 모를 일이니 단정하진 말자.
덕순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칼국수 한 그릇 하고 갈래?”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 * *
“흐음, 확실히 미묘한 차이가 있어.”
순수하게 맛이나 기교로만 따지면 태수도 충분했다.
할머니가 힘이 부쳐서 이제 기계로 면을 뽑는다면 태수는 진짜 손칼국수였다.
면을 탕탕탕 자르는 소리는 시각과 청각을 충분히 만족시켰고, 미묘한 두께 차이에서 오는 다채로운 식감은 맛을 배가시켰다.
실제로 학생들이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맛은 덕순 할머니께 더 마음에 들었다.
대충 무친 걸로 보이는 정구지 무침.
김치와 깍두기는 이제 직접 담그기 힘들어서 주문 제작으로 가져온다고 했다.
그릇에 담은 면에 육수를 붓고, 투박한 양념장을 턱턱, 다진 마늘을 탁!
여기에 깻가루와 김 가루가 무심히 올라간 게 끝이었다.
하지만 한 젓가락 들어 후루룩 먹어보면 깊이가 다르다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걸 아마 손맛! 이라고 하는 거겠지?
“하여간 태수도 노력 많이 해야겠다.”
이건 당장 내 문제이기도 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 물려받기 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까.
“그나저나 이 근처 어디라고 했는데?”
전포동 옛날 전자상가 거리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었는데, 구조상 크기가 작았다.
때문에 소품 숍이라든가, 마카롱 등의 디저트 가게들과 작은 옷가게들이 1층을 점령한 상태였다.
즉,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계단 찾는 것도 쉽지 않다는 소리다.
“아! 찾았다. 그런데…….”
1층에 있는 건 자그마한 수제 만둣집이었다.
더욱이나 찜기에서 수증기가 무럭무럭 뿜어져 올라가고 있었으니, 간판이 보이는 것도 이상하겠지.
“군침 땡겨서 일하겠나 몰라.”
그렇게 이 층으로 올라가니 예상대로였다.
복도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음에도 만두 냄새가 나는 듯했다.
어딘가 틈이 있다는 거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뜬금없이 옛 기억 하나가 떠올라서였다.
후임 하나가 대학생 때, 이사를 잘못 갔다고 했다.
하필 건물 1층이 치킨집이었는데, 카레 치킨으로 유명한 집이었던 것이다.
창문을 다 막았음에도 어디선가 냄새가 들어왔고. 결국 모든 옷에 카레 냄새가 배었다.
그에 원망하고 분노하다 정신 차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치킨을 뜯고 있었다는 것.
그 결과, 120㎏ 가까이 찌고 말았고.
그때 별명이 ‘카레 돼지’였다나?
물론 군대에서 체형이 근육질로 바뀌긴 했지만, 별명은 여전히 카레 돼지였다.
조건 반사인지 신기하게도 카레 냄새만 맡으면 침을 질질 흘렸고.
자신도 모르게 식욕이 폭발해 뭐든지 남김없이 쓸어 먹게 된 것이다.
덕분에 환장할 능력을 각성하게 되지만, 뭐, 본인에게는 트라우마였다.
전투에 들어가면 몸에서 카레 향이 뿜어지니까.
“하, 그건 그렇다 치고. 204호면 이쪽이겠네.”
복도를 걸어 문 앞에 섰다.
정중히 노크 하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잠깐 시력을 의심할 뻔했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건 한 마리 곰이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하얀 피부에 검은 선글라스. 거기에 흰 셔츠에 검은 팔토시와 마지막으로 검정 정장 바지까지…….’
뒤늦게 생각났다.
이건 영락없는 팬더 그 자체 아닌가!
“실례합니다. 아까 전화드린 유현성이라고 합니다.”
“어~ 왔어? 여기 이쪽에 앉아.”
그러면서 선글라스를 벗는데, 눈매도 동글동글한 것이 더럽게 귀여웠다.
“하, 하하. 원래 이쪽 업계가 좀 얕보이면 일이 피곤해지거든.”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190㎝가 넘는 팬더를 상대로 인간이 감히 도발을 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현성아. 너 진짜 많이 컸다.”
“저 아세요?”
“할머니네 칼국숫집에서 봤잖아. 용돈도 몇 번 줬는데…… 아! 하긴 모를 만도 하지.”
곽준열 실장은 피식 웃은 다음 툭 내뱉었다.
“나 재작년에 각성했거든.”
“예? 각성이요?”
헐, 그게 이렇게 흔한 일이었나?
“비록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는 F급 바닥이긴 한데, 하필 부작용이 커지는 거더라고.”
더 어이가 없는 건 그 뒤의 이야기였다.
북경 출장 갔다가 게이트 파동에 휘말렸단다.
그것도 하필이면 동물원 근처에서.
분명 그런 주장이 잠시 있기는 했었지…….
각성하는 순간의 의지와 환경에 따라서 능력치가 정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그렇다고 사람이 팬더가 될 수 있는 건가?
가만히 곽 실장 얼굴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곧이어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다.
“설마, 곱빼기 두 그릇 아저씨?”